§ 나는 될놈이다 130화
목표가 복수에서 도망으로 변했다.
어찌 보면 엄청나게 내려간 셈이었지만 케인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진지했다.
‘두고 보자. 대륙은 넓다! 내가 기회만 잡아서 도망치면 네가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겠냐!’
계약서를 써서 페널티를 받는 게 겁나기는 했지만, 태현한테 시달리느니 차라리 저주를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케인은 쪼잔한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워갔다.
* * *
그들이 그러는 사이, 골짜기 안쪽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현이 일으킨 폭발 때문에 폭주하고 있는 불의 마수!
그 불의 마수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사디크 교단!
그리고 정확한 상황을 모르고 일단 퀘스트를 깨려고 달려오는 플레이어들!
여러 세력이 서로 부딪히는 골짜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
콰콰콰콰쾅!
“이 하찮은 필멸자 놈들이 어디서 감히!”
“이교도 놈들을 쓸어내라!”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들은 갑작스럽게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의 기세에 뒤로 밀려났다.
이번이 기회라고 본 플레이어들과 다른 교단의 지원군까지 동시에 달려드니 그 기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디크 교단이 준비하고 있던 불의 마수는 어째서인지 제대로 명령을 듣지 않는 상황!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디크 교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역시 이런 대규모 퀘스트가 나올 정도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숨겨진 전력들을 바로바로 내보냈다.
쾅! 쾅!
-쿠어어어어!
“피해라! 마수다!”
“아직까지 마수가 있었어?!”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사디크 마수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잡았는데도 아직까지 나오다니. 이제 질릴 정도였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디크의 이름으로!”
“위대한 사디크여! 나를 돌보소서!”
아직까지 가만히 있던 사디크 정예 성기사들의 출동!
골짜기 앞 평야에서 싸우는 동안 힘을 아끼고 있던 사디크 교단의 정예 병력이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번쩍! 쿠르릉!
곳곳에서 강렬하고 화려한 마법이 펼쳐졌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바로 죽어서 로그아웃 당하는 플레이어들도 꽤 있었다.
워낙 오가는 마법들이 강력했기에 제대로 한 방 맞기라도 한다면, HP나 방어력이 낮은 직업은 위험했던 것이다.
“저기! 저기가 성기사들 많다! 가자!”
“우리 파티가 먼저 봤거든? 꺼져!”
그렇다고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우는 건 아니었다.
워낙 넓고, 적도 워낙 많았으니 플레이어들은 알아서 움직이며 자기 나름대로 퀘스트를 깨 가고 있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랭커나, 대형 길드 같은 경우는 강한 적이 있는 곳으로.
실력에 자신이 없는 플레이어들은 만만해 보이는 적이 있는 곳으로.
그러다 보니 다툼도 꽤 많이 일어났다.
“뭐? 예약이라도 해놨냐?!”
“내가 선점한 몬스터들 건드리지 마라!”
그러는 사이, 사디크 교단 소속 플레이어 버포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 * *
“어떻게 된 거냐! 왜 놈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저희도 지금 이유를 찾고 있습…….”
“됐다! 형편없는 놈!”
사디크 교단 막사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버포드는 그 소리를 듣고 불안해했다.
‘이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원래라면 여기 몰린 플레이어들 상대로 불의 마수를 꺼냈어야 했다.
사디크 교단이 자신만만하게 먼저 공격을 한 것도 다 이 불의 마수가 있어서였다.
혹시 밀리더라도 불의 마수가 나온다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불의 마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말을 듣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했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고 있는 중!
‘이러면 안 되는데…….’
버포드는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그는 사디크 교단에 거의 올인한 상태였던 것이다.
사디크 교단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렸다. 방송도 하지 않고 조용히 교단 안에서 퀘스트를 깬 것이다.
‘이제 됐다!’ 라고 생각했던 건 왕궁 암살 퀘스트였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공개했다.
-내가 사디크 교단 성기사다! 내가 안에서 퀘스트를 깨고 있다!
버포드의 계획은 성공했다. 갑자기 일어난 왕궁 암살 퀘스트와, 거기의 배후인 사디크 교단.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버포드는 엄청나게 많은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물론 암살 퀘스트로 피해를 본 플레이어들이나, 마지막에 국왕을 죽이지 못하고 도망친 것 때문에 조금 계획이 틀어졌지만, 이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 퀘스트만 성공적으로 깨면 됐던 것이다.
사디크 교단을 토벌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 이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막아내면 버포드의 위치는 탄탄해졌다.
한동안 사디크 교단도 잘 나갈 테니 버포드를 건드릴 사람도 없을 테고, 사디크 교단에 관해서 방송을 할 사람은 버포드밖에 없을 테니까!
이른바 독점 방송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벌써 몇몇 곳에서 섭외가 오고 있었다.
-이번 방송 특집에 한 번 출연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세 시간을 통째로 줄 테니까 사디크 관련 퀘스트는 전부 공개하시죠!
그러나 버포드는 참았다.
지금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가 있는데 괜히 정보를 공개했다가 불리해질까 봐!
사람들의 머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사소한 정보라도 거기서 온갖 것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참고, 버티며 퀘스트를 깨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렇게 교단에서 공을 들이던 불의 마수가 말을 듣지 않는 것!
불의 마수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디크 교단은 이렇게 몰려온 적들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불의 마수만 믿고 이렇게 크게 일을 벌였는데…….
‘어쩌지? 어쩌지?’
버포드는 머리를 잡고 혼란스러워했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 그래도…… 지금 도망치면…….’
사디크 교단에 남아 있다가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험치가 되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렇지만 버포드는 그러지 못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한 상황!
그러는 사이 플레이어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 * *
둥둥둥-
뿌우우우우-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들렸다. 왕국군이나 교단의 NPC들이 아니었다.
용병단이었다.
“용병들까지 고용했어?! 누가 고용한 거야?”
“대형 길드가 했겠지. 아주 돈 많다고 자랑을 해라!”
조건이 까다로운 왕국군이나 교단의 성기사들과는 달리, 용병들은 대체로 플레이어들이 고용하기 쉬웠다.
돈만 주면 OK!
대형 길드들이 이번 퀘스트에서 더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용병단까지 고용한 것이다.
“밀어붙여! 저기까지 점령하면 사디크 교단 놈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
작은 언덕을 점령하고 있던 사디크 성기사들과 마수들은 플레이어들의 맹공에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렇게 하나둘씩 골짜기 앞 평야의 중요한 장소를 뺏기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상황!
사디크 교단도 그걸 알았기에 치열하게 덤볐지만, 점점 불리해져 갔다.
“저기 점령하면 공적치 나온다! 가자!”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신이 나서 외쳤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공적치 경쟁에서 앞서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골짜기 앞 싸움에서 성기사들과 마수들을 쓰러뜨리고 중요한 곳을 점령하며 엄청나게 활약을 한 것이다.
당연히 노리는 것은 1등!
그러나 세상일은 원래 노리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
불의 마수가 나타난 것이다.
쿵쿵거리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에서 화염을 내뿜는 거대한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 강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겁먹고 도망칠 플레이어들이 아니었다.
불의 마수만큼은 아니더라도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한 경험은 꽤 있는 플레이어들!
“나왔다!”
“사디크 놈들한테 붙어! 그러면 공격 못 한다!”
“들어가! 들어가!”
보스 몬스터를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놈의 패턴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어떤 공격을 어떻게 하는지, 어디가 약점인지, 언제 빈틈이 나오는지.
이런 정보들은 엄청나게 중요했다. 이런 정보들만 따로 모아서 파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보통 이런 정보 없이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다면 한두 번 정도는 실패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경험 많은 노련한 길드원들은 역시 달랐다.
-저놈은 사디크 교단이 불러낸 마수다. 그러니까 사디크 교단의 말을 따르겠지.
-그렇다면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들과 붙어 있으면 공격 못 한다!
딱 봐도 불의 마수는 범위 공격을 할 것 같은 보스 몬스터였다. 덩치부터가 엄청난 것이다.
주먹만 휘둘러도 범위 공격!
그게 오히려 약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길드원들은 앞으로 돌진했다. 사디크 성기사들과 바짝 붙기 위해서.
그리고 불의 마수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굉음이 터져 나왔다. 땅이 뒤집히고 안에서 화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불의 마수의 공격을 맞았습니다. 디버프 <사디크의 업화>에 걸립니다.]
[HP와 MP가 빠르게 감소합니다!]
“으아악!”
갑자기 공격을 당한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사디크 성기사들도 있는데 때린 거야? 아군은 피해가나?”
플레이어들은 혼란에 빠져서 떠들어댔다. 명령을 내린 파티장도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진짜 아군은 피해가나? 무슨 그런 사기 스킬이…… 헉!’
사디크 성기사들은 무슨 특수한 스킬로 공격을 안 받나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깨졌다.
앞에서 사디크 성기사들도 같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
“뭐야?!”
그제야 플레이어들은 깨달았다. 저 불의 마수는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놈이었다!
쾅! 쾅! 쾅!
“으아악! 피해! 미친놈이다!”
“저거 왜 자기네 편까지 공격하는 거야?!”
물어봤자 불의 마수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며 발밑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쓸어버린 불의 마수는 고개를 위로 젖혔다.
콰아아아아아-
[<사디크의 숨결>에 맞았습니다. 모든 버프 스킬이 풀립니다!]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드래곤 브레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위협적인 숨결이었다.
이미 몇 대 맞은 상황에서 추가로 맞자,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로그아웃당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어디서?!”
“공격해!”
자리에 있던 몇몇 플레이어들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눈부신 돌격!
-연속 그림자 기습!
퍼퍽, 퍼퍼퍽!
상대방에게 상태 이상 디버프를 거는 스킬들이 연속으로 나왔다.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도 스턴 상태에 걸리거나 실명 상태에 걸리면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불의 마수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준 랭커급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연속으로 맞고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크르르…….
파아아앗!
불의 마수가 온몸을 부르르 떨자 전신에서 불로 된 화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범위 공격!
“피해! 일단 물러서!”
“저거 미쳤다!”
그제야 덤벼들던 플레이어들도 불의 마수가 얼마나 강한지 깨달았다. 지금 모인 인원들로는 이빨도 안 들어갈 보스 몬스터였다.
왕국군하고 다른 교단들의 지원을 받아야 쓰러뜨릴 수 있는 보스 몬스터!
“튀어!”
불의 마수를 가운데에 두고, 사디크 교단과 플레이어들이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의 마수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화염 덩어리들을 쏘아 보냈다.
도망치다가 재수 없게 맞으면 그냥 사망!
처음 덤빈 길드가 그렇게 도망을 치자 달려들던 다른 사람들도 머뭇거렸다.
그러자 골짜기 앞에 불의 마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공간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