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29화
케인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하나 없이 맑고 푸르렀다.
문득 드는 생각.
-아, 내가 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세상이 나한테 이러는 걸까?
갑자기 드는 깨달음!
게임이 뭐라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녔단 말인가.
그러니까 이렇게 되돌아오는 게 아닐까?
태현 같은 놈을 만나고 그 밑에 있는 저런 멍청이들한테 발목을 잡히고…….
케인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케인은 최근 스스로가 참을성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러니까, 이 자식들아…….”
빠득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별로, 김태산 저놈하고 같이 다니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너희들끼리 같이 다니면, 되거든? 앙? 그러니까 앞으로 같이 다니자는 배려 같은 건 할 필요…….”
케인이 말하는 사이, 저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그래? 처음 보는 장비인데.”
“아니, 장비 말고. 스킬을 어디서 본 거 같아.”
“……!”
케인은 깜짝 놀랐다. 지금 그는 대장장이들이 새로 만들어준 갑옷을 입고 있고, 투구로 얼굴까지 가린 상태였다.
어지간하면 케인이란 걸 알아보기 힘든 겉모습!
그렇지만 그 특유의 스킬은 숨길 수 없었다. 아까 그걸 본 파티원 중 한 명이 스킬을 보고 뭔가 떠올린 모양이었다.
물론 바로 케인이란 걸 떠올리지는 못했다.
-설마 레드존 길마가 저런 장비를 입고 길드원들하고 여기서 싸우고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막 나간 상상!
그러나 케인 입장에서는 등에 식은땀이 나는 말이었다. 들킬까 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케인이 말을 멈추자 김지산이 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케인은 ‘같이 다니자는 배려 같은 건 할 필요’까지 말하다가 멈춘 상태였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필요 있다는 거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앞으로 친구 하죠, 친구!”
케인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대장장이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태현이 있는 왕국군 막사로 향했다.
* * *
“좋아. 드디어 조용하군.”
밖에서 케인이 대장장이들과 우정을 쌓고 있는지도 모르고, 태현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키서스의 권능을 얻을 준비!
[아키서스의 권능을 얻으시겠습니까?]
-그래.
[아키서스의 권능을 얻었습니다.]
[신성이 150 증가합니다.]
[명성이 300 증가합니다.]
[모든 스탯이 5 증가합니다.]
[각 신전에 당신의 이름이 다시 한번 새겨집니다. 슬슬 주의를 하는 게 좋을 겁니다.]
‘……?’
두 번째 권능 스킬에서 나온 경고문. 첫 번째에서는 ‘각 신전에 당신의 이름이 알려진다’였다.
두 번째에서는 ‘다시 한번 새겨진다,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슬슬 태현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뭔 퀘스트가 나오려고…….
메시지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성 권능>의 스킬 레벨이 올라갑니다.]
[<신의 품격>의 스킬 레벨이 올라갑니다.]
[<신수 소환>의 스킬 레벨이 올라갑니다. 신수의 회복과 성장이 더 빨라집니다.]
[직업 스킬 <아키서스의 축복>을 얻습니다.]
‘……!’
권능을 얻을 때마다 다른 직업 스킬들의 레벨이 올라가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신수 소환은 특히 그랬다. 행운을 그렇게 먹은 용용이는 지금 골골대느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회복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보다 지금은 아키서스의 축복이다. 대체 뭔 스킬이야?’
태현은 두근두근 기대되는 마음으로 스킬을 확인했다.
<아키서스의 축복>
화신이 이끄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행운을 공유해 줍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수록 지속 시간이 길어집니다.
‘……!’
태현의 표정이 놀람으로 변했다. 아키서스의 권능은 하나하나가 다 강력한 스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다 예상을 뛰어넘었다.
아키서스의 축복도 마찬가지였다.
신수 소환과는 전혀 다르지만 강력한 스킬!
‘이건 혼자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 여럿이 있을 때 쓸모 있는 스킬이다.’
태현은 바로 이 스킬이 어떤 스킬인지 알아차렸다.
태현이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이나 파티원들에게 태현의 행운을 공유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는 스킬이었지만, 태현의 행운은 네자릿수 단위.
공유하는 순간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아키서스의 축복.
[아키서스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
태현은 다시 한번 놀랐다. 스킬의 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MP가 절반 가까이?’
과연 강력한 스킬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키서스의 화신은 엄청나게 MP를 잡아먹었다.
[<아키서스의 축복>이 15초 남았습니다.]
게다가 지속 시간도 상당히 짧았다.
‘이거 써먹으려면 머리를 좀 굴려야겠는데.’
태현은 아키서스의 축복을 취소하고 일어섰다. 생각처럼 간편한 스킬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래서 좋았다.
까다로운 스킬을 잘 다루는 것이야말로 태현의 능력이었으니까.
‘일단 기사들을 좀 데리고 시험을 해볼까…….’
태현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골짜기 안에서 화염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
그리고 설명이라도 하듯이 바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폭주한 불의 마수가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에 나타납니다!]
[모두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 * *
“무슨 일이야?!”
“사디크 교단 놈들이 비밀병기를 꺼낸 건가?”
“역시 안에서 뭔가 하고 있다 싶었지! 그러니까 이렇게 밖에 나와서 시간을 끌고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기는! 가자! 저놈만 잡으면 사디크 교단도 끝이라는 거 아니냐!”
곳곳에서 모인 플레이어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메시지창에서 나온 경고를 신경 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여태까지 이 대규모 퀘스트를 깨기 위해 고생을 해온 사람들이었다.
사디크 성기사들과 싸우고 마수들과 싸우고 사제들과 싸우고…….
그런데 이제 와서 위험하다고 도망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들인 만큼 건져야 했다.
“가자! 우리가 먼저 잡는다!”
겁 없고 발 빠른 한두 파티가 먼저 뛰어나가자 다른 파티들도 그걸 보고 움직였다.
목표는 사디크 교단과 그들이 불러낸 불의 마수!
그러나 몇몇 눈치 좋은 플레이어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불의 마수 앞에 <폭주한>이 붙어 있지?”
* * *
지금, 이 골짜기에서,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태현이었다.
골짜기 밖에 있는 사디크 교단도,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러나 태현은 알았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으니까!
‘결국 빠져나왔나?’
불의 마수가 안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온 모양이었다.
솔직히 운이 좋았다. 그 폭발 때문에 불의 마수가 폭주하게 된 건 우연이었으니까.
“태현 님! 지금 사디크 교단이 이끄는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저희도 돌격합시다!”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들뜬 표정이었다.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
“안 돼. 기다려.”
“?!”
그러나 태현은 기사들을 기다리게 했다.
‘지금 가는 건 멍청한 짓이지.’
지금 가면 사디크 교단과도 싸워야 하고, 폭주한 불의 마수와도 싸워야 했다.
그렇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저 둘은 알아서 싸울 것이다.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은 아직 몰랐지만, 저 폭주한 불의 마수는 사디크 교단의 편이 아니었다.
미쳐서 날뛰는 자연재해!
골짜기 안쪽에서 나왔으니 사디크 교단이 먼저 당할 것이다. 굳이 먼저 가서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면 알아서 싸우고 약해지겠지.”
태현은 불의 마수가 강하다는 걸 정확하게 간파했다.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는 끼지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보스 몬스터!
그런 놈한테 가장 먼저 달려가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렇게 기사들에게 설명을 마치는 순간, 대장장이들이 뛰어 들어왔다.
“태산 님! 태산 님! 지금 사디크 교단이 마수를 끌고 나왔답니다!”
“저희도 가죠!”
“……여기 기사들은 강하기나 하지, 너희들은 뭘 믿고 간다는 거야?”
태현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기사들과 대장장이들을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 정도의 수준!
그러나 대장장이들은 당당했다. 김지산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직접 싸우지는 못해도 뒤에서 도와줄 겁니다.”
“오. 나름 기특한 소리를 하는데.”
태현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태현은 능력을 떠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네!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싸우기 전에 버프를 걸어드리는 건 물론이고, 여기 케인 님이 싸울 때 옆에서 직접 같이 싸울 생각입니다!”
“……?”
태현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대장장이들이 직접 싸운다니.
물론 태현은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대장장이로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이 셋은 직접 싸우는 타입이 아니었다. 싸움이 일어나면 뒤에서 숨는 타입이었다.
‘뭐지?’
판타지 온라인 2에서도 전투까지 하는 대장장이들은 숫자는 적지만 분명 있었다.
사실 태현이 판타지 온라인 1에서 전투 대장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따라 하게 된 것이지만, 태현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저 셋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뭐야? 저 인간들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태현은 케인을 툭툭 치며 물었다. 케인은 풀이 죽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내, 내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 같은데? 뭘 잘못 먹었길래 저 겁쟁이들이 나서서 싸운다고 하는 거지? 게다가 너랑 같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케인은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 심심해서 이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그 남들 PK하기 좋아하는 사악한 길드원 놈들을 우연히 만났단 말이야! 내버려 뒀다가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테니 내가 어쩔 수 없이 덤볐는데……
케인이 거기까지 말하자 태현이 끊었다.
“그러니까 복수하겠다고 돌아다녔다 이거지?”
“……응…….”
케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태현한테 이런 거짓말은 통할 리 없었다.
태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케인의 머리를 툭툭 쳤다.
“에라이. 이 인간아. 네가 뭐라고 복수를 하냐?”
“아니! 나도 복수할 수 있지! 나도 사람이라고 사람! 너 같으면 안 열 받냐!?”
“물론 나는 복수를 하겠지만 넌 아니지. 넌 그놈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온갖 짓은 다 한 놈이잖아. 어디서 피해자인 척이야?”
케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싸돌아다니다가 네 얼굴이라도 들키면 참 재밌었겠다. 그렇지? 하도 많이 죽어서 이제 죽는 게 별로 겁도 안 나는 거 같은데. 그냥 이마에 ‘나는 전 레드존 길마인 케인입니다’라고 쓰고 다녀라.”
“투, 투구도 쓰고 내가 누군지는 숨겼으니 아무도 모를 거다.”
“그러기를 비는 게 좋을걸. 다른 놈들이 찾아와서 ‘케인 어딨어!’ 이러면 나는 그냥 널 팔 거니까.”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태현의 말!
케인은 울컥해서 말했다.
“지켜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저 멍청이들이 네가 하는 걸 보고 오해해서 너한테 감동을 받았다?”
“그…… 런 것 같은데.”
“김지산이나 박성찬은 그렇다 쳐도 우정식 저 인간은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왜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냐?”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케인은 태현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퍽!
“내가 말할 때 고개 끄덕이지 마. 기분 나쁘니까.”
“…….”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이놈한테서 꼭 도망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