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8화
‘쯧쯧. 갈 때까지 갔구나.’
태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에는 그 길드원들 데리고 나름 폼 잡고 다니던 놈이 이제는 산맥에서 저러고 있으니 슬슬 짠해졌다.
물론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 걸 알면 케인은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태현은 복면을 벗었다.
‘어차피 판타지 온라인 1에서 김태현이 나라는 건 아무도 모르잖아? 복면은 별 상관이 없지.’
복면을 쓰고 다녔던 건 레드존 길드를 털어먹은 것 때문이었다.
괜히 귀찮게 따라붙을까 봐 복면을 썼던 거였는데, 보아하니 레드존 길드는 쫄딱 망해서 공중분해가 된 상황.
복면을 벗는다고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판타지 온라인 1 때의 김태현이라는 게 알려지는 거지.’
레드존 길드의 원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원한!
스르륵-
“?!”
케인은 불쌍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앞에 있는 사람이 복면을 벗자 경악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너, 너, 너……!”
“갈 때까지 갔구나. 이제는 다 벗고서 강도질이냐? 너무 슬프지 않아? 응?”
“네, 네가 김태산이었냐!”
케인도 카테란드 섬 퀘스트 영상 정도는 봤다.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서 섬을 쓸어버리는 영상을 안 본 사람은 없었다.
저놈이 그 김태산이었다니!
“그래. 세상 참 좁지? 나도 네가 여기서 강도질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시 죽여줄 테니까 다른 곳에 가서 강도질해라. 근데 네 친구들은 어딨냐?”
“……강도질이 아니다!”
“……?”
“진짜로 털렸단 말이다!!”
케인의 외침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 * *
사망 페널티가 끝나고, 다시 접속한 케인과 레드존 길드원들.
케인은 당연히 접속하자마자 외쳤다.
“그놈을 쫓아가자!”
레드존 내에서 ‘그놈’은 딱 하나였다. 바로 태현!
그러나 길드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태현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던 것이다.
게다가 케인도 직접 붙어서 별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 이 상황에서 다시 쫓아가는 건 자살행위 같아 보였다.
-그냥 다른 놈들 털면 안 돼요?
-맞아요. 다른 놈들도 많은데. 그냥 만만한 놈들 털죠?
“이런 멍청한 자식들! 그러다가 또 놓치면 어떡하려고! 닥치고 내 말 들어!”
케인은 벌컥 화를 내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의 마음속은 ‘이러다가 태현을 놓치면 어떡하지’로 가득했다.
물론 길드원들의 불만은 커질 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털어먹으려고 케인을 따라다니는 거지, 복수하려고 케인을 따라다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사건은 터졌다.
-길마님. 길마님. 이번 퀘스트 보셨나요?
“무슨 퀘스트?”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요. 여기 참가하는 사람들 많을 텐데 털어먹기 좋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놈을 찾아야 한다고!”
-…….
털어먹을 놈들이 많은데도 끝까지 태현에게 집착하는 케인을 보고, 길드원들은 결정을 내렸다.
-길마님. 사실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습니다.
“뭐?! 정말로?!”
-네. 친구가 보고 말해줬는데, 주레 산맥으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주레 산맥으로 갔다는 걸 본 친구는 없었다.
길드원들의 함정이었을 뿐!
‘괜히 도시나 도시 근처 필드에서 공격했다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우리가 곤란해진다.’
‘그렇지? 더럽게 끈질긴 인간이니까 우리 쫓아올 게 분명해.’
‘그러면 주레 산맥 어떠냐? 주레 산맥으로 끌고 간 다음 동시에 덮쳐서 죽이고, 우리는 아이템 나눠 가진 다음에 깔끔하게 떠나는 거야. 주레 산맥에서 내려가면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로 갈 수 있으니까 더 털어먹을 수도 있고.’
‘그거 아주 좋아!’
‘주레 산맥이면 길마 놈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겠고!’
길드원들은 어쩌다 보니 그들이 제대로 맞췄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면 주레 산맥으로 가자!”
케인은 길드원들이 꾸민 함정도 모르고 신이 나서 주레 산맥으로 떠났다.
물론 당연히…….
“크아아악?!”
[치명타를 당했습니다!]
[시야가 흐려집니다. 회복하지 않으면 계속 시야가 고정됩니다.]
“뭐하는 짓들이야?!”
케인의 고함에 길드원들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길마.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우리가 당신 복수해 주려고 따라다니는 줄 알아?”
“만만한 놈들 털고 다녀도 모자랄 시간에 복수는 무슨! 그러니까 털리지!”
길드원들의 말에 케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쓰레기는 당신이지!”
“맞아. 누가 누굴 보고 쓰레기래?”
길드원 중 하나가 말함과 동시에 스크롤을 찢었다. 케인은 그걸 보고 깨달았다.
‘이 자식들 아주 작정하고 준비를 했구나!’
-장비 추적의 저주!
저주 전문 마법사가 만든 스크롤. 장비에 저주를 걸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저주였다.
한 마디로 도망쳐도 끝까지 쫓겠다는 의지!
케인은 갑옷, 건틀렛, 벨트 등 장비에 저주가 새겨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이 중에서 가장 싸움 경험이 많은 그였다. 그의 경험이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못 이긴다!’
길드원들은 그를 상대하려고 단단히 준비한 상황. 마법에다가 스킬에다가 스크롤까지.
그에 비해 그는 기습을 당했고, 지형도 좋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대검을 휘두르기도 힘들어!’
이렇게 나무와 바위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면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튀어야 했다.
“어?!”
“저 자식 튄다!”
설마 길드원들도 케인이 이렇게 쿨하게 도망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쫓아!”
“어차피 장비 추적 저주 걸었으니까 멀리 못 도망친다!”
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저주를 풀 방법이 없었다.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은 단 하나.
“으흑흑흑흑!”
장비 파괴!
아끼던 장비들을 전부 자기 손으로 파괴하는 케인의 마음은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그렇다고 버리면 저놈들이 주워갈 게 분명했으니…….
다행히 무기는 장비 추적의 저주가 걸리지 않았다.
케인은 가슴으로 울며 도망쳤다. 그리고 속으로 맹세했다. 저 길드원 놈들을 반드시 쫓아서 죽이겠다고!
* * *
“그런 사연이…….”
“불쌍하기도 해라.”
김지산과 박성찬은 케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으며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태현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유언은 다 했으니까 이제 죽여도 되겠지? 그 길드원 놈들은 산맥에서 나갔겠지만, 나중에 보면 죽여줄 테니까 편하게 가라.”
“잠, 잠, 잠깐만!”
케인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길드원들한테까지 배신을 당하고 나자, 케인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안 그래도 길드가 박살 나고 연속으로 죽은 것 때문에 랭커 경쟁에서 밀려난 케인이었다.
더 이상 죽을 수는 없었다.
“살려줘!”
“내가 왜? 나 싫다고 쫓아오는 놈을 뭐하러?”
“아니야! 이제 다 포기했어!”
케인은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외쳤다.
“네가 포기하고 말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고요. 중요한 건 내가 널 살려둬서 좋을 게 없다는 거지. 언더스탠?”
태현은 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서 보던 대장장이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쪽이 악역 같아!’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내가 널 살려줄 이유를 만들어봐. 없어? 없으면 그냥 죽어라.”
“어, 어, 어…… 충성을 바칠게! 네 밑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할게!”
“흠.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그것만 말고!”
“자식아. 충성이 그렇게 예외를 달고 하면 뭔 충성이야?”
태현의 태도에 케인은 몸이 달아올랐다. 금세라도 태현이 그를 죽일 것 같았다.
“죽, 죽는 것만 빼고…… 나는 이제 어차피 너를 공격하지도 못해! 이 꼴을 보라고!”
케인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기인 대검을 빼고 전부 다 벗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
“예전에도 졌는데 이 꼴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절절한 케인의 외침!
태현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살려달라?”
“그래! 제발 살려만 줘!”
케인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까지 깊숙이 땅에 박았다.
이미 체면 따위는 벗어던진 상황!
그나마 있던 길드원들한테 뒤통수를 맞고 나서 케인은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뭐든지 다 하겠다고?”
“그래!”
“정말로 뭐든지?”
태현이 다시 묻자 케인은 좀 약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정말로 뭐든지는 아니고…… 그래도 좀 상식선에서…….”
* * *
“아오! 잡았어야 했는데.”
“다시 쫓아와서 복수하지는 않겠지?”
“설마. 장비 다 박살 났잖아. 그 사람 이제 쓸만한 장비도 없어. 쫓아와 봤자 우리 상대로는 못 이긴다고. 숫자가 숫자인데 어떻게 이겨?”
케인의 뒤통수를 친 길드원들은 더 이상 쫓는 걸 포기하고 산맥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케인을 확실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이었지만, 케인은 훨씬 더 똑똑했다.
몬스터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고, 심지어 저주가 걸린 장비는 자기 손으로 파괴한 것이다.
자기 장비를 파괴하는 건 방법을 알아도 쉽게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진짜 독종이라니까.”
“됐어. 그 인간은 어차피 끝났으니까 신경 끄자고.”
어차피 케인은 이제 남은 게 별로 없었다.
그나마 들고 있던 장비도 마지막 남은 세트 아이템이었는데 스스로 파괴했다.
다른 길드원들? 그들이 마지막 남은 길드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길드가 붕괴할 때 다 알아서 살길 찾아서 간 것이다.
돈도 장비도 없는 케인이 뭘 하겠는가.
산맥을 내려온 길드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는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
“저기 불 보인다.”
“야. 사람 많은 거 봐라. 저게 다 돈이야!”
“벌써부터 신이 나가지고는. 침착해. 자식들아. 들키면 어쩌려고. 표정 관리해야지!”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이 골짜기로 퀘스트를 하러 온 플레이어들!
물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으니 대놓고 PK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죽을 것이다.
‘흐흐. 다 방법이 있지.’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다른 파티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다른 파티에 끼어들어서 적당히 퀘스트를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는 것!
파티원들의 아이템도 얻고 퀘스트 보상도 얻고 여러모로 좋은 방식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야. 만만한 놈들 골라. 괜히 대형 길드 골랐다가 골치 아파진다.”
“알아. 알아. 걱정하지 마.”
이런 약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목표를 고르는 것.
고렙 플레이어들이나 대형 길드원들을 건드렸다가는 된통 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레드존 길드원들은 두리번거리며 목표를 찾았다.
쿵, 쿵, 쿵, 쿵-
“……?”
그 순간 골짜기에서 들리는 묵직한 소리. 길드원들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야?”
“골짜기에서 나지 않았냐?”
“너도 들었냐?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쾅, 쾅, 쾅, 쾅-
-아우우우우우우우우!
“?!?!”
골짜기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사디크 교단이 이끄는 마수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악!”
“튀어! 튀어!!”
레드존 길드원들은 하필이면 골짜기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은 상황을 깨달았다. 이건 가만히 있으면 무조건 죽는다!
-필멸자들을 쓸어버려라!
-위대한 사디크에게 영혼을 바쳐라!
마수들 뒤에서 나오는 건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들은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과 교단의 허를 찌르는 야습!
설마 이 인원을 상대로 먼저 공격을 해올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퍼퍽! 퍼퍼퍼퍽! 퍼퍼퍽!
“안, 안 돼……!”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레드존 길드원들은 기껏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가장 먼저 죽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