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10화
‘뭔 놈의 교단이 실수 하나 했다고 사람을 죽이냐.’
버포드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숙였다.
사디크 교단에 들어가서 특수 직업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회를 잡다니! 역시 난 운이 좋아!’라면서 신이 났으니까.
그러나 사디크 교단에서 성기사로 퀘스트를 깨면서, 이 교단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른 멀쩡한 교단에서 일하는 성기사들은 퀘스트를 실패하면 기껏해야 질책을 받거나 명성이 조금 깎이는 정도였다.
사디크 교단에서 퀘스트를 실패하면?
-으아아악!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변명도 듣지 않고 그냥 공격!
버포드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은 죽었다.
다 사디크 교단의 사제들이 죽인 것이었다.
당연히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실패한 거야? 실패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이번 습격을 위해 사디크 교단은 엄청나게 오랫동안 준비했다.
왕궁의 지도를 그리고, 성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오늘 싸움을 위해 버프 마법과 물약을 챙기고…….
안토니오는 다미아노 2세의 삼촌답게 다미아노 2세가 어디로 움직일지 꿰고 있었다.
덕분에 버포드도 자신만만하게 여기로 온 것이었는데…….
갑자기 피를 흘리면서 달려오는 안토니오와 후퇴라고 외치는 성기사들을 보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방송 시작했는데.’
성공할 거라고 믿고 첫 생방송을 시작했는데, 끝이 이렇게 되었으니 곤란해졌다.
버포드는 슬쩍 방송의 댓글창을 확인해 보았다.
-뭐야? 국왕 암살 퀘스트 실패한 거야?
-그렇게 폼 잡아놓고?
-야 이 XX야! 나 여기서 일한 음유시인인데 너 때문에 죽었다! 두고 보자!
-어떻게 된 건지 말이나 좀 해봐! 우리 나간다?
뭐라고 말을 안 해주면 사람들이 빠져나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버포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 그러니까 이 퀘스트는…… 선전포고 같은 겁니다. 제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들이 국왕에게 선전포고를 한 거죠.”
-……??
-아까는 국왕 암살하러 왔다며?
“거기서 바로 죽이면 또 재미가 없잖습니까.”
-……?????
-뭔 개소리야?
사람들은 버포드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자 곧바로 반응했다.
아까는 ‘국왕의 목을 따기 위해 왔습니다. 뭔가 화끈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사실 암살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선전포고 하러 온 거였습니다’라니.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실패했다고 해! 그걸 누가 믿어!
-너 방송 처음 하냐? 우리가 만만해 보여?
쏟아지는 격렬한 반응에 버포드는 당황했다.
“그러면 지금 성기사들을 따라가야 하니 일단 댓글은 나중에 보겠습니다!”
일단 불리하면 도망!
버포드는 재빨리 댓글창을 끄고 안 보는 척하며 말을 몰았다.
* * *
혼란했던 왕궁도 다시 원래의 모습을 빠르게 되찾고 있었다.
병사들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엄격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플레이어들도 출입이 가능했다.
<파괴된 왕궁을 복원하라>
아탈리 왕가에 일어난 습격사건으로 인해 왕궁 건물들이 부서지고 더럽혀졌다.
국왕 다미아노 2세는 복수하기에 앞서 먼저 왕궁을 원래대로돌리려고 한다.
부서진 건물들과 예술품들을 대신할 아이템들을 만들어서 가지고 오면 큰 보상이 있으리라.
보상: ?
건축가, 화가, 조각가 같은 직업들에게 단체로 뜬 퀘스트였다.
물론 다들 신이 나서 달려왔다.
전에 참여한 대장장이, 요리사, 음유시인들은 손해만 봤지만 이들에게는 기회!
“이게 말이 되냐! 우리가 얼마나 투자했는데!”
그리고 가장 시끄럽게 외치는 것은 <풍림화산> 길드의 마스터였다.
그들은 이번 퀘스트에서 국왕의 눈에 들려고 길드의 창고를 탈탈 턴 것이다.
그런데 그 반지는 정작 국왕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다른 놈들이 덥석 가져가 버렸다.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상황!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비용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전하를 위해 공을 들인 건 잘하신 일이지만 저희가 그만큼 비용을 들이라고 한 게 아니잖습니까.”
풍림화산 길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종은 냉정했다.
반지를 만드는데 들어간 돈은 한 푼도 갚아줄 수 없다!
“이익……. 두고 보자!”
풍림화산 길드는 욕설과 함께 떠났다.
그걸 보며 김지산과 박성찬은 중얼거렸다.
“와. 세상일은 진짜 모르는 법이라니까. 저게 저렇게 되냐?”
“그러게 말이야. 나도 저 인간들이 우승할 줄 알았는데.”
반쯤 포기하고 있던 두 대장장이들에게는 남의 일!
그 옆에 있던 우정식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라.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냐? 쟤네들 만드는 동안 놀고먹은 게 자랑이야?”
“아저씨도 포기하고 있었으면서…….”
풍림화산 길드가 워낙 포스가 있어서 반쯤 포기한 대장장이가 많았다.
이 셋도 태현한테 붙어보려다가 태현이 매정하게 거절해서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보면 전화위복!
“흠흠. 어쨌든 방송 보니까 사디크 교단이 한 짓이라는데, 앞으로 재밌게 됐어.”
“예? 왜요?”
“아탈리 왕궁을 습격한 것도 습격한 거지만 풍림화산 길드도 만만한 길드가 아니잖아. 저 반지도 거의 길드 창고 털어서 만든 반지일 텐데, 그런 걸 날려버리고 가만히 있겠어? 당연히 움직이겠지.”
“풍림화산 길드는 결국 대장장이들이잖아요. 대장장이가 움직여 봤자 싸우기는 힘들지 않나?”
“이런 멍청한 것들…… 풍림화산 길드가 그냥 길드냐? 다른 길드랑 인맥이 얼마나 두터운데. 지금 벌써 다른 길드 몇 군데에 접촉하고 있다더라.”
“진짜요? 풍림화산 길드가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는 거예요?”
“아마 그것만은 아닐걸?”
우정식은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봐라. 지금 사디크 교단이 원한을 쌓은 곳이 어디냐? 일단 아탈리 왕국하고는 원수지? 방금 국왕을 암살하려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대륙에 다른 교단들하고도 원수잖아. 얘들이 예전에 다른 교단들한테 공격당해서 사라졌을 정도니까.”
“그렇죠.”
“그러면 왕국이나 다른 교단에서 도와줄 거 같으냐, 안 도와줄 거 같으냐?”
“도와주겠네요!”
“그렇지. 이런 상황이면 대형 길드들도 해볼 만하겠다 싶을 거야. 꿩 먹고 알 먹기, 일석이조잖아.”
풍림화산 길드한테 도움도 주고, 겸사겸사 왕국과 교단한테 엄청난 보상도 받고.
해볼 만한 일이었다.
우정식의 추측은 정확했다.
실제로 몇몇 대형 길드는 길드원을 모아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디크 교단은 끝났다고 봐야지. 그러게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해?”
박성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해?”
“사디크 교단도 바보가 아니잖아요. 왕궁 습격해서 국왕을 죽였어도 왕국군이랑 교단은 그대로 있는데. 그걸 알고 습격한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러면 싸움이 일어나도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우정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박성찬의 말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네?”
“그치?”
김지산과 박성찬이 떠드는 걸 보며 우정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짜 그런가?’
대형 길드들이나 왕국군, 다른 교단들이 움직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디크 교단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사디크 교단은 예전에 한 번 망한 적도 있는 교단이었다.
그런 교단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게 아닐까?
* * *
-주인이여. 주인이여.
“왜 그러냐.”
-저 음식들을 먹고 싶다.
“음식을 먹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되나?”
-아주 조금은?
“안 되는 거 아냐?”
태현은 의심스러웠지만 용용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왕궁 요리사들이 요리해서 가져다 준 덕분에 요리는 호화로웠다.
‘맛있네, 이거.’
[화려한 기술로 장식된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요리 스킬이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힘이 15 오릅니다.]
[재료 파악 스킬이 상승합니다.]
[스킬이 부족해 요리법을 알아내는데 실패합니다.]
왕궁은 바빴지만 태현은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국왕의 목숨을 구한 덕분이었다.
물론 오해였지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태현 님. 저 에드안, 그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로 빠져나갈 줄은…….”
“시끄러워. 밖에 들리겠다.”
“흡!”
태현은 케이크를 퍼먹는 용용이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겉모습만 보면 참 귀여웠다.
원래 모습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근데 그 상태로도 싸울 수 있었으면 이제까지 왜 가만히 있었던 거냐?
-주인이여, 힘을 쓸 때마다 회복이 늦어진다. 아까도 봤겠지만 덩치를 크게 하고 마법을 쓸 때마다 내 힘은 빠르게 고갈된단 말이다.
-그러니까…… 빨리 회복하려면 힘을 쓰면 안 된다?
-그렇다, 주인. 우걱우걱.
‘골치가 아파 오는데.’
앞으로 싸울 때 용용이의 힘이 있으면 매우 편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원래 힘을 되찾는 게 느려진다니.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써야 하나?’
“그런데 태현 님. 권능은 익히셨습니까?”
“아직. 신성력이 부족해서.”
신성이 부족해서 못 익히고 있었다.
‘신성을 빠르게 올릴 방법 뭐 없나?’
보통 신성 같은 스탯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단과 관련된 퀘스트를 깨는 일이었다.
교단에 가서 성기사나 사제로 전직해서, 관련된 퀘스트를 깨면 신성이 올랐다.
문제는…….
‘나는 다른 교단에 못 들어가지!’
아키서스의 화신인데 다른 교단에 들어갔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역시 아키서스의 교단과 관련된 퀘스트를 깨야 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
“사디크 교단 성기사들을 처리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신성력은 오를 겁니다.”
“……!”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다.
다른 교단과 싸워서 아키서스 교단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이것도 신성력을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태현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어차피 그놈들은 나랑 원수도 졌고.”
“후후.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에드안은 자랑스러워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잠깐만요. 태현 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가? 사디크 교단하고 내가 원수졌다고?”
“어…… 교단하고 원수를 지셨습니까?”
“그렇다는데. 그놈들 떠날 때 한 소리 못 들었냐?”
스르륵-
에드안은 의자를 뒤로 밀어서 태현과의 거리를 벌렸다.
같이 휘말려서 죽기 싫다는 의지!
“……당장 안 돌아오면 내 손으로 네 목을 쳐주마.”
“후후. 오해십니다, 태현 님.”
에드안은 재빨리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 도망치면 사디크 교단에게는 안 죽을지 몰라도 태현한테는 죽을 게 분명했다.
“어쩌다가 사디크 교단하고 원수를 지신 겁니까?!”
“넌 눈이 없냐? 내가 사디크 교단 성기사하고 맞붙은 거 못 봤어?”
“적당히 하셨어야죠! 적당히! 적당히 막기만 하다가 시간만 끌었으면 근위대원 놈들이 원한을 샀을 거 아닙니까. 왜 먼저 나서서 원한을 사셔 가지고! 아이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 이 자식아.”
힘 조절이고 뭐고 최선을 다해서 적의 숫자를 줄이지 않았으면 태현이 먼저 가버렸을 상황.
“그리고 너 이 자식. 내가 싸우는데 뒤에서 숨어 있던 놈이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 하고는……. 너 사디크 교단하고 싸울 때 정면에 서라.”
“?!”
태현의 말에 에드안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안 됩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싫어. 인마. 생각해 보니 같이 싸웠는데 나만 원수진 것도 좀 억울하군. 원수를 지려면 같이 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