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9화
“크아아악!”
일격에 피가 쭉 깎이자 도적은 비명을 지르며 거리를 벌렸다. 두 번 뒤로 점프하고 공중제비를 한 번 넘고 나서야 도적은 헉헉거리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 자식 뭐야?!”
“쯧쯧. 좀 묵직한 스킬을 썼어야지. 그런 얄팍한 걸 쓰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태현은 손가락을 흔들며 도적을 비웃었다. 그 태도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태현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일반 공격으로 태현의 회피를 뚫고 들어가려면 훨씬 더 많이 때려야 했으니까.
차라리 명중률이 매우 높은 스킬 몇 개로 노리는 게 그나마 나은 방법이었다.
물론 태현이 그런 공격은 절대 맞아줄 리는 없겠지만…….
케인은 태현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물러서라.”
“오, 그쪽이 싸우려고?”
태현은 피식 웃으면서 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태도는 너무 오만해서 자기가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레드존 길드원들의 이마에 굵은 힘줄들이 생겨났다.
태현은 빙글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지? 오그던 요새 주변에 있던 거 아니었나?”
“…….”
길드가 붕괴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 입장에선 저 질문 자체가 짜증 났다.
“아, 길드 망했나?”
“이 XX가 진짜!”
태현의 도발을 참지 못한 길드원 중 한 명이 스킬을 쓰며 달려들었다.
-푸른 칼바람 춤!
그러나 그건 태현의 함정이었다.
-반격의 원!
“크아아악!”
태현 앞에서 한 번 약점을 보이면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태현은 바로 스텝을 밟으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강격!
-연타!
새로 만든 롱소드 <유성>의 스킬. 거기에다가 <행운의 일격> 버프까지 들어가자 흉악한 위력이 나왔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채 1초도 안 되는 사이, 길드원 한 명이 또 죽어서 로그아웃 당해버렸다.
그걸 보자 레드존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아까 죽은 건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원래 근접전에서 약했다. HP도 낮고 기습을 당하면 가장 죽기 쉬운 직업.
그러나 지금 죽은 건 전사 계열의 직업이었다. 레벨도 낮지 않았다. 그런데도 1초도 안 되는 사이 쓰러진 것이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태현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태현은 롱소드를 빙글 돌리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음 상대는 누구일까 찾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순간 시선을 피했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약한 사람만 털고 다닌 레드존 길드원들과 언제나 강한 상대와 싸운 태현은 이제까지 쌓은 경험의 질이 달랐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막은 건 케인의 고함이었다.
“내가 물러서라고 했지!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마라!”
“오, 두 명 죽었는데?”
“이 자식 말은 듣지 마!”
케인은 손을 크게 휘두르며 말했다. 태현의 혓바닥이 그 무엇보다 무섭다는 건 이미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회피율이 높다. 분명 특수한 직업 능력이 분명해.’
판타지 온라인 2에는 온갖 직업이 있었으니 저런 식으로 회피 특화된 직업이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면 먼저 다가갈 필요가 없었다.
“저놈은 이상한 스킬을 쓴다. 어지간한 건 다 회피하겠지.”
“추리력이 좋군. 그렇게 머리가 좋으신 분이 왜 길드는 말아먹었대.”
까드드득!
케인은 분노를 참고 다시 말했다.
“먼저 들어가지 마라. 어차피 놈을 포위하고 있는 건 우리다. 포위한 다음 원거리 공격을 넣으면 언젠가 쓰러지게 되어 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태현은 다시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머릿속에서만 말이야!”
말과 함께 태현은 달려들었다. 케인은 이를 악물고 거리를 벌렸다.
카카칵-
태현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고 반격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드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공격해! 포위를 놓지 마라!”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단검. 태현은 몇 개는 스치듯이 맞아주고 피했다.
그걸 본 케인이 태현을 비웃었다.
“어디 한번 계속 피해봐라!”
직접적으로 태현과 싸우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서 포위 상태에서 태현을 공격한다.
치사하지만 괜찮은 방법이었다. 방어에만 전념하면 태현도 바로 케인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바보냐?”
그냥 케인 말고 다른 놈 하나 골라서 빠르게 죽이고 포위망을 탈출하면 됐다.
케인은 아직도 태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폭딜을 넣어서 한 명을 죽이거나, 아니면 폭탄으로 혼란을 만들거나…….
이런 포위망 하나로 이긴 것처럼 으스대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통 누군가한테 한 번 죽으면 ‘아, 상대도 만만치 않구나’ 하고 깨닫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케인은 좀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상대가 만만치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센 건 아니고, 내가 정신만 차리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 같은 방식으로!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태현이 비웃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케인은 자신만만하게 손짓했다.
“어디 한번 덤벼보라니까! 자! 와봐!”
“그럴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태현은 들고 있던 롱소드를 집어넣었다. 그걸 본 케인이 박장대소했다.
“크하하! 포위를 못 뚫어서 항복하는 거냐? 이미 늦었어! 절대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네가 부활하는 곳을 찾아서 또 죽여주마!”
“포위?”
“그래! 이 포위!”
케인은 길드원들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길드원들의 표정이…… 다들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아까와 비슷한 상황. 케인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엄격한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
“포위가 뭐 어떻다고?”
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야, 이렇게 금방 와주다니.”
“너, 너, 이 자식 진짜…….”
“그러면 난 간다.”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포위망을 뚫으려고 시도했다. 길드원 중 한 명이 태현을 막기 위해 방패를 땅에 박고 길을 막아섰다.
어디 한번 뚫고 가 봐라!
여기서 잠깐이라도 막히면 다른 길드원들이 바로 달려들어서 태현의 발을 묶어줄 것이다.
저 병사들이 어떤 병사들인지는 몰랐지만, 태현의 편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태현을 어떻게든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막아! 못 빠져나가게!”
케인의 고함을 들으며 땅에 방패를 박은 길드원을 보고 태현이 씩 웃었다.
길드원은 그 미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치이익-
태현의 손에 들린 건 폭탄이었다.
“기계공학 스킬 찍은 놈 상대할 때는 좀 더 신경을 썼어야지?”
콰콰콰콰쾅!
[‘스턴’ 상태에 빠졌습니다. 상태가 회복되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폭발에 휩쓸린 길드원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대미지도 대미지였지만 스턴 효과가 매우 치명적이었다.
‘이래서 기계공학 스킬이 좋다니까.’
언제든지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스킬.
그게 바로 기계공학 스킬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바로 디버프를 거는 게 가능했다.
미리 준비를 해야 하고 필요한 재료가 있다는 게 성가셨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범위였다.
길드원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었지만, 태현은 가볍게 길드원을 걷어차고 뛰어서 빠져나왔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자 길드원들은 태현을 놓쳐 버렸다.
착착착-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오는 병사들!
태현이 빠져나오자 더 이상 봐줄 게 없다는 태도였다.
“이, 이런 빌어먹을……!”
케인은 몰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상황이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딱 봐도 싸워서 이길 상황이 아니었다.
카카캉, 카캉-
“이, 이놈들 너무 센데?!”
“케인! 어떻게 하지?!”
병사들은 묻지도 않고 덤벼들었다. 길드원들은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숫자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났다. 길드원 한 명이 병사 넷에서 다섯은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여기 있는 병사들은 브랑송이 데리고 온 최정예 병사들!
일대일로도 벅찬 상대가 우르르 몰려오니 순식간에 다들 회색으로 변해서 쓰러졌다.
그리고 태현은 뒤에서 얄밉게 지시했다.
“저 못생긴 놈이 우두머리다!”
“……!”
병사들은 태현의 말을 듣자 창을 들고 케인에게 덤벼들었다.
[HP가 절반 이하로 내려갑니다. 회복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충격에 저항합니다. 마비 상태에서 빠져나옵니다.]
[HP가 낮아졌습니다. ‘붉은 피의 전사’의 직업 능력이 발동됩니다.]
어지럽게 뜨는 메시지창.
케인은 그것들을 볼 시간도 없었다. 병사들의 창을 베어내고 갑옷을 후려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했다.
“너 이 자시이이이이이익!”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저항도 헛일이 되었다.
케인이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병사들은 길드원들이 다 쓰러진 걸 보고 질서정연하게 다시 움직였다.
태현은 그걸 보고 박수를 쳤다.
“이야, 대단해. 정말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태현 님!”
“더 일찍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강하면서도 충성스러운, 그야말로 프로 병사!
‘지금만 부릴 수 있다는 게 아쉬워지네.’
브랑송은 이렇게 강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을 부리는데, 태현은…….
태현은 루포와 펠마스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멀뚱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왜 저를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 자식들아.”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길드원들이 쓰러진 곳을 둘러보았다.
PK의 가장 큰 즐거움은 싸움이 끝나고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들!
레드존 길드원들은 보나 마나 PK를 많이 하고 다녔을 테니 아이템도 좋은 걸 흘렸을 것이다.
태현은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템을 확인했다.
[녹이 슨 강철 중갑옷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일반 강철 대검을 획득했습니다.]
‘응?’
태현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레드존 길드원들이 갖고 다닐 만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기껏 나온 건 골드가 좀 들어 있는 주머니가 전부.
이것도 보아하니 아까 레드존 길드가 다른 파티를 털어서 나온 물건 같았다.
‘아이템들이 왜 다 이래? 아. 이 자식들 설마…….’
태현은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PK를 즐겨 하는 플레이어도 언제나 PK를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덤비면 죽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의 페널티는 일반 플레이어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 PK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일부러 허접한 일반 아이템만 들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상대를 고를 때 자기보다 많이 약한 상대를 고르면, 아이템이 좋지 않아도 이길 수 있었으니까.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이템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태현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머리를 썼군. 그래. PK는 이런 식으로 해야지.’
태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레드존 길드원들이 태현이 생각한 저런 수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저 아이템들은 그냥…….
그들의 아이템이었다.
길드가 망하는 과정에서 길드원들은 길드를 수습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당연히 돈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끼고 있던 아이템도 팔아야 했다.
일단 급하니 임시로 저런 아이템이라도 쓰는 것!
태현은 그가 레드존 길드의 남은 쪽박마저 깨버렸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쉽네. 다음에 만나면 꼭 죽이고 아이템을 뺏어야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이었다. 태현의 눈에 레드존 길드원들은 그저 질 좋은 아이템들을 뿌리는 몬스터로 보였다.
먼저 PK를 하고 다니니 죽여도 문제가 안 생기는, 아주 완벽한 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