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7화
-크흠. 애들아. 우리도 이제 나이가 나인데, 예전처럼 그런 짓은…….
-……?
-……?
모인 길드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태산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저런 짓을 할 때 가장 잘, 가장 열심히,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게 바로 김태산이었다.
도망치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고, 반항하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계속, 계속 공격해서 접게 만들고, 공성전으로 덤비는 길드가 있다면 아예 뿌리째 갈아버리는 악랄한 작전을 썼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김태산의 길드가 계속 독주하자, 반대하는 길드들이 연합해서 김태산의 길드를 공격하자고 작전을 짠 것이다.
너무 규모가 커서 길드원들도 ‘이번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태산은 냉정하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길드원들은 당황했지만, 김태산은 공성전 당일까지 태연하게 지냈다.
그리고 공성전 당일?
적 길드들은 아무도 접속하지 않았다. 김태산의 길드는 자연스럽게 승리를 거뒀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비밀이다.
김태산은 방법을 말하지 않았지만, 길드원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게시판에 글이 올라온 것이다.
제목: 이게 말이나 됩니까? 최강지존무쌍 길드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내용: 최강지존무쌍 길드에 대해서 모두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에발렌딘 성과 그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아주 못된 길드죠.
이번에 저와 제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해서 최강지존무쌍 길드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최강지존무쌍 길드를 상대하는 일이니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했었죠.
여러 길드와 같이 힘을 모으고, PC방에서 모여 공성전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공성전 당일,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아십니까?
어떤 놈이 PC방 랜선을 자르고 튀어버린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니죠!
구구절절이 서러움이 묻어나오는 글이었다. 길드원들은 모두 입을 떡 벌렸다. 상대 길드원을 매수해서 랜선을 자르게 하다니.
이 무슨 사악함!
그런데 그런 짓을 했던 김태산이 이제 와서 ‘우리도 이제 나이가 나인데, 예전처럼 그런 짓은’이라고 말하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그런 짓은? 그게 무슨 뜻이지?
-예전처럼 어설프게 하지 말고 제대로 하자는 뜻 아닐까?
-보이는 놈한테 세금을 뜯는 게 아니라 죽이고 아이템 전부를 뜯으라는 건가?
-아니야, 이것들아!
* * *
왕년의 길드원들을 설득해서 어떻게든 정상적인 길드로 만들 수는 있었다.
물론 길드명은 평범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최강지존무쌍 길드 가죠?
-잠깐, 잠깐. 최강지존무쌍김태산 길드 어때?
-아니. 형님 이름 붙일 거면 최강지존무쌍킹갓엠퍼러로 하자고. 어때?
-그만해, 미친놈들아!
김태산은 울컥해서 외쳤다. 이것들이 누구를 부끄러워서 죽게 만들려고.
그는 근엄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길드 이름은 간단하게 최강지존무쌍 길드로 간다.
물론 김태산이라고 작명 센스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길드원들은 모두 감탄!
-정말 좋습니다!
-예전 추억을 그대로 살리자는 뜻이군요!
-……그건 좀 잊어라.
* * *
김태산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걸 보고 양성규가 물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그 형님은 빼고 부르면 안 되겠냐?”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아. 성주님이라고 부를까요?”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김태산은 한숨을 쉬었다.
양성규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형, 동생하면서 말이다.
양성규는 선수 출신의 체육관 관장이었고, 김태산도 그의 체육관에서 운동을 배웠다. 그 인연으로 친해진 것이다.
거기 체육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다 양성규가 아는 동생이었고, 다 덩치가 컸다.
그들이 같이 몰려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어머, 조폭인가 봐…….
-쉿! 조용히 해요! 저 사람들 쳐다보면 안 돼요!
-애들아. 아빠가 일찍 죽는 건 싫지? 저 사람들 쳐다보지 마렴!
타고난 비주얼에서 풍겨지는 압도적인 포스!
김태산으로서는 눈물만 났다.
그래도 그가 나름 지역 유지인데…….
김태산과 양성규, 그리고 다른 길드원들이 한때 신나게 했던 게임이 바로 리X지였다.
김태산이 거기에서 길마, 성주로 불린 이유는 간단했다.
김태산이 거기에서 나이도 가장 많고, 힘도 가장 세고, 돈도 가장 많으니 당연한 위치!
태현은 아직도 그걸 갖고 김태산을 놀렸다.
-아버지. 아직도 성주님이라고 불리고 다닙니까? 저한테는 게임하지 말라고 하셔 놓고!
‘크으윽!’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차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
“네. 형님.”
“좀 작은 목소리로 말해. 다들 쳐다보잖아.”
양성규도 오크로 플레이하고 있었다. 김태산보다는 덜했지만 온갖 번쩍거리는 아이템으로 치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김태산이나 양성규나, 다른 길드원들과의 공통점이 있었다.
다 나이가 40을 넘었고, 다들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어엿한 위치라는 점이었다.
김태산처럼 압도적인 건물주는 아니더라도 중소기업을 하나 굴리고 있거나, 사장님 직함 하나쯤은 달고 있는 아저씨들의 모임!
게임을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구르고 하지 않았다.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바로 현질을 했다.
-초반부터 현질을 하면 레벨 업을 했을 때 아이템을 바꿔야 한다고? 그러면 또 바꾸면 되지.
-레벨 제한 없는 것부터 사자고. 물약? 물약 비싸니까 붕대 감기나 사제를 활용하라고? 뭐하러 그래? 물약도 사!
-퀘스트? 퀘스트 템 모으려면 이 왕국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고? 그냥 경매로 사!
이것이 바로 현질의 힘!
길드원들의 숫자는 한 열 명 안팎이었지만 그들이 쓴 돈은 벌써 수억을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들었어? 형님이래!”
“조폭인가 봐!”
“조폭도 이 게임을 하다니!”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리는 걸 듣자 김태산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차라리 길마라고 해라!”
“네. 형님.”
“이 자식아!”
“네. 길마님!”
‘이 자식 나 놀리는 거 아냐?’
* * *
지금 김태산과 길드원들이 있는 곳은 에스파 왕국이었다.
에스파 왕국은 에랑스 왕국 서쪽에 있는 왕국으로, 잘츠 왕국과는 아예 떨어져 있는 왕국이었다.
사이에 에랑스 왕국을 끼고 있으니 한동안 태현과 만날 일은 없었다.
에스파 왕국을 고를 수 있었던 건 최상윤 덕분이었다.
-상윤아. 오랜만이다.
-예. 아저씨.
-아저씨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태현이가 판타지 온라인 2 어디서 시작했냐?
-네?
최상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걸 나한테 묻지?’
-태현이랑 또 싸웠어요?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아저씨…… 다 티 나거든요. 태현이 잘츠 왕국에서 시작했어요. 아저씨도 판타지 온라인 2 하시게요?
-그래. 크흠. 고맙다!
둘의 사이를 잘 아는 최상윤이었기에 쉽게 말해줬다.
어차피 저래도 태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잘츠 왕국, 잘츠 왕국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냐…… 에스파 왕국이군.
태현을 피하기 위해서 결정된 시작 위치였다. 길드원들이 알면 쪽팔릴 게 분명하기에 김태산은 이유를 숨겼다.
-왜 에스파 왕국이냐고? 오크들 키우기 좋잖아!
-그렇군요! 과연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길드원들은 김태산이 말하면 다들 좋다고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 * *
지금 김태산의 길드원들은 각자 흩어져서 자신의 퀘스트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좀 있지만 막강한 자금력과 왕년에 했던 게임 경험을 살려 빠르게 성장해 가고 있는 그들이었다.
김태산과 같이 있는 건 양성규와, 양성규가 데리고 온 젊은 친구였다.
물론 종족은 셋 다 오크!
김태산은 오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지?”
“김상철이라고, 우리 체육관 신입입니다. 꽤 재능 있는 놈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상철입니다.”
“그래. 상철이. 뭐 궁금한 거라도 있냐?”
김태산의 질문에 김상철은 잠시 머뭇거렸다.
김상철은 원래 김태산이나 양성규하고 같이 게임을 하던 길드원이 아니었다.
양성규의 체육관에 등록해서 배우고 있는, 젊은 복싱 선수였다.
관장인 양성규가 꼬셔서 같이 게임을 시작했지만, 왜 길드원들이 저렇게 김태산에게 다들 굽실대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다들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이 길드의 길드원들은 가끔 현실에서 체육관에 놀러오는 아저씨들이었다.
올 때마다 용돈을 두둑하게 주거나 먹을 걸 사주는, 돈 많은 사장님들!
그런데 그 사장님들이 김태산한테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상철은 김태산의 장비를 쳐다보았다. 분명 비싼 아이템 같긴 한데 너무 센스가 괴악했다.
“이거…… 현질을 얼마나 하신 겁니까?”
“이 장비? 얼마 안 했다.”
가볍게 말하는 김태산. 정말 가벼운 태도여서, 김상철도 ‘아 정말 얼마 안 했나 보구나’ 생각이 들었다.
“시작이니까 가볍게 1억 정도만 했지.”
“……!”
“상철이 너도 돈 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넉넉히 사 입어라.”
양성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김상철을 쳐다보았다. 김상철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김태산이 대장인지를!
“형님!”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이 자식들아!”
* * *
양성규와 김상철과 같이 움직이면서, 김태산은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요놈. 어디 한 번 덤벼봐라! 내가 너보다 게임 2배는 더 했다!’
왕년의 게임 폐인으로서의 의지가 타올랐다.
태현이 게임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태현은 한참 젊은 나이. 말하자면 싱싱한 전성기였다.
그에 비해 김태산은 중년의 나이. 센스나 체력에서는 태현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태산은 그 차이를 메꿀 자신이 있었다.
바로 길드원 숫자와…….
현질이었다.
김태산은 태현을 잘 알았다. 물론 게임 스타일도 잘 알았다.
‘분명 폼 잡으면서 혼자 플레이하고 있겠지?’
아무리 장사라도 한 명이서 열 명을 당하기는 힘든 법!
길드를 만들어서 숫자를 불려놓으면 태현이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현질도 안 하겠지!’
태현 특유의 철학.
게임에는 돈 쓰는 거 아니다!
돈 써서 게임 이기면 뭔 재미냐!
하지만 김태산은 아니었다.
넉넉한 지갑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아저씨!
게임에서 태현을 다시 만나게 되면, 태현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아버지의 위대함에!
“크핫핫핫핫핫핫핫!”
“길마님. 부끄러우니까 좀…….”
“아. 미안.”
김태산은 바로 웃음을 멈췄다. 주변 플레이어들이 이상한 사람들을 보는 눈빛으로 그들 셋을 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오크들이다!’
뭔가 크고 반짝이고 색이 강렬한 장비는 대충 다 껴입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태산은 당당했다.
“가자. 퀘스트 깨러.”
손에 들린 것은 4200만 원짜리 ‘어린 정령의 망치’. 초보자도 쓸 수 있는 아이템이었지만 그 뛰어난 성능 때문에 가격이 매우 높았다.
-형님.
-형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네. 길마님. 지금 말하신 주술사 퀘스트 깼습니다. 앞으로 몇 단계만 더 하면 전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그대로 진행해라.
길드 채팅으로 들어오는 보고. 김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은 전원 오크지만, 김태산은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함이 밸런스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밸런스가 맞아야 태현이 그놈을 아주 잘 요리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