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8화
브랑송의 제안은 태현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온갖 제안을 다 거절해왔는데 이제 와서 왕국 해군 자리를 준다고 해서 솔깃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게 뭐지?”
그러는 사이 브랑송은 섬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원래 있어야 할 요새나 시설은 다 박살이 나서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 있어야 할 해적들 대신 언데드들이 우글거렸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입니다…….”
루포가 나서서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현이 말렸다. 루포가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런 건 그가 해야 했다.
-우리는 아탈리 왕국을 위해 카테란드 해적단에 잠입해서, 해적들을 쓰러뜨리고 데넬손까지 처치했는데, 아니 알고 보니 이 데넬손이라는 놈이 아주 사악한 놈이지 뭡니까. 섬 지하에 이상한 괴물을 부리고 있었어요! 그놈이 죽기 전에 저 괴물을 꺼내서 섬에 풀어놓았습니다. 덕분에 저 섬은 완전히 저주를 받았고 해적들은 언데드가 되어버린 데다가 배도 못 빠져나가게 되어버렸습니다.
나쁜 건 모두 데넬손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악마의 혓바닥!
“음? 잠깐, 배가 못 빠져나간다고?”
브랑송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태현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말 안 했습니까? 말한 줄 알았는데. 루포, 말 안 했나?”
“저는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도중에 빠졌나 봅니다.”
서로 사이좋게 책임을 미루는 두 명! 브랑송은 이런 상황은 상상치도 못했기에 살짝 당황했다가, 다시 부하들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배가 못 빠져나가나? 확인해 보도록.”
“예. 제독님. 바람과 해류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브랑송이 침통한 표정을 짓자 태현이 옆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어떻습니까. 쓰러뜨리면 되지 않습니까?”
“…….”
* * *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브랑송은 함대에 명령을 내려 섬에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포격 준비! 섬 위의 망령 놈들을 쓸어버려라!”
멋들어진 왕국 제복을 입은 해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법탄을 마법 대포 안에 넣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이 비싸기에 플레이어들은 쉽게 쓰지 못하는 마법 대포를 왕국 해군은 물 쓰듯이 사용했다.
“발사!”
콰콰콰쾅!
섬 위로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 마법이 작렬하며 어슬렁거리던 망령 전사들을 쓸어버렸다.
“준비되는 대로 계속 발사해라!”
쾅! 콰쾅! 콰콰쾅!
“사제들은 병사들에게 주문을 걸어라. 곧 올라간다!”
섬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많이 망령 전사들을 없애는 것.
그게 브랑송이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비싼 마법 포탄을 펑펑 쓰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쉽지 않았다.
실제로 해안가 주변에 있던 망령 전사들은 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전멸해가고 있었다.
“이야. 역시 왕국 해군이네. 끌어들이길 잘했지?”
“쉿쉿. 목소리 줄이십시오. 태현 님.”
태현과 루포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작게 대화를 나눴다.
“걱정 마. 안 들려. 그나저나 이렇게 잘 싸우는 놈들이 왜 이제까지 해적들은 못 해치웠대?”
“그야 해적들이 원래 있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공격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해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반격을 해올 거 아닙니까?”
망령 전사로 되살아난 건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뚜렷했다.
무엇보다 큰 단점은, 살아 있을 때처럼 제대로 전술적인 방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섬의 요새 시설이 전부 박살 나버리긴 했지만…….
“대충 정리된 것 같군. 상륙 명령을 내려라!”
브랑송이 신호하자 왕국 해군들은 보트를 내리고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가자. 도와줘야지.”
“예? 무슨 빚 진 거라도 있습니까?”
태현이 도와준다고 말하자 루포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왕국 해군들 싸우는데 같이 숟가락 얹으면 이득이잖아.”
“……그렇긴 하죠. 알겠습니다.”
플레이어들에게도 각자 메시지가 떴다.
<돌발 퀘스트–카테란드 섬 정화 작전>
아탈리 왕국 해군은 카테란드 섬으로 들어가 섬을 정화시키고 점령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한 것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을 했지만, 병사들이 언데드들과 싸우는 걸 돕는다면 왕국은 더더욱 고마워할 것이다.
보상: ? ?????
선택하는 퀘스트였다. 그냥 배 위에서 기다려도 됐고, 왕국 해군들과 함께 내려서 같이 싸워도 됐다.
배 위에서 기다리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지만, 왕국 해군들과 같이 싸운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왕국 해군들이 있어도 섬에 있는 망령 전사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
대신 추가로 보상이 있을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할 거냐니, 간신히 나왔는데 저기로 다시 들어가라니…… 나는 싫어. 죽으면 손해잖아.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그렇지? 나도 좀 그렇다. 그냥 배 위에 있어야지.”
대체로 배 위에 남아 있자는 걸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까야 태현이 목숨을 걸고 앞에서 길을 뚫었지만, 지금 내리면 왕국 해군들과 같이 어깨를 붙이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제작 직업이나 예술 직업 플레이어들한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브랑송이 태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네.”
“감사합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의견이 있나?”
[브랑송이 당신의 의견을 묻습니다.]
[나오는 결과에 따라 브랑송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전술 스킬이 상승합니다.]
“아마 고대 신의 망령은 다시 지하로 내려갔을 겁니다. 이 섬 전체에 저주를 거는 것도 그렇고, 힘을 많이 썼을 테니까 회복이 필요하겠죠. 공격하실 거라면 시간을 끌지 말고 바로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바로 들어간다?”
“예. 소수 정예로 토벌대를 추려서 바로 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내려서 천천히 점령해 봤자 시간만 많이 소모될 겁니다.”
“흐음.”
브랑송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태현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말 그의 말을 들을까?
왕국 3함대 제독 정도면 콧대가 아주 높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태현이 이 섬을 쓸어버리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말을 듣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자네의 말을 믿겠네. 먼저 이 섬에 와서 그렇게 일을 했으니 믿을만하겠지.”
“……!”
“좋아. 아스탈! 마법사들과 사제들을 불러라. 섬 지하로 내려갈 토벌대를 만든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마르셀 백작이었다. 마르셀 백작의 얼굴을 알아본 브랑송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백작님! 해적들 사이에 갇혀 있다고 들었었는데.”
“크흠. 크흠. 그랬었지. 진작에 좀 구해주지 그랬나?”
“죄송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하게 나오시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그랬지…….”
마르셀 백작은 태현을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나오기 위해서 태현에게 받은 구박을 생각하니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놈을 확 고발해 버려?’
마르셀 백작이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브랑송은 태현을 보며 말했다.
“마르셀 백작님도 구출하다니. 정말 큰 공을 세웠군. 다시 한번 감사하네. 저런 상황에서 백작님을 구출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하하.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위험했지만 저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화술 스킬이 증가합니다.]
“…….”
태현을 보던 마르셀 백작은 말하는 걸 포기했다. 괜히 말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분위기!
“제독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섬에 들어간다!”
* * *
마법사, 사제, 궁수 등.
균형 잡힌 파티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직업들이었다.
마법사가 뒤에 있으면 앞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든든했다. 언제나 강력한 한 방이 있으니까.
사제가 가운데에 있으면 모두가 믿을 수 있었다. 다쳐도 바로 회복이 되었으니까.
사실, 태현처럼 단둘이 던전을 돌파하는 게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인원을 꾸려서 들어오는 게 정상이었다. 앞에서 싸울 탱커, 그 뒤에서 딜을 넣을 딜러, 또 뒤에서 힐을 넣을 힐러…….
이런 식으로 각자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는 게 좋은 파티였다.
던전이 크고 강력하면 또 그 파티의 구성이 늘어나거나, 몇 개 파티가 동시에 들어가거나 했다.
‘그래. 이렇게 하면 얼마나 편해.’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왕국 해군들과 같이 걸어갔다. 옆에 있는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정말 든든해 보였다.
딱 봐도 레벨이 세 자릿수는 넘어가는 NPC들!
“그런데 너희들은 왜 따라왔냐?”
“헤헤…….”
섬에 같이 들어가기로 결정한 건 태현뿐만이 아니었다.
김지산과 박성찬도 자원한 것이다.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배 위에 남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레벨은 낮지만 최선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레벨이 낮다라.”
태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봐도 김지산과 박성찬이 태현보다 레벨이 높았다.
그러나 김지산과 박성찬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차피 왕국 해군들이 알아서 싸울 테니 뒤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되겠네. 무기들 손봐주고.”
“예?”
태현은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왕국 해군 병사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걸 본 김지산과 박성찬은 깜짝 놀랐다.
섬에 내린 토벌대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표정은 엄격, 진지, 근엄을 전부 합쳐놓은 것 같은 딱딱함이 느껴졌다.
그런 병사들에게는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태현은 다짜고짜 말을 걸더니…….
“무기 좀 만져줄까?”
……영업을 시도했다.
“태, 태산 님. 그래도 그건 좀…….”
“왜?”
“화를 낼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병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태현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말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랑송이 태현에게 친절하게 대하는데 병사들이 감히 화를 낼 리는 없었다.
이것이 인맥!
“장비 좀 만지면서 들어가자.”
“잠, 잠깐만요. 시간 좀 걸리는데…….”
“그렇게 느려서야 어디 써먹겠어? 빨리하라고. 빨리해! 더 빨리! 더, 더, 더, 더!”
[<가혹한 채찍질> 스킬을 사용합니다.]
태현은 망설이지 않고 두 대장장이들을 갈궜다. 빨리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시간에 맞춰서 해내는 게 진정한 대장장이!
“저, 저기…….”
“어?”
태현은 플레이어가 두 명 더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김지산과 박성찬이야 그렇다 쳐도 더 내릴 사람이 있었다니.
우정식과 주현영이었다.
“아니, 그쪽은 왜 따라와요?!”
김지산은 우정식에게 다가가 따졌다. 원래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정식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뻔뻔하게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진짜 이러깁니까?”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우정식은 뻔뻔하게 우겼다. 그는 이미 김지산과 박성찬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 자식들. 자기들끼리만 덕을 보려고 말이야.’
준비하면서 태현이 보여준 모습은 아주 강렬했다. 대장장이 스킬을 저 정도로 쓰고, 저 정도로 강하다는 건 대장장이 플레이어 중에서도 랭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방송하는 랭커들 중에서 저런 사람이 있었나? 뭐, 방송 안 하는 랭커들도 많으니까…….’
랭커들이 모두 방송을 하는 건 아니었다. 견제를 받지 않기 위해 조용히 혼자 키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정식은 태현이 그런 종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같이 다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