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2화
“근데 다른 하나는 뭡니까?”
루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계획이 있나?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밑을 돌아다니는 동안 들키지 않게 가려줄 만한 계획이지.”
“아! 당연히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하죠?”
“그건 네가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
“농담이야. 네가 뭐라고 그런 걸 떠올릴 수 있겠냐. 내가 그런 것까지 바랄 사람으로 보여?”
루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안 시키니까 좋긴 한데,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일단 통행 허락을 받았잖아? 그걸 핑계로 배에 타고 돌아가는 거야.”
“예? 돌아간다고요?”
“진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돌아간다고 말만 하는 거지. 일단 배에 타고서 돌아간다고 하면 해적들이 안 찾을 거 아니냐.”
“그런데 의심 많은 해적들이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통행을 허락했지만 해적은 해적이었다. 그들의 의심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태현과 루포가 한 번에 배에 타고 나가려고 한다면 의심부터 하고 볼 것이다.
-저놈들 혹시 우리 뒤통수치려는 거 아니야?
“그렇겠지. 둘 중 하나는 남으라고 하던가 하겠지.”
“그러면 안 되잖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하라고 하지 뭐.”
“……!”
실로 악마 같은 발상!
밖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졸지에 인질 역할까지 하게 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현이 그들을 인질로 걸고 있다고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인데, 해적들도 그 정도면 믿을 거다.”
속아서 몰려오기는 했지만 여기 온 인재들만 해도 꽤 되는 수준이었다.
이들을 인질로 남겨둔다면 해적들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버릴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태현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뭐든 버릴 수 있는 게 태현이었다. 욕심 때문에 일을 망치는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집념!
“그, 그런…… 사람들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몰래 하면 되지 뭐.”
“…….”
루포는 슬슬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 인간이 과연 신의 화신일까?
‘악마의 화신 아냐? 전승이 잘못 알려졌다거나…….’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잘 해결하면 되잖아? 잘 해결하면 문제없어.”
“그렇긴 하죠…….”
언제나 잘 해결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잘 해결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거였지.
“어쨌든 그렇게 하면 우리 둘이 빠져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아, 그리고 배 보낼 때 몰래 연락 좀 해 놔라.”
“무슨 연락을 말하시는 겁니까?”
“왕국군한테 연락하라고. 해적 토벌 관련으로 도와주겠다고.”
“?!”
루포는 경악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왜 그래?”
“왕, 왕국군을 부르시다니. 해적들과 싸울 생각이었습니까?”
“싸울 생각은 없는데, 문제가 되면 싸워야겠지?”
태현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사람이었다.
요새의 지하로 들어가서 권능을 얻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해적들과 문제가 생기는 것도 염두에 둬야 했다.
해적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해적들이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다른 적을 던져두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강하고 위험한 적으로.
“왕국군한테 물어봐. 해적들을 토벌할 계획이 있냐고. 많이 당했으니 잘하면 부를 수 있겠지. 못 부르면 어쩔 수 없지만, 부를 수 있다면 여러모로 편할 거야.”
왕국군을 부르면 몇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왕국군을 소환해 탈출할 방법을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덮을 수 있었다.
사실밖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해적단 요새에 들어가서 보수와 수리를 하고 물건을 받아오는 건 원래 욕을 많이 먹을 짓이었다.
밖에 알려지는 순간 악명은 폭발!
그러나 알려지기 전에 왕국군에게 가서 ‘사실 저희가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놈들을 속였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해적을 속이기 위한 짓이 됐다.
“……!”
루포는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태현은 루포가 눈빛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자 부담스럽다는 듯이 물러섰다.
‘얘 왜 이래?’
[루포가 당신의 계획에 감탄합니다!]
[스킬, ‘전술’을 얻었습니다. 병력을 지휘할 때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명성과 악명 모두 전술 스킬에 영향을 줍니다.]
<카테란드 해적단 토벌>
카테란드 섬을 요새로 삼아 오랫동안 주변 바다를 지배해 온 카테란드 해적단은 아탈리 왕국의 골칫덩이였다.
현재 해적단 선장 데넬손이 오르고 나서는 아탈리 왕국 해군까지 공격하고 있는 상황.
만약 해적단 토벌에 큰 공을 세운다면 왕국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보상: 칭호 ‘해적의 토벌자’, 아탈리 왕국 해군 함선 지휘관, 아탈리 국왕 알현 기회, ?, ??, ???
그리고 동시에 뜨는 퀘스트창!
그러나 태현은 매몰차게 퀘스트를 무시했다.
‘미쳤냐?’
왕국군을 부르는 건 어디까지나 비상 계획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조용히 들어가서 조용히 권능을 찾은 다음 조용히 배우고 나오는 것!
왕국군을 부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하는 것이었다.
부르는 순간 일단 섬 안에서는 난장판이 벌어질 것이고, 그러면 태현도 위험했다.
국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나 함선 지휘관 같은 엄청난 보상도 태현의 눈에는 함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국왕 알현은 무슨…….’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국왕 알현!
현재 성 하나 얻으려고 난리 치는 랭커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국왕을 직접 만날 기회라니.
“루포. 내 말 이해했지?”
“물론입니다! 태현 님. 이제까지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악마의 화…… 아니, 아키서스의 화신도 분명히 증명해 주시겠죠!”
“너 방금 악마의 화신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러면 움직입시다!”
루포는 잽싸게 몸을 돌려 일어섰다.
* * *
“너희 둘이 다?”
“예. 대신 믿음의 증거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남겨놓겠습니다.”
“크흠. 우리가 너희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뭐 그 정도면 되겠지.”
예상대로 해적들은 둘 다 배에 탄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우글거리는 플레이어들을 다 남겨놓겠다고 하니 결국 수긍했다.
해적들도 설마 저 인원을 다 버릴 수 있는 사악한 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상황!
“물건 확인했고…… 좋아. 별거 없으니 가도 좋다고. 대신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있는 놈들은 자네가 없으니 게으름을 부리는군.”
“후후. 제가 없는 동안 따끔하게 부려먹어 주시죠.”
마치 악덕 노예주와 노예상인의 대화 같은 모습이었다. 루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뿌우우우-
나팔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작은 배 하나가 출발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은 그들에게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도시에서 지낼 때, 그들도 나름 열심히 했었다. NPC들이 주는 퀘스트를 받고, 열심히 해내고…….
그러나 여기에서 한 일에 비하면 그건 어린애 장난 수준!
해적들은 정말 쉴 새 없이 일을 몰아줬다. 어떻게 저렇게 각 직업마다 필요한 일들을 갖고 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내가 직업 퀘스트 하면서 노가다를 얼마나 한 줄 알아? 나 정도 하는 사람 없다!’라고 하던 플레이어도 조금 하더니 뻗어버렸다.
처음에는 태현을 욕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기운도 없었다.
보이는 건 해적들이 주는 퀘스트 완성창과 스킬, 경험치 창뿐!
“히, 히히…….”
“나…… 일한다…… 스킬…… 경험치…… 오른다…….”
사람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 * *
“갔냐?”
“갔네요.”
“그럼 우리도 가자. 아. 그전에.”
“……?”
“검술 스킬 내놔. 검법 가르쳐준다고 했잖아.”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루포는 투덜거리면서도 자세를 잡았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니까.
“제가 배운 검법은 가타콰 검법입니다.”
“가타…… 뭐? 아니,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 어쨌든 너 정도 되는 실력자가 알고 있는 검법이니 좋은 거겠지?”
“예.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검법은 아니죠.”
루포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내가 협박했다고 가르쳐줘도 되나?’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쉬운 건 태현이었으니까.
“문제는 이걸 제가 가르쳐드리더라도 태현 님이 잘 쓸 수 있을지입니다. 워낙 어려운 검술이라서요.”
“으음…….”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포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판타지 온라인 2에서는 검술 관련된 스킬이 엄청나게 많았다.
하나, 하나로 되어 있는 단일 스킬도 있었고 여러 스킬이 연계적으로 되어 있는 검법 같은 스킬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실력이 되어야 배울 수 있다는 것.
태현의 검술 스킬은 아직 초급이었다. 물론 제작 직업으로 초급 검술 스킬 후반까지 찍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따라 해보시죠!”
“좋아!”
[검술 스킬이 부족해서 가타콰 검법을 완전히 배우지 못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실력이 뛰어납니다. 스킬 습득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배우지는 못했다. 태현은 스킬 창을 확인했다.
<가타콰 검법: 아탈리 왕국의 역사 깊은 검법 중 하나다. 검 하나로 공격과 방어를 일체시키는 검법은 예술적으로도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뛰어난 스승에게 배웠습니다. 보너스를 받습니다.]
-방어의 원
-공격의 원
-……??
-……??
-……??
아직 열리지 않은 스킬들이 몇 개 보였다.
‘이건 직접 몸으로 뛰어야 되겠군.’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십니까?”
“대충? 방어의 원, 공격의 원 정도만.”
태현의 대답을 들은 루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시군요. 바로 두 개의 스킬을 이해하시다니. 둘 다 가타콰 검법의 기본이 되는 스킬입니다. 방어의 원은 자기 중심으로 원을 그려서 주변의 공간을 지배하는 스킬입니다.”
루포는 가볍게 검을 꺼내 원을 그었다. 그러자 그것만으로도 선이 생기고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로 공격당할 것 같은 강렬함!
“적이 많은 난전에서 특히 유용하죠. 어떤 적이 뒤에서 오든 바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루포는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더니 바위를 가리켰다.
“다음은 공격의 원입니다. 공격의 원은 상대 하나를 중심으로 잡고 원을 그리는 스킬입니다. 그 원을 중심으로 공격하는 거죠.”
루포는 가리킨 바위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번쩍!
카카카캉!
바위 주변에 생겨난 원이 조여들더니 바위를 그대로 박살 내버렸다. 태현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야. 감탄했어.”
“그렇습니까?”
루포는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네가 뛰어난 검사라는 걸 잊고 있었네.”
“……대체 절 뭐로 보고 계셨던 겁니까?”
루포는 투덜거렸지만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스킬을 사용했다.
방어의 원.
공격의 원.
둘 다 어느 정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루포처럼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이거 범위 공격 가능한 건 없어?”
“가타콰 검법을 끝까지 익히시면 알게 될 겁니다.”
“오. 진짜?”
“예. 가타콰 검법은 심오하고 끝이 없는…….”
“알겠어. 알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