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5화
“이렇게 설명을 해줬는데도 아직 불만이 있는 사람 있어?”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태현의 말은 아무리 봐도 친절하게 물어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한 명 골라서 본보기를 보여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있으면 나와. 돈 돌려줄 테니까 돌아가면 돼. 이런 퀘스트를 공짜나 다름없게 공유해줬는데 나도 불만 들어가면서 같이할 생각 없으니까.”
“어…… 어떻게 돌아가죠?”
“알아서 돌아가야지.”
“…….”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육지까지는 헤엄쳐서 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바다에서 오래 헤엄치다 보면 체력에 페널티가 붙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제작이나 예술 직업.
체력 스탯이 높은 사람이 드물었다.
체력 스탯이 높아도 익사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이라면 100% 익사!
“그래서, 불만 있는 사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 *
“좋아! 요리사는 이쪽으로! 대장장이는 저쪽으로! 또 누구 있냐?”
“저, 저는 화가인데…….”
“화가? 화가도 있어? 화가는 어디에 써먹지?”
“글쎄?”
해적들은 서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에게 화가는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직업이었다.
“넌 뭘 할 수 있냐?”
“글, 글쎄요? 어…… 요새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해적기를 그리거나…….”
“그거 괜찮네.”
“멋지게 그려달라고. 그러면 화가들은 저쪽으로 가라! 또 다른 거 있어?”
“저, 저는 낚시꾼인데…….”
“낚시꾼? 그러면 저기 절벽으로 가서 생선이나 낚아와!”
배에서 내린 플레이어들은 우왕좌왕하며 나뉘어졌다. 앞에 있던 해적들이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적들은 결코 친절한 NPC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대도시에서 나름 친절한 NPC들과 지내왔던 플레이어들은 적응하기 힘든 거친 NPC들!
해적이란 걸 알고 있으니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잘못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페널티를 입을 테니까.
“야,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거지?”
“그러면 어쩌게? 너 반항할 수 있냐?”
“그렇긴 한데…….”
다들 소곤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그러자 해적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한 대 맞고 싶냐!”
“히익!”
그 말을 듣자 모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목숨이 우선이었으니까.
“설마 이거 했다고 나중에 왕국 쪽에 무슨 말 듣는 거 아냐?”
플레이어 중에서는 머리가 좋은 플레이어도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생각이었다.
왕국의 적인 해적을 도와준 게 발각된다면?
왕국 쪽에서는 싫어할 것이다.
“우, 우리는 억지로 끌려왔잖아?”
“정확히 따지면 억지는 아닌데…….”
“아니, 못 들었잖아!”
“그거 왕국 사람들이 믿어줘야 하잖아.”
“그러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
이제야 그들은 상황을 깨달았다. 태현한테 속았다고 해서 왕국에 가서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들도 공범인 상황이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 * *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언제나 좋군.”
“……무슨 노예 주인입니까?”
중얼거리는 태현을 보며 루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태현은 요새의 탑 위에서 플레이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적들이 시키는 대로 나뉘어져서 열심히 일하는 플레이어들!
“들키지는 않았지?”
“예. 눈치는 못 챈 거 같습니다.”
“어디쯤 있을까?”
“섬의 지하에, 고문서가 맞다면 아마…….”
루포는 손가락으로 요새의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겁니다.”
“저기가 어딘데?”
“아마 해적들이 감옥으로 쓰고 있는 곳 같습니다. 그 밑에 있겠죠.”
“경비가 심하겠군.”
“예. 철저하겠죠. 해적들이 인질 잡아놓을 때 쓰는 곳이니 말입니다.”
“뚫을 수 있겠냐?”
“예? 저는 전사지 도적이 아닙니다!”
“도적은 없나?”
“상단에서 도적을 왜 찾으십니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러면 어떻게 내려갈까…….”
태현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저 지하 감옥으로 가는 것 자체는 쉬웠다.
그 뒷감당이 어려워서 그렇지.
여기는 해적들이 우글거리는 섬의 한가운데였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해적들을 뚫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또 쫓아오는 해적들을 떨쳐내야 했다.
바다 위에서 말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난이도가 몇 배로 뛰는 상황.
‘조용히 끝내는 게 최선인데 말이야.’
지금 열심히 일하는 플레이어들이 더 열심히 노오오력을 해준다면 해적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좀 더 있어도 될 것이고, 태현도 몰래 내려갈 수 있으리라.
‘은신으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찔러나 봐볼까.’
태현은 자신이 있었다.
안 잡힐 자신이 아니라, 잡혔을 때 변명을 할 자신이.
-은신!
이번에 새로 얻은 방랑자의 외투는 다양한 스킬 옵션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은신이었다.
도적 계열 직업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스킬이었지만, 태현은 도적 계열 직업이 아니었다.
이런 아이템에서 쓸 수 있는 스킬이 아주 귀중할 수밖에 없었다.
[은신을 사용합니다. 도적 계열 직업이 아니라 페널티를 받습니다.]
[큰 소리를 내거나 소란을 만들면 은신이 풀릴 수 있습니다.]
[상대에 따라 은신이 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높은 행운 수치로 은신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빠르게 뜨는 창들을 보며 태현은 조심스럽게 땅에 착지했다.
감옥답게 경비를 서는 해적들이 몇 명 있었다. 틈을 만들고 싶었지만 의외로 만만치가 않았다.
경계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빈틈도 없는 자세!
“야, 이번에 새로 온 놈들 봤냐?”
“뭔데?”
“그놈들 재주가 기막히더라고. 우리가 잡아 온 대장장이들 있지? 그것들보다 훨씬 더 실력이 괜찮더라. 이 칼 좀 봐. 새로 온 놈들이 만져준 거야.”
“오. 대단한데?”
해적들은 상선에 타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실력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당연했다. 제노마 시에서 제작 스킬을 갈고 닦던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나도 가서 좀 해달라고 해야겠다.”
“좋다니까. 꼭 해라. 이 칼, 날 선 거 보이지?”
‘흠…….’
해적들의 대화를 듣던 태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어이! 거기! 여기 칼들 전부 갈아!”
“어, 아직 갑옷 수리 못 끝냈는데…….”
“뭐? 아직도 못 끝냈어?! 빨리빨리 하라고! 그렇게 손이 느려서 어디에 써먹겠어!”
[해적 백병대장 로드란이 화를 냅니다.]
[작업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친밀도가 하락합니다.]
“에이. 대장. 너무 그러지 마요. 그래도 일 잘하잖아요.”
“맞아요. 이 갑옷 좀 보세요. 그 많던 녹이 다 사라졌는데!”
대장장이 플레이어, 박성찬은 그 말을 듣자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나냐!’
그들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구경이고 뭐고 없이 바로 작업실로 끌려온 상태였다.
판타지 온라인 2는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으로 유명했다.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갔을 때, 거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배에서 내리고 나서 본 건 작업실의 벽과 천장이 전부!
덕분에 레벨이 2나 오르고 대장장이 스킬도 쭉쭉 오르는, 폭풍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쉬고 싶어! 쉬고 싶다고!’
쉬고 싶지만 지금 쉬었다가는 기회를 날릴 것 같아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갑옷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적이 응원을 해주자 감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박성찬은 코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숨기기 위해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에이. 알겠다. 좀 쉬어라.”
“……!”
부하의 말을 들은 로드란이 입맛을 다시며 쉬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박성찬은 친구 김지산을 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쉬어도 된대!”
둘은 털썩 주저앉았다. 게임을 이렇게 열심히 한 건 처음이었다.
“너 스킬 얼마나 올랐어?”
“어? 안 봤는데…… 헉!”
김지산은 스킬 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도시에서 연습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늘었던 것이다.
해적들의 레벨 높은 아이템을 엄청나게 많이 만지다 보니 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우와…… 나 이렇게 하면 금세 랭커 되는 거 아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농담이야. 근데 진짜 여기 괜찮은 것 같은데?”
“뭐? 여기가 괜찮다고? 너 머리 괜찮냐?”
김지산은 박성찬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가 괜찮다니.
그들은 지금 여기 끌려와서 경치 구경이나 즐거운 경험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서 한 건 해적들의 작업실에서 계속 망치를 두드린 것뿐!
“아니. 잘 들어봐. 너 여기 와서 레벨 얼마나 올랐어?”
“도시에서보다 빨리 오르긴 했는데…….”
“스킬은 얼마나 올랐어?”
“그것도 많이 오르긴 했는데…….”
“근데 안 좋다고?”
“…….”
그렇게 따지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일하고 있잖아!”
“야. 이런 퀘스트가 또 언제 오겠어? 이건 기회야! 이때 팍팍 올리는 거야!”
“……!”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그럴듯했다.
처음에는 해적이라는 말에 속았다고만 생각했지만 이게 의외로 꿀이었던 것이다.
잘 챙기면 다른 대장장이들과 차이를 벌릴 수 있는 기회!
두 친구는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 이번 기회에 올리는 거야! 해적이든 뭐든 어떠냐! 경험치만 올리면 그만이지!”
“그럼 바로 시작할까?”
“……조금만 더 쉬고 하자.”
바로 시작하기에 그들은 너무 많이 일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쉴 수 없었다. 태현이 왔기 때문이었다.
“거기 둘.”
“……?”
둘은 태현을 금세 알아봤다. 맥크레니 상단의 상선에 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태현은 이미 유명해진 상태였다.
보통 ‘복면 쓴 XXX’나 ‘코트 입은 XXX’로 불렸다. ‘사기꾼’ 정도는 약한 수준일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태현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 봐도 태현은 레벨이 높아 보였으니까.
상단의 높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런 희귀 퀘스트를 직접 진행할 정도면 랭커나 준 랭커 정도는 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현이 레벨 30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어, 무슨 일이십니까?”
“좋은 일거리가 생겼어. 따라와.”
“……?”
“싫어? 싫으면 말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지 뭐.”
태현은 둘이 망설이자 그냥 몸을 돌렸다.
“아닙니다! 할래요!”
“저도 하겠습니다!”
둘은 이미 이 섬이 기회라는 걸 깨달은 상태였다. 여기서 일거리를 준다는 걸 거절하면 바보였다.
물론 엄청나게 노가다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심하겠는가?
둘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었다.
태현은 복면 밑으로 씩 웃었다. 복면이 좋은 점은 대놓고 웃어도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었다.
둘은 한 가지 잊고 있었다. 그들이 저런 말에 속아서 이 섬에 왔다는 것을!
* * *
“저기 저 해적들 보이지?”
“네.”
“가서 친한 척을 해.”
“네??”
“혹시 말을 이해 못 하나?”
“아, 아니. 친한 척을 하라는 게 무슨 소리죠?”
“가서 친한 척을 하라고. 내가 저기 들어갈 수 있게.”
“……!”
박성찬과 김지산은 서로 쳐다보았다. 지금 이 인간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어떻게 친한 척을……?”
“그것도 내가 알려줘야 해? 가서 ‘새로 온 사람인데 무기랑 장비 봐드릴게요~’ 하면 되잖아.”
태현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방법을 말했다. 그걸 들은 둘은 ‘아’하고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