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4화
“너무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네가 일을 벌렸잖아!’
루포는 속마음을 삼켰다.
“미리 말은 해뒀다고 했지?”
“예. 그렇긴 한데 해적 놈들은 믿을 게 안 돼서……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놈들이니까요.”
“뭐, 틀어지면 어쩔 수 없지.”
“방법이라도 생각해 놓으신 거 있으십니까?”
“응? 그냥 도망치려고 했는데. 저 배 가지면 쫓아오지는 않겠지.”
“…….”
루포는 순간 뒷목을 잡을 뻔했다. 자기 돈으로 산 배 아니라고 저렇게 쉽게 버린다는 말을 하다니…….
“해적들도 갇혀서 살다 보면 아쉬울 게 많을 거야.”
태현은 말과 함께 뛰어내렸다. 맥크레니 상단의 함선 옆에 작은 보트가 있었다.
교섭을 위해 둘이 먼저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가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걸 켜야 합니다.”
마탑의 추진장치:
에랑스 왕국의 마탑에서 만든, 마력으로 작동하는 소형 엔진. 거대한 함선을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소형 보트를 밀기에는 충분하다.
[기계공학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상승합니다.]
[마법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부족해 제작법은 알아내지 못합니다.]
[마법 스킬이 부족해 제작법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빠르게 뜨는 알림창들.
태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기계공학 스킬이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이런 장치는 제작법을 알아내는 게 제일이었다.
마법과 기계공학 스킬 둘 다 있어야 알아낼 수 있는 것 같은데…….
“뜯어 가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알았지?”
속마음을 들킨 태현은 손을 치웠다. 루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현이 손을 대길래 혹시나 싶어서 말했는데 진짜로 가져가려고 한 거였다니.
“그거 비싼 겁니다! 마탑에서도 아무한테나 파는 거 아니라고요!”
“알겠어. 알겠어. 안 가져간다니까.”
부우웅-
보트는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함선이 보였다. 상선과는 달리 옆에 대포가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해적선이었다.
“거기서 멈춰라!”
해적선 위에 있던 해적들이 태현과 루포를 발견하고 외쳤다. 그들은 밧줄을 던졌다.
“타고 올라와! 천천히!”
루포가 긴장한 얼굴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위에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알아. 알아.”
“그렇게 말하시니 전혀 설득력이 없잖습니까! 혹시나 저놈들 앞에서 화신이라던가 신 관련된 소리는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해적들은 욕심이 많았다. 게다가 카테란드 해적단은 그냥 해적단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장은 야심이 넘치는 남자였다.
“알겠다니까?”
둘이 밑에서 떠들자 해적 한 명이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냐! 올라오라고 했을 텐데! 이상한 짓을 했다가는 당장…….”
“지금 올라가니까 진정하라고!”
태현은 손을 흔들고 밧줄을 잡은 다음 올라갔다.
탁-
갑판 위에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건 수많은 눈동자였다.
태현과 루포를 빤히 쳐다보는 해적들의 눈동자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결코 친절한 태도가 아니었다.
‘니들이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뜻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루포는 긴장한 얼굴로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조금이라도 자극을 하면 바로 칼을 뽑을 것 같았다.
태현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입을 열었다.
이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을 수십 번도 넘게 겪었다. 이런 것 때문에 긴장하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대해적님들.”
“…….”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는 여러분들의 요새를 좀 더 생기 있고 활동감 넘치게 꾸며드리려고 온…….”
“너희가?”
“우리가 어떻게 믿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고?”
순식간에 끼어드는 해적들. 그들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 멀리서 오는 배를 보시면 바로 알 겁니다. 무장한 군사들 같은 것도 없고 무기도 없습니다. 있는 건 우리 대해적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뿐이죠.”
[화술 스킬이 증가합니다.]
[화신의 매력으로 친밀도 보정을 받습니다.]
[해적들이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맥크레니 상단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돈 때문이죠.”
태현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었다.
“돈 때문이라고?”
“예. 아시다시피 상인들은 돈만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잖습니까? 그 돈이 불법이든 아니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죠. 그리고 우리 대해적 여러분들께서는 돈이 될 만한 걸 많이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해적들이 돌아다니면서 약탈한 물건들은 다양했다. 귀금속부터 시작해서 온갖 아이템들을 다 약탈했지만, 이걸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우리가 훔친 물건들을 처리해 주겠다고?”
“물론 저희도 돈을 받아야죠.”
옆에서 듣던 루포는 기가 막혔다.
들킬 걱정 없다고 저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다니.
물론 해적들이 훔친 물건을 거래하면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발각이 된다면 보통 위험한 게 아니었다. 왕국에서 상단을 직접 조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득이 커도 위험에 비교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
그러나 태현은 어차피 걸릴 일 없다고 저렇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만 넘기면 해적 놈들 볼 일 없잖아?’
해적들이 속아서 억울하다고 육지에 올라와서 쳐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
“맥크레니 상단이 우리와 손을 잡고 싶어한다…… 이 말이지?”
키가 크고, 해적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가 입을 열자 다른 해적들이 옆으로 갈라섰다.
딱 봐도 해적단 우두머리의 느낌이 들었다.
“데넬손 님!”
“데넬손 님!”
루포가 태현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게 카테란드 해적단의 두목입니다.”
“잘생겼네.”
“예?”
“잘생겼다고.”
“……지금 그런 게 신경이 쓰입니까?”
“왜.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데넬손은 약간 무섭게 생겼지만 동시에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마치 영화배우 같은 얼굴.
태현과 루포 둘이 떠드는 동안 데넬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맥크레니 상단이 우리와 손을 잡고 싶어 한다니 의외로군. 꽤나 얌전을 떨더니. 이제는 우리 같은 놈들과 손을 잡고 싶다 이건가?”
그 말을 들은 태현은 루포에게 수군거렸다.
“저거 왜 저렇게 속이 좁아? 이제까지 왜 모르는 척했냐고 그러는 거 맞지?”
“……제발 말 좀 가려서 하십시오.”
태현은 데넬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상황이야 언제든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과거는 과거. 지금은 지금이죠.”
“흥. 그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 되게 속 좁네.’
얼굴은 잘생겨가지고 하는 소리는 계속 투덜대는 소리였다. 물론 밖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태현이 아쉬웠으니까!
태현은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계속 말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희도 지금 돈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어째서지?”
“크흠. 이건 비밀인데, 저희 상단의 주인인 맥크레니 님께서 도박에서 돈을 많이 날리셔서…….”
“?!”
루포는 깜짝 놀라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인간이 대체?
“맥크레니가 도박으로 돈을 날렸다고? 생각보다 더 한심한 여자였군.”
덕분에 깎이는 건 맥크레니의 평판. 맥크레니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도박으로 큰 돈을 날려서 상단을 위태롭게 만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데넬손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 한 번 어떻게 하나 보겠다.”
[해적들의 대장 데넬손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화술 스킬이 증가합니다.]
[섬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해적들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해적들의 섬을 꾸며라>
카테란드 해적단은 악명 높은 해적들이지만, 그들도 고민은 있다. 왕국에 단단히 찍혔기에 필요한 아이템을 얻거나 요새에 필요한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번에 맥크레니 상단에서 제안한 건 해적단에게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해적단의 섬을 완벽하게 꾸며라. 그러면 아무리 난폭한 해적들이라도 보상을 해줄 것이다.
보상: 카테란드 해적단과의 친밀도 상승. ?, ??
카테란드 해적단은 맥크레니 상단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각종 물자에, 요새를 꾸밀 사람들까지 공짜로 제공해 주는 셈이었으니까.
태현은 루포를 보며 말했다.
“어때. 잘 해결됐잖아?”
“앞으로 남은 일도 이렇게 해결됐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 * *
“어? 저 배 뭐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가 타고 있는 배보다 더 크잖아?”
화가 직업으로 키우고 있는 이지나는 옆에 있는 친구 최연정을 보며 물었다.
“전투용 맞지? 옆에 마법 대포도 달려 있고…….”
“호위함인가?”
“저, 저거…….”
“응? 왜 그래?”
친구가 손가락질을 하며 벌벌 떨자 이지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깃발!”
“깃발이 왜…… 헉!”
상선 곳곳에서 비슷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옆에 붙은 배의 깃발을 봤기 때문이었다.
해적의 깃발이었다.
카테란드 해적단의 깃발.
“해적선이잖아?!?!”
“도망! 도망쳐야 해!”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도망쳐야 한다니까! 해적선이 옆에 붙었잖아!”
플레이어들은 당황해서 선원을 붙잡고 소리쳤지만 선원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황할 거 없습니다. 공격 안 하니까요.”
“뭐라는 거야?!”
“해적이 공격을 왜 안 해?!”
“이 배는 해적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배입니다. 여러분.”
“?!?!”
사람들은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지금 저 선원이 뭐라고 한 거지?
“아니, 뭐라고요?”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이 배는 카테란드 섬으로 갑니다. 카테란드 해적단이 있는 곳이죠.”
“그, 그러면 우리가 손보는 요새는…….”
“해적단의 요새죠.”
“우리가 퀘스트를 받고 퀘스트를 해결할 NPC들은…….”
“해적들이죠.”
간단하게 대답해 주는 선원.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표정이었다.
“뭔 해적이야?!”
“그 사람 어딨어? 퀘스트 모은 사람!”
불평하는 사람들로 갑판 위가 시끄러워지자 태현이 나섰다. 태현은 사람들 앞에 섰다. 물론 상단의 호위들도 옆에 끼고.
“무슨 일이지?”
“뭐에요, 이게! 분명 좋은 퀘스트라고 했었잖아요!”
“맥크레니 상단의 퀘스트고, 그거 공유해 준 건데. 내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한 적 있나?”
“카테란드 섬으로 가잖습니까!”
“거기가 뭐 어때서?”
“해적단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해적단이 있는 게 뭐 어때서? 무슨 문제 있나?”
뻔뻔하기로는 얼굴에 철판을 깐 수준!
태현은 어차피 복면도 쓴 상태였다. 플레이어들이 불평불만을 해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태현은 손가락으로 가장 앞의 플레이어 한 명을 지목하며 물었다.
“그러면 내가 물어보지. 맥크레니 상단 정도 되는 세력의 퀘스트를 같이 받으면서, 아무 위험도 안 겪고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쉽게 퀘스트를 깰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거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냐?”
“아, 아니. 그런 게…….”
“해적단이라서 불만이 있는 건가? 해적들이 뭐 어때서? 우리는 가서 퀘스트만 잘 깨주고 보상만 받으면 돼. 해적들이 우리를 잡아놓는 것도 아닌데 왜 난리지?”
“…….”
순식간에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난동을 피우기에는 여기 있는 맥크레니 상단의 사람들이 레벨이 높았다.
게다가 엄밀하게 따지면 태현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맥크레니 상단의 퀘스트를 공유한다고 했고, 실제로 공유했으니까.
아무도 맥크레니 상단이 카테란드 섬으로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