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5화
펠마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얌전히 찌그러졌다. 태현이 노려보는 게 보통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 떠들면 한 대 때릴 분위기!
아우우우-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줄무늬늑대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기습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약하다고 방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먼저 공격할 방법이 없나?’
태현은 마차를 뒤적거렸다. 적절한 원거리 무기가 필요했다.
“펠마스. 이게 뭐지?”
“…….”
“펠마스?”
“…….”
“설마 내가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 했다고 입 다물고 있는 거면, 망치가 아니라 검으로 팬다.”
“하하. 부르셨습니까?”
태현은 진심으로 도망칠까 고민했다. 감이라는 게 있었다.
부자에, 지위가 높고, 친절한 NPC가 퀘스트를 준다면 그 퀘스트는 가슴 따뜻하고 편한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성격 더럽고 아무것도 없는 NPC가 퀘스트를 준다면 보상과는 상관없이 그 퀘스트가 힘들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펠마스는 아무리 봐도…….
꽝 중의 꽝!
‘전설 직업 맞지? 전설 직업 확실하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펠마스의 모습!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전직시킨 다음 저런 NPC를 보내는 게, 무슨 업보 같았다.
‘내가 뭘 했다고…… 음. 많이 하긴 했군.’
판타지 온라인 1에서 태현을 저주한 플레어어들의 원한만 합쳐도 벌써 악마 하나는 만들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뭐냐고?”
“아, 이거요? 활입니다. 여기 줄 있으시니 매다시면 되겠네요.”
“자랑이다. 활은 쓸 줄 아나?”
“아니요.”
“……그래.”
태현은 다시 한숨을 쉬며 활을 만지기 시작했다. 줄이 달려 있지 않아서 처음부터 해야 했다.
궁술 스킬은 없었지만 그래도 쏘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게다가 행운 수치와 스킬을 합치면 꽤 괜찮을 테니까…….
“잠깐. 이거 왜 이렇게 커?”
“그야 인간 활이 아니라 오크 활이라…….”
“오크 활도 이렇게는 안 클 것 같은데?”
태현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잘못 만들어진 오크 활: 내구력 85/85, 공격력 60.
오래 사용 시 사용자에게 데미지.
힘 제한 50, 민첩 제한 50.
초보 오크 대장장이가 크기를 착각하고 만든 활이다. 크기와 재질 때문에 파괴력은 좋지만, 덩치가 맞지 않는 사람이 오래 쏘면 다칠 수 있다.
“……음. 그래.”
태현은 이제 뭐가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여기를 좀 잘라내고…….”
어떻게든 잘라내서 맞춰보려는 눈물겨운 태현의 노력. 보답이라도 해주듯이 메시지가 나왔다.
[스킬, 기계공학이 오릅니다.]
[중급 대장장이 기술 스킬 덕분에 활이 쉽게 망가지지 않습니다.]
[중급 수리 기술 스킬 덕분에 활이 쉽게 망가지지 않습니다.]
“신의 예지.”
태현은 예지까지 사용해 활을 자르고 고쳤다.
누군가 맞게 고친 오크 활: 내구력 75/75, 공격력 65.
치명타 확률 5%. 일정 확률로 급소 명중.
힘 제한 35, 민첩 제한 35.
뛰어나고 유망한 대장장이가 잘못 만들어진 활을 인간에게 맞게 고쳤다.
팅-
태현은 활의 시위까지 연결하고 나서 튕겨보았다. 제법 그럴듯한 소리가 났다.
‘대장장이 기술이 중급에 레벨 6 정도니까 대장장이로 그렇게 밀리지는 않겠군.’
대장장이 계열 직업을 골라서, 전문 대장장이로 키우는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고급 대장장이 기술까지 간 플레이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현은 다양하게 스킬을 올리고 있는 상황. 중급 대장장이 기술 6까지 올린 건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대장장이들이 다 랭커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레벨 낮은 대장장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행운에 아키서스의 화신 직업 스킬까지 쓰면 어찌어찌 다른 대장장이하고 승부가 될 거 같긴 한데…….’
엄청나게 높은 행운과 전설 직업. 태현의 장점이었다. 다른 대장장이들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장점.
태현은 어두운 숲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신의 예지 스킬 때문에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들이 보였다.
그 붉은색이 가까이 다가오자 태현은 바로 화살을 들어 쐈다.
[궁술 스킬이 증가합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을 맞췄습니다! 궁술 스킬이 추가로 증가합니다.]
“펠마스. 일어나라!”
“예? 뭡니까?”
“뭐긴 뭐겠냐! 늑대겠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오기 전에 다 처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하면 태현은 궁수로 전직한 상태였을 것이다.
아우우-
“으아아! 태현 님! 살려주십쇼!”
“……너 진짜 늑대 먹이로 던져버리고 싶다.”
신을 모신다는 NPC가 태현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태현은 다시 활을 당겼다. 펠마스를 믿을 수 없으니 그라도 잘 싸워야 했다.
‘걔는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춘 거래?’
태현은 스스로의 실력을 잘 알았다. 일대일에서, 근접전에서, 태현의 센스를 뛰어넘는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태현은 언제나 상대가 뭘 하는지 읽을 수 있었고 그보다 한 발 먼저 반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활로 쏴서 급소를 맞히는 건 태현에게도 나름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서 내가 한주를 했던 건데. 난이도가 있어서.’
예전을 떠올리며 태현은 다시 화살을 집어 들었다.
“응?”
“왜, 왜 그러십니까?”
“여기 늑대 나온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죠?”
“그런데 저건 뭐지?”
태현은 저 멀리서 나타난 몬스터를 가리켰다. 마차 주변의 모닥불 때문에 몬스터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늑대가 아니었다.
말 위에 탄 기사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말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잖아?”
살아 있는 말이 아니라 삐쩍 마른 해골로 되어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령마!
그 위에 타고 있는 것도 비슷했다. 기사는 기사였는데, 낡고 닳은 갑옷을 입고 랜스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낡고 닳은 아이템들이었지만 그 위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이런 젠장.’
태현은 바로 감을 잡았다. 유령마를 타고 다니는 언데드 기사라니. 이건 한눈에 봐도 고레벨 몬스터였다.
이런 게 왜 여기 나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언데드 몬스터는 친절할 가능성이 적었다. 태현은 어떻게 싸울지 머리를 굴렸다. 지금 수준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만. 뭐하는 거야? 늑대 잡으랬더니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건 여자였다. 칠흑색 로브에 한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자.
태현은 그녀가 들고 있는 장비가 엄청나게 좋은 장비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 수많은 희귀 아이템들을 만져 본 대장장이로서의 직감!
‘고렙 마법사? 언데드 부리는 거면 네크로맨서 계열인가? 이 정도면 랭커 같은데, 랭커 중에서 네크로맨서면 누구였…… 헉!’
여자가 다가오자 태현은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태현이 사람 얼굴을 자주 잊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세연이잖아!!’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네크로맨서로 최강의 자리에 앉았고, 결국 태현까지 이긴 플레이어.
게다가 2에서는 전설 직업으로 전직한 상황. 랭커들 중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세연은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물었다.
“혹시 이 데스 나이트가 공격하지는 않았죠?”
“아. 네.”
자연스럽게 변조되는 목소리!
태현은 그가 왜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바꿨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만. 이세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단 판타지 온라인 1의 다른 랭커들은 다 태현을 싫어했다.
당연했다.
대장장이로 일대일을 신청해서 전원을 쓰러뜨렸으니까. 그것 때문에 랭커들은 온갖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태현이 괜히 판타지 온라인 1 때의 신분을 숨기면서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신분을 공개하면 순식간에 인기야 끌겠지만, 동시에…….
-야. 김태현 판타지 온라인 2는 안 하냐?
-뭔 상관인데? 하면 어쩌려고?
-죽인다!
-김태현 죽인다!!!
-김태현 쫓아다니면서 죽인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플레이어들과 그를 쓰러뜨려서 인기 좀 얻어 보려는 플레이어들까지.
엄청나게 몰릴 것이다.
아직은 조용히 살아야 했다.
‘1에서 얼굴 가리고 다녀서 다행이지…….’
이세연은 그를 이겼으니까 그래도 원한이 없지 않을까?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네요. 주변에 늑대들이 보여서 청소 좀 하라고 보냈더니 이상한 곳으로 가서…… 대장장이신가 봐요?”
이세연은 태현의 망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네.”
“혹시 긴장하신 건가요? 제가 네크로맨서긴 한데 상관없는 사람 공격하지는 않으니까 긴장 안 하셔도 되는데요.”
이세연은 랭커 중에서도 성격이 좋은 편에 속했다. 시원시원하고, 뒤끝 없고, 처음 보는 사람이나 저렙에게도 친절한 편이었다.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태현은…….
“긴장 안 하고 있습니다. 하하!”
“아무리 봐도 긴장하신 거 같은데……? 혹시 저 아시나요? 방송 보셨을 수도?”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저 방송도 하는데, 방송 보시면 제가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알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방송을 하고 있으신 겁니까?”
“아. 아니요. 저는 필요할 때만 방송을 해요. 지금은 아니고요.”
방송을 언제나 하면 귀찮은 일만 벌어졌다. 이세연 정도 되는 랭커들을 견제하려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장장이신데 혼자 여행하는 건가요?”
“아. 네.”
“혹시 말버릇이 아. 네. 에요? 계속 아. ‘네’만 하시는데…… 불편하신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세연이 그냥 저리 가줬으면 좋겠지만, 태현은 표정을 유지하며 거짓말을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세연이 그에게 원한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생각만 돌아가는 중이었다.
“보니까 레벨이 아주 낮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길드 안 들어가셨어요? 대장장이인데?”
“혼자 하는 걸 좋아해서요.”
“솔플을? 대장장이로? 대단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판타지 온라인 1에서도 그런 플레이어가 있었죠.”
“……!”
태현은 움찔했다. 설마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
“그 플레이어 때문에 2에서도 유행이 좀 생긴 것 같은데, 사실 대장장이는 길드에 들어가야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 꼭 들어가라는 건 아니고요, 혼자 하는 것도 좋죠. 존경해요.”
태현은 살짝 감동했다. 이세연의 태도 때문이었다. 랭커 중에서 저렇게 처음 보는 저렙한테 친절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런 이세연의 태도를 보니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과연 나는 저렇게 착하게 살고 있는가?
그건 그거고, 태현은 은근슬쩍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1에서 그런 플레이어라뇨?”
“아. 김태현이라는 플레이어인데. 모르세요? 하긴 2가 아니라 1이니까…… 대장장이로 혼자 플레이하면서 PVP 잘하던 플레이어가 있었거든요.”
“대단하네요.”
“대단했죠.”
이세연은 그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이겼지만요.”
“아. 네.”
“제가 이겼지만요.”
“들었는데요.”
“중요한 거라 원래 이거 이야기할 때는 두 번씩 말해요.”
“…….”
태현은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너 잘났다!
“정말 힘들게 이겼거든요. 사실 거의 졌던 싸움이었는데…… 아. 이야기가 샜네요. 어쨌든 그런 플레이어가 있었다고요.”
“재밌네요. 그런데 결국 이기신 건 그쪽이니까 그 김태현이라는 플레이어한테는 별 관심이 없겠네요?”
“아뇨. 관심 많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