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1화
요새의 병사를 빌릴 수 있는 권한은 대단한 것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는 어지간한 플레이어보다 강했다.
그런 병사들을 빌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공적치와 친밀도의 증거였다.
“감사합니다!”
넙죽 숙여지는 고개.
혼자 돌아다니는 태현에게 이런 식의 힘은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닐 놈들도 생겼으니까.
“레드존 길드 놈들 어떻게 될까?”
“길마 죽고, 길드원들도 지금 다 끌려가서 잡히게 생겼으니까…… 한동안 휘청거리지 않을까? 그래도 넌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 길마 보니까 너 정말 싫어하는 거 같더라.”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
“걱정 마. 어차피 떠날 거니까. 퀘스트도 깼고, 여기 계속 있을 생각도 없었어.”
오크 부족장 카자크가 죽은 것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대족장이 무언가 일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가장 첫 번째로 이 주변에 쳐들어오겠지.
이 주변에 있다가 괜히 오크들한테 공격당할 이유는 없었다.
“아. 퀘스트는 다 깼어?”
“네! 감사합니다!”
지수가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많이 얻은 사람 중 하나가 그녀였다.
최상윤이야 워낙 레벨이 높아서 이거 하나 깼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태현이야 아이템은 많이 얻었지만 전설 직업 페널티 때문에 레벨 업은 기껏해야 하나 올랐다.
그러나 지수는 어마어마하게 오른 상태였다. 타이럼 레인저로 인한 이득과, 희귀 퀘스트를 깬 덕분이었다.
원래라면 나오지 않았을 희귀 퀘스트를 성공시키자 그 보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레벨 많이 올랐나 보네?”
“네!”
“나는 1 올랐는데…….”
“?!”
지수는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태현은 피식 웃으면서 지수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농담이야. 어쨌든 퀘스트는 깼다 이거지? 일단 빨리 빠져나가자.”
“근데 지금 이거 지수 직업 퀘스트지?”
직업 퀘스트. 직업을 얻으면 나오는 퀘스트였다. 플레이어들은 그 퀘스트를 따라가면서 성장했다.
퀘스트의 보상은 다양했지만, 일단 직업 전용 스킬이나 그런 게 많이 나왔다.
깨고 깨다 보면 직업의 비밀도 나오고 NPC도 나오고…… 직업 퀘스트를 안 깨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
“근데 넌 직업 퀘스트 없냐?”
“……?”
그제야 태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는 직업 퀘스트가 없지?
“어……?”
“너 뭐 안 나왔어? 보통 전직하면 전직 관련 NPC가 뭐 주잖아.”
“저도 타이럼 사냥꾼들한테서 퀘스트 받았어요.”
“나는…… 그…….”
길 가다가 갑자기 강제로 전직되어버렸기에, NPC고 뭐고 없었다.
“그런 거 없는데…….”
갑자기 숙연해지는 분위기!
지수는 고개를 숙이고 태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했는데 정작 태현은 직업 퀘스트도 안 나온다니…….
“전, 전설 직업이라 그런 거 아닐까?”
“맞아! 전설 직업이라서!”
둘은 좋은 이유를 찾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태현은 별생각 없이 스탯창을 켰다.
이름 : 김태현
레벨 : 27
직업 : 아키서스의 화신
HP(체력) : 1325
MP(마력) : 1325
힘 : 135 (+20)
민첩 : 135
체력 : 135(+25)
지혜 : 150
행운 : 2575
보너스 스탯: 0
레벨 업을 했지만 보너스 스탯은 0이었다.
그리고 지혜가 15 늘어나 있었다.
“이런 $*#(@$&(*#&$…….”
절로 나오는 욕!
그가 마법도 없는데 지혜를 올려서 뭐한단 말인가!
마법 방어력이야 오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지혜를 올리는 놈은 없었다.
레벨 업을 했는데 보너스 스탯이 5가 아닌 15가 나온 건 좋았다.
무려 3배 아닌가.
그런데 그게 랜덤으로 지혜에 가서 자동으로 올라버렸으니…….
태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래. 이런 직업이야말로 태현이 가장 잘 플레이하는 직업 아니었던가?
직업이 괴상하고 개떡 같을수록 태현은 의욕이 생겼다.
어떻게 키워야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만으로도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이럴 거면 그냥 전설 직업이라는 타이틀 떼고 주지 그랬냐!’
끝까지 버려지지 않는 미련.
어디 가서 PVP를 하더라도 ‘전설 직업빨로 이긴 놈!’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일단 돌아가 보자. 지수는 타이럼 사냥꾼들한테 다음 퀘스트를 받아야 할 거고, 나는…….”
“너는?”
“뭐 하실 거예요?”
“토끼 다시 잡을 거야.”
“…….”
* * *
“아니, 뭐 저런 놈이 다 있어요?!”
“저게 김태현이야. 그리고 괜찮아. 이제 수정됐잖아?”
“네. 토끼발 이제 안 나와요.”
토끼가 일시적으로 안 나오는 사이 수정이 끝났다.
태현이 잡아봤자 더 이상 토끼발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오크 부족장 잡고, 레드존 길마 잡고, 길드는 거의 박살이 났고…….”
“레드존 길마가 방송하고 있어서 다들 궁금해하는데요? 김태현인 게 알려질까요?”
직원들은 기대되는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태현은 판타지 온라인 1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가 2를 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시 한번 관심이 폭발할 것이다.
지금 벌써 판타지 온라인 2에서 유명 플레이어들은 방송국의 섭외를 받고 있었다.
고정 채널이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시청률이 되니까.
사람들은 판타지 온라인에 그만큼 관심이 있었다.
세계 제일의 가상현실게임!
“김태현인 거 안 알려질걸?”
“네? 그래요?”
“1에서 김태현은 맨날 투구 쓰고 다녔잖아. 알아보는 사람 없을 거야. 자기가 공개하면 모를까.”
“추측하는 사람도 없을까요?”
“지금 김태현 따라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냐?”
“아…….”
판타지 온라인 1에서의 태현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2에서는 가짜가 속출!
이름을 김태현이라고 짓고 대장장이로 파는 플레이어만 수십 명이었다.
“그냥 따라 한다고 생각할걸?”
“그러네요.”
태현이 ‘나 김태현이다’라고 말하고 다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거 가짜네!’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하물며 정체를 안 밝힌다면 더더욱.
“스미스도 곧 전설 직업 전직하고…… 잘됐네. 이번 달은 아주 화제가 많겠어.”
* * *
토끼발은 나오지 않았다.
“전직해서 그런가?”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계속 나오면 너무 사기적이었으니까.
그래도 나오지 않으니까 살짝 아쉬웠다.
그러는 사이 지수는 퀘스트 완료를 하고 보상을 받으러 움직였다.
“그러면 난 이만 간다?”
“그래. 도와줘서 고마웠어.”
“레드존 길드 애들이 쫓아오면 나 불러. 너야 알아서 잘하겠지. 아, 그리고…… 레드존 길드원 말고 다른 플레이어도 조심해라.”
“……?”
“내 방송 시청자들이 너 죽인다고 난리야.”
“…….”
“그럼 간다!”
최상윤은 훌쩍 떠났다. 랭커들은 지금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누가 더 좋은 스킬을 얻고 더 좋은 장비를 얻고 더 레벨 업을 빨리하느냐.
판타지 온라인 2의 최강자 자리를 모두가 노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이었다.
레드존 길마처럼 한 번 죽으면 페널티 때문에 빠르게 밀려났다.
그런데도 최상윤은 태현을 도우러 망설이지 않고 와준 것이다.
태현은 새삼스럽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니까.
둘은 그런 사이였다.
‘근데 시청자들이 날 죽인다고?’
최상윤이 떠나고 지수가 돌아오기 전에, 태현은 잠깐 최상윤의 방송을 확인했다.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저 XXX 죽인다.
-저 자식 어디 있냐?
-저기 잘츠 왕국이지? 내가 찾아간다.
-웃기고 있네. 같이 노는 거 보니 쟤도 거의 준 랭커인데 니들이 뭐라고 덤비냐? 니들이 발릴걸?
-야. 파티 짜고 저놈 잡을 사람?
“…….”
대부분은 허세 같았지만, 몇몇 놈은 진심인 것 같았다.
‘얼굴 가리고 다녀야 하나?’
이제 처음 보는 사람도 의심해야 할 처지!
“이봐요. 이봐요.”
“……?”
“우리 만난 적 있습니까?”
“없는데요.”
태현에게 말을 건 것은 늙은 거지였다.
거지 중에서도 등급을 따진다면 A급 거지!
낡아서 다 해진 옷에 불쌍함을 풍기는 얼굴까지.
“돈 안 줄 거니까 저리 가세요.”
태현은 바로 선을 그었다.
마을이나 도시에 가면 이런 거지들이 있었다.
흔히들 초보들은 이런 거지들한테 돈을 적선하고는 했다.
상냥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뭔가 퀘스트나, 좋은 보상을 주지 않을까?’
순진하기 그지없는 발상!
당연히 태현도 해봤다. 태현은 원래 이런 걸 실험해보고 조사하는 걸 좋아했다.
각 도시나 마을마다 찾아가서 거지들한테 돈을 주고 반응을 확인해 봤다.
그 결과,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쓸 만한 게 거지가 쓰던 녹슨 장검 정도.
판타지 온라인 1에서 그랬으니 2에서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숨겨진 퀘스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숨겨진 퀘스트 때문에 고생할 대로 한 태현이었다.
재수가 없었다면 동쪽 오크들에게 쫓겨 다녔을지도 몰랐던 상황.
‘이제 좀 정석적으로 살자!’
“아니, 돈을 달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요.”
“네. 네. 그러시겠죠. 다른 세상에서요. 저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영화배우 김수아랑 내가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착각이더라고요. 인생이 다 그런 거죠.”
태현은 아무 말이나 하며 거지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늙은 거지는 태현의 팔을 붙잡더니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혹시 아키서스 님 아니십니까?”
“???”
<직업 퀘스트–아키서스의 화신>
도박꾼 펠마스는 평생 아키서스를 믿어 온 사람이다.
아키서스는 사제도 신전도 없는 신. 그의 믿음은 보답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키서스를 믿으며 신도들을 꾸렸다.
그를 따라가 신도들을 만나라.
보상: ?
“?????”
태현은 놀라고, 그다음에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그에게도 직업 퀘스트가 있었다. 그건 좋았다.
그런데…….
‘왜 난 거지야?’
이세연 같은 경우에는 폼 나는 네크로맨서 집단의 수장이 직접 무릎을 꿇으면서 퀘스트를 받아달라고 했다.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지수만 되도 타이럼 레인저라고 대접을 받으며 타이럼 사냥꾼들의 퀘스트를 받았다.
그런데 태현은 거지가 찾아왔다. 아니, 거지는 아니라 도박꾼이었지만 대충 거지라고 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았다.
“아키서스 맞습니까?”
“뭐, 비슷하긴 한데…….”
“오오! 아키서스 님! 아키서스 님!”
“쪽팔리니까 그만하지?”
옆에서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지나갔다.
“평생 아키서스 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어떻게 알아봤는지 신기하긴 한데, 그보다 신도들을 꾸렸다는 게 궁금하네. 어떤 사람들이야?”
“역시 제가 하신 걸 알고 계셨군요!”
“…….”
“저와 같이 일하는 제 친구들입니다. 모두 다 진심으로 아키서스 님을 믿는 놈들이죠.”
“어…… 그러니까…… 같이 일한다는 게, 같이 거지라는 건가?”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아키서스 님!”
“거지가 아니면 누군데?”
“도박꾼들이죠!”
아키서스는 행운의 신.
당연히 그를 가장 간절히 믿는 사람들은…….
도박꾼들이었다.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키서스 님. 제가 당신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태현은 반쯤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퀘스트는 깨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