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6화
원래 이 정도의 퀘스트는 플레이어 혼자 시키지 않았다.
왕국의 병사들이 같이 가고, 플레이어들은 거기 껴서 같이 싸우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엄청난 난이도의 퀘스트일 테니, 이런 요새에서 덜컥 나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태현의 높은 행운 때문에 덜컥 희귀 퀘스트가 나온 것이다.
원래 낮은 확률로 조건 몇 개를 맞춰야 나오는 퀘스트!
덕분에 태현과 지수는 병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같이 가달라고 말을 해도 ‘자네들을 믿네!’ ‘자네들을 믿네!’ 소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병사들 못 부르잖아요?”
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크 부족 처리할 때는 못 부르지. 하지만 다른 이유라면?”
“??”
“내가 잘츠 왕국에서 키우면서 느낀 건데, 여기 놈들은 정말 모두 다…… 속이 좁아.”
자기 나라는 최고! 나머지 나라는 모두 약골!
물론 대륙의 모든 나라가 그런 느낌이기는 했다. 자기 나라를 다 최고로 놓았다.
그렇지만 잘츠 왕국은 좀 심했다. 타이럼 사냥꾼들 같은 경우는 초반에 초보자들이 타이럼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친밀도가 미친 듯이 떨어졌다.
오죽하면 구성욱이 친밀도를 올리기 위해 태현에게 빌었겠는가.
거의 운영진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수준의 폐쇄주의!
여기 요새도 마찬가지였다. 타이럼 사냥꾼들이 아닌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최하영과 최하준한테 말하는 걸 봤을 때 절대 친절하지는 않았다.
“오크 부족 처리하는 걸 도와달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그저 다른 나라 놈이 우리가 오크 부족을 토벌하려는데 방해하려고 했다고 말하려고.”
“!!”
이이제이!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
한 세력을 이용해서 다른 세력을 공격하는 방법!
최상윤은 태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러니까, 설마…….”
“그래. 그 설마다.”
레드존 길드가 오크 부족을 공격해서 다 털 때까지 기다린다.
그다음 병사들에게 고자질을 해서 레드존 길드를 공격한다.
오크 부족은 박살이 나 있을 테니 셋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레드존 길드는 병사들이 막아줄 것이고.
그게 태현의 계획이었다.
“레드존 길드면 충분히 오크 부족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 정도는 되지. 길드인데.”
무슨 대규모 오크 침략이 일어난 것도 아니라, 요새 주변에 오크 부족이 몰려온 수준이었다.
그 정도라면 레드존 길드로도 깰 수 있었다.
원래라면 최상윤으로 암살을 할 생각이었지만…….
“좋아. 좋아. 그러면 좀 기다리자고. 놈들이 알아서 오크 부족을 털어주겠지.”
“야. 근데 병사들 몰고 갔는데 레드존 애들이 덤비면?”
“미쳤냐? 아무리 여기가 요새여도 잘츠 왕국 병사들인데? 레드존 길드가 그렇게 생각이 없겠어?”
왕국 병사들을 공격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병사들의 레벨도 만만치 않았지만, 병사들을 공격하는 순간 그 병사들이 소속된 왕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이다.
성 하나를 다스리는 성주도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인데, 왕국 하나와 적대하게 된다면…….
아무리 길드라도 정말 플레이하기 힘들어졌다.
그 왕국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왕국에서는 추적자들을 보내고, 친밀한 다른 왕국에도 항의를 하고…….
한마디로 가능한 온갖 방해가 들어왔다.
“그렇긴 하지. 근데 원래…… 생각 없는 놈들은 맨날 나오게 마련이잖아. 그리고 얘네는 이미 막 나가고 있고. 그런 놈들한테 병사들 데리고 가서 하던 짓 멈추고 꺼지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최상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것도 그러네. 지금 막 나가고 있기는 하니까.”
“그렇지?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병사들한테 덤비면 덤비는 거지. 우리는 오크 부족장 머리만 따고 빠져나가는 거고.”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친구지만 일 초도 고민 안 하고 바로 나오는 대답에 최상윤은 감탄했다.
한마디로 문제가 생기면 요새 병사들을 방패로 쓴 다음 빠져나가겠다는 거 아닌가.
“야. 요새 병사들이 호구도 아니고. 알아서 잘할 거야. 레드존 길드 하나 정도야 상대할 수 있겠지.”
말을 마친 후, 태현은 지휘관에게 말을 걸기 위해 걸어갔다. 최상윤은 지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쟤가 좀 사악하지?”
“네? 아니요. 멋있지 않나요?”
“…….”
콩깍지가 껴도 제대로 꼈다. 최상윤은 고개를 저었다.
* * *
“돌격! 돌격!”
“목책을 부숴버려라!”
태현이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요새 주변으로 온 오크 부족과 레드존 길드의 싸움이었다.
“화살 날아온다! 방패 들어!”
“여기는 전사 없어! 방어막 쳐줘! 방어막!”
-푸른 마력의 방패!
-마나 보호막!
카카카캉!
푸른색 마력으로 된 막이 앞에 생겨나자, 빠르게 날아오던 화살들이 부딪혀 떨어졌다.
“췩!, 취익! 인간들, 마법사 있다! 주술사 불러와라!”
“취익! 마법사부터 쳐라!”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오크 부족은 나름 요새를 만든 상태였다.
나무로 된 목책을 주변에 빙 둘러쌓고, 그 안으로는 작은 탑들까지 세운 상태.
거기 안에는 오크 궁수들과 오크 전사들이 우글거렸다.
게다가 더 안으로 가면 오크 부족장과 그의 직속 부하들이 보였다.
덩치부터 시작해서 입고 있는 장비까지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강함이 느껴지는 겉모습!
그러나 레드존 길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도 작정을 하고 여기로 온 것이었다.
“불러온 용병들은 모두 오른쪽으로 보내! 우리는 왼쪽을 친다! 계속 두들겨!”
레드존 길드의 길드장, 케인은 자신만만하게 앞을 쳐다보았다.
오크 부족이 나름 강했지만,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간다!’
판타지 온라인에서의 강함은 단순히 플레이어 개인의 강함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세력도 강함에 들어갔다.
케인은 판타지 온라인 1에서의 김태현을 떠올렸다.
김태현은 정말 강한 놈이었지만, 결국 혼자 놀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케인이 생각하기에, 김태현의 패인은 혼자 플레이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길드를 세우고 세력을 만들었다면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이세연 따위야 쉽게 넘겼겠지!’
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접은 플레이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다른 랭커들은 눈치를 보면서 왕국 안에서 퀘스트를 깨고 있었다.
왕한테 합법적으로 영주 자리를 받기 위해서였다.
성이나 도시의 영주 자리만 얻으면 일단 그 순간부터 막대한 권한이 주어졌으니까.
세금, 병사, 시설, 특별 퀘스트…… 다른 랭커들보다 몇 배는 앞서갈 수 있었다.
그러나 케인은 그런 식으로 할 생각이 없었다.
-왜 왕국한테 굽신거려서 영주 자리를 받아내냐? 새로 얻어내면 되지!
에랑스 왕국이나 잘츠 왕국과 달리, 오스턴 왕국은 내전으로 인해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요새에 가서 무력으로 점령을 해도 병사들이 달려오지 않았다.
케인은 그 점에 주목했다.
이 요새를 시작으로, 다른 요새도 더 점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력만 더 키우면 그가 오스턴 왕국을 잇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엄청나게 먼 길이겠지만…….
케인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언제나 과감한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 주변의 플레이어들에게 세금을 물리고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용병들을 고용하고 무기를 사서 다른 요새를 점령한다.
또 거기서 돈을 모으고, 또 요새를 점령하고…….
오크 부족을 공격하는 것도 계획 중 하나였다.
오크 부족은 언제든지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영역을 늘리려면 미리 없애둬야 했다.
그리고 저런 부족을 털면 나오는 것들이 매우 짭짤했다. 장비부터 시작해서 꽤 돈이 될 것이다.
케인은 옆의 길드원을 보며 물었다.
“방송 제대로 나오고 있지?”
“네.”
“좋아. 제대로 광고하자고.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 들리지?”
케인은 뚜둑거리며 주먹을 풀었다.
지금 이 오크 부족 공략은 방송으로 나오고 있었다.
레드존 길드가 주변 플레이어들한테 세금을 물리는 걸로 욕을 먹고 있었지만, 방송은 별개였다.
인성과는 상관없이 재미가 있고 화제만 되면 사람들이 몰렸다.
레드존 길드를 욕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오크 부족을 공략하는 건 궁금해했다.
케인은 발 빠르게 광고도 몇 개 달았다.
이 오크 부족 공략은 한동안 화제가 될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 화려한 마법! 레벨 높은 플레이어들의 스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부족장 처리까지.
오크 부족들에게서 아이템도 뜯고, 방송으로 수입도 올리고…….
일거양득이었다.
* * *
콰쾅!
목책이 부서지자 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방패를 든 전사 플레이어들이 뛰어들었다.
-방패 치기!
-대지의 일격!
콰지직! 콰직!
길에 있던 오크 전사들이 튕겨 나갔다. 중갑 전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비켜라!”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쾌감! 무거운 장비를 잔뜩 껴입는 중갑 전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취익, 막아라! 막아라!”
창을 찔렀지만 방패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레드존 길드원들이 달려들자 반격하며 오크들은 힘없이 밀려 나갔다.
플레이어들이 목책 사이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간 순간!
푸확! 푸화악!
[실명 저주에 걸렸습니다!]
[이동 속도 감소 저주에 걸렸습니다!]
길드원들 위로 쏟아지는 저주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크 주술사들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달려들던 전사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저주를 그대로 맞아버렸다.
오크 주술사들이 생각보다 레벨이 높았는지, 저주를 튕길 수 없었다.
“이, 이런!”
“앞이 안 보여!”
“취익, 죽여라!”
“취익! 인간 놈들을 돌려보내지 마라!”
아까 튕겨 나가던 오크들과는 덩치부터가 다른, 좋은 장비를 입은 오크 정예 전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함정이었다.
약한 척을 해서 끌어들인 다음 공격!
오크 부족이라고 만만하게 봤다가 당하게 생겼다. 전사들은 기겁해서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캉! 카캉!
“이…… 이런……!”
몸이 느려진 데다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붉은 오러가 넘실대는 오크들의 공격을 막기가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몇 대 맞고 피가 깎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케인은 혀를 차며 명령했다.
“마법사들! 공격해라! 길을 만들어! 사제들은 축복을 걸어!”
내버려 뒀다가는 들어간 길드원들이 죽어 나갈 게 분명했다.
돈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야 죽어도 됐지만 길드원은 아니었다.
판타지 온라인의 사망 페널티는 꽤 큰 편이었으니까.
‘생각보다 꽤 하는군. 머리도 좀 쓰고.’
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언덕 위에서 오크 마을을 둘러보았다.
목책 뒤에서 숨어 있다 나온 것도 나온 것이었지만 오크 정예 전사들은 꽤 레벨이 높아 보였다.
함정도 팔 줄 알고 레벨도 높은 오크들. 예상했던 것보다 강했다.
“좋아. 내가 나서야겠군.”
대검을 들고, 케인은 씩 웃었다.
슬슬 방송이 관심을 받을 대로 받았을 테니, 이제 제대로 인상을 남길 시간이었다.
그도 나름 랭커에 들어가는 플레이어.
여기 오크들이 강해 봤자 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뒤에는 길드의 사제들과 마법사들, 전사들까지 있었다.
거의 차려놓은 밥상!
“크아아아아아!”
-사자의 외침!
그 소리를 들은 오크들이 귀를 막으며 자세를 숙였다.
사자의 외침. 케인의 범위 스킬 중 하나였다.
듣는 순간 일시적인 마비를 주는 스킬. 마법사나 궁수를 상대할 때 좋은 스킬이었다.
“자! 나를 따라와라!”
케인은 멋있게 자세를 잡으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길드장이 오자 길드원들은 환호하며 케인 옆에 붙었다.
부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반쯤 부서진 목책이 대검에 갈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