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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27화 (27/1,826)

§ 나는 될놈이다 27화

2500이 된다고 딱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2500이 된다고 꼭 새로운 스킬이 나온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느낌이 달랐다.

마라톤에서 목표로 한 중간 지점에 도달한 느낌?

딱 떨어지는 숫자란 건 그런 느낌이었다.

‘이야. 그래도 뿌듯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행운을 5 올리는 순간!

[행운이 2500이 되었습니다.]

[특수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전설 직업-<아키서스의 화신(化身)> 전직이 시작됩니다.]

“뭐?”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눈앞에 주르륵 나온 창들은 충격적이었다.

“뭔 전설 직업이야? 싫어, 인마! 취소! 취소!”

<전설 직업-아키서스의 화신 전직 퀘스트>

아키서스는 행운과 도박꾼의 신이다.

행운이 필요할 때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아키서스를 찾지만, 아키서스는 다른 신들과 달리 신도들의 부름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사제도 없고, 신전도 없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의 신 아키서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간은 끝났다.

당신은 필멸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행운을 갖고 있다. 아키서스가 인간으로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는 당신. 아니, 아키서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키서스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수긍하라!

보상: 아키서스의 화신으로 전직.

“시스템이 미쳤나? 이런 식의 전직 퀘스트가 어디 있어! 게다가 전설 직업인데!”

전설 직업은 몇십 단계의 복잡한 퀘스트 정도는 있어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아키서스의 화신이란 직업은 그냥 조건 충족했다고 덜컥 주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행운 2500을 찍는 동안 직업을 하나도 갖지 않는다는 게 ‘그냥 조건’은 아니었지만…….

“거절한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피를 토하고 넘어졌을 광경!

전설 직업이 굴러 들어와도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키우려는 고집!

그러나 그 고집도 시스템 앞에서는 무력했다.

[전직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아키서스의 화신으로 전직합니다.]

“뭐 이런 개 같은……! 왜 거절을 못 해!”

[전설 직업으로 전직했기에 스탯 보너스를 얻습니다. 전 스탯이 50 증가합니다.]

[전설 직업으로 전직했기에 명성 스탯이 활성화됩니다. 명성 500을 얻습니다.]

[신앙 관련 직업을 얻었기에 신성 스탯이 활성화됩니다.]

[교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특정 인물들의 친밀도가 증가합니다.]

[아키서스의 변덕 스킬을 얻었습니다.]

[신의 품격 스킬을 얻었습니다.]

[행운의 기도 스킬을 얻었습니다.]

etc, etc…….

주르륵 쏟아져 나오는 창들.

이제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키서스의 화신으로 전직한 것이다.

“…….”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태현의 몸이 번쩍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자 지수는 당황했다.

표정만 보면 마치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

“나 전직됐다. 강제로.”

“네? 정말요? 뭐로 됐어요?”

“전설 직업…….”

“……!”

지수는 깜짝 놀랐다.

“전설 직업이요? 그거 정말 좋은 거 아니에요?!”

지수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녀를 이제까지 계속 도와준 태현이 잘되는 건 그녀에게도 기뻤다.

물론 지금 태현에게 축하는 그냥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들렸다.

“직업 물어봐도 되나요? 어떤 직업인지?”

“……나 접는다.”

“네?”

“나 접는다고!”

“아니, 왜요?!”

“전설 직업 강제로 전직해서 접는다! 됐냐!”

그제야 지수는 태현이 예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자. 봐. 네가 일반 직업인데 일대일 대결에서 희귀 직업을 이겼어.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하겠지? 그런데 네가 영웅 직업인데 일대일 대결에서 희귀 직업을 이겼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직업빨로 이겼다고 할 거 아니야.

‘그게 진심이었어?!’

“안 돼요! 판타지 온라인 2는 캐릭터 삭제했다가 다시 만들려면 엄청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요!”

“알 게 뭐야!”

태현이 이렇게까지 멘탈이 깨진 건 드문 일이었다.

“나 먼저 로그아웃한다. 너도 네 할 일 해. 저기 파티 조합 괜찮으니까 같이 다니면서 레벨 업 하는 것도 괜찮겠지.”

“형? 형? 안 돼요! 기다려 봐요! 잠깐만! 형 캐릭터 삭제하면 난 연락처도 모르는데……!”

[김태현 님이 로그아웃했습니다.]

“야! 이 나쁜 놈아!”

지수는 진심을 담아서 소리쳤다.

‘캐릭을 삭제하더라도 밖에서 연락할 방법은 알려줘야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서운해졌다.

* * *

캡슐에서 일어나며, 태현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XX 같은 게임 시스템을 봤나! 뭐? 극한의 자유도? 뭔 놈의 극한의 자유도가 직업 거절도 못 해!”

아무리 욕을 해도 쉽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캐릭을 삭제해버려?’

그러나 캐릭은 쉽게 삭제할 수 없었다.

판타지 온라인 2는 캐릭을 삭제하고 다시 만드는 것에 엄격했다.

삭제하고 다시 만들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리는 상황.

-그 캐릭터가 좋든 싫든 네 캐릭터에 책임을 져라!

이게 판타지 온라인의 주장이었다.

여기서 1년이 지나면 랭커들은 정말 따라잡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다.

게다가 태현 성격으로 1년 동안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다.

판타지 온라인 2는 그만한 게임이었다.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하, 진짜. 하, 진짜…… 아, 이 개 같은…….”

그러나 태현의 불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똑똑-

“아들, 있냐?”

“있습니다. 왜요?”

문을 열고 들어온 김태산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걸 본 태현은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가 저렇게 웃을 때는 보통 뭔가 사악한 음모를 꾸몄을 때였으니까.

“……뭡니까? 뭘 했습니까?”

“내가 뭘?”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

태현은 점점 더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왜. 찔리냐?”

“뭐가 찔려요?”

“찔리는 게 없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봐라.”

“없는데요?”

“이 자식이 생각도 안 해보고!”

“없으면 없는 거지 뭘!”

“너 인마! 너 강씨네 순댓국밥집에서 뭐라고 했어!”

“……!”

태현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이 자식! 이제 털어놓는군!”

* * *

김태산은 등산을 좋아했다. 어느 날 동네 뒷산을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아는 얼굴이 그를 불렀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자네는 언제 봐도 건장하군.”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술은 좀 적게 마시게나.”

“네? 저 술 끊은 지 좀 됐습니다만?”

아내의 성화로 술을 끊은 김태산이었다.

“그래? 이상하네. 분명 자네가 술을 많이 마셔서 좀 헛소리를 한다고…….”

노인은 손가락을 머리 옆에 두고 빙빙 돌렸다.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떤 쳐 죽일 놈이 그런 헛소리를 퍼뜨리고 다닌답니까?!”

김태산은 울컥해서 외쳤다. 덩치도 산만한 사람이 분노해서 그렇게 외치자 노인은 움찔했다.

“아, 아니…… 사람 참. 진정하게.”

“진정하게 됐습니까? 멀쩡한 사람 이상하게 만들어놓고! 누굽니까! 당장 말하십쇼!”

“아니, 나도 누군지는 잘 몰라…… 강씨 순댓국밥집에서 밥 먹는데, 누가 자네에 대해서 떠들더라고. 그냥 들은 거야.”

“어떻게 생긴 놈인데요!”

“어…… 그러니까 말이야. 키는 자네처럼 크고…….”

“그리고요?”

“덩치도 자네처럼 컸어. 어깨가 딱 벌어졌지.”

“……그리고요?”

“생각해 보니 얼굴도 자네처럼 험상궂…… 아니, 크흠. 사내답게 생긴 얼굴이었지.”

“…….”

김태산은 핸드폰을 꺼내서 태현의 사진을 켰다.

“혹시 이렇게 생긴 놈입니까?”

“그래! 이 사람이야!”

“이놈 시키…….!”

감히 하늘 같은 아버지를 술주정뱅이로 몰아?!

쾅!

태풍처럼 집으로 돌아온 김태산은 서재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까?

말싸움이나 몸싸움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말싸움으로 태현에게서 이긴 적이 별로 없었고, 몸싸움은 이제 젊은 태현을 이기기 힘들었다. 게다가 아내까지 끼어들면…….

‘나만 구박받겠지.’

이렇게 된 이상 헛소문을 퍼뜨려?

그런데 딱히 퍼뜨릴 헛소문이 없었다. 게다가 태현은 그처럼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바리맨이라는 소문이 퍼져도 태연하게 고개 들고 나갈 사람이 태현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진짜 뻔뻔한 놈이라니까!’

게다가 태현의 헛소문이 퍼뜨려지면 결국 체면이 깎이는 건 태현의 아버지인 그였다.

생각하니 더 억울했다.

저놈은 온갖 깽판을 쳐도 손해 보는 게 없지 않는가! 저놈은 잃을 게 없었고 그는 잃을 게 많았다.

‘내가 반드시 이번에는……!’

태현이 싫어하는 게 뭘까?

아들의 약점을 진지하게 한 시간 넘게 고민하던 김태산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윤희!”

그의 약점이 그의 아내이듯이, 태현의 약점도 태현의 어머니였다.

실제로 태현은 어머니가 하라는 건 이제까지 거절한 적이 없었으니까.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놈! 두고 봐라!”

태현의 구겨질 얼굴을 생각하며, 김태산은 서재가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조용히 해요!”

“응…….”

물론 바로 멈춰야 했지만.

* * *

“거, 순댓국밥집 손님들이 입이 싸네요. 비밀도 안 지켜주고.”

“후후. 그래. 지금 실컷 좋아해 둬라. 아들아.”

“……?”

태현은 진짜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도발을 하면 아버지가 넘어와야 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다혈질인 그의 아버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뭘 꾸민 거야?’

“태현아?”

“어머니?”

“네 아버지한테 들었단다. 네가 게임으로 뭔가를 해본다면서?”

“네?”

“나는 몰랐는데, 들어보니 괜찮더구나. 요즘은 그것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다고 하고.”

프로게이머까지 가지 않더라도, 판타지 온라인 2의 랭커들은 개인 방송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세연처럼 스타성이 뛰어난 플레이어들은 그냥 연예인과 동급인 수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이 어미는 게임 같은 건 단순히 취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도 직업이 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단다.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는 거잖니.”

“아니, 어머니, 그게 아니라요…….”

태현에게 게임은 단순히 취미였다.

판타지 온라인 1을 할 때도 엄청 많은 제안이 왔었다.

-우리 같이 길드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방송해 보자.

-판타지 온라인 1의 프로게이머 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너를 꼭 넣고 싶다! 무슨 자리든 줄 테니 꼭 와다오!

물론 태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게임은 놀려고 하는 거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마찬가지 이유로 개인 방송도 하지 않았다.

다른 랭커들은 하나하나 개인 방송을 할 때 태현은 개인 방송 같은 건 하지도 않고 랭커들을 썰고 다녔다.

덕분에 태현의 팬들은 태현에게 썰리는 랭커들의 개인 방송으로 태현의 모습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쪽으로 가보라니.

태현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저는 그냥 이거 놀려고 하는 건데…….”

“놀려고 하는 거라면 시간을 줄이렴.”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시간을 쏟는다는 건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지. 그만큼 좋아한다면 그쪽에서 길을 발견해 보렴.”

“길이라는 건, 그러니까…….”

정윤희는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김태산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게임 내에서 순위권 안에 들어서 유명해지거나, 아니면 재밌게 개인 방송을 해서 방송 순위권 안에 들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게임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이 정도는 되어야 길을 찾은 거 아니겠냐?”

태현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그걸 본 김태산은 속이 시원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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