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5화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길드도 아니었고 파티에 들어오라는 거였으니까.
파티야 그냥 필요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태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싸의 본능!
‘이러다가 계속 같이 다니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룹으로 지내면 막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돌아다니는 게 편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두셋 정도까지가 한계!
“저기요?”
태현이 대답이 없자 최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초대하세요. 들어갈 테니까.”
‘생각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네.’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해하기 쉬웠지만, 태현은 캐릭터를 약하게 키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약하다고 알려진, 혹은 비효율적이어서 안 좋다고 알려진 캐릭터들.
이런 캐릭터들을 잡고 최선을 다해 강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을 뿐.
처음부터 강한 캐릭터라고 알려진 걸 키우는 것보다 그게 더 뿌듯하고 재미있었으니까!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대장장이도 결국 그런 식으로 해서 강해지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플레이는, 엄청나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강한 캐릭터가 왜 강한 캐릭터이겠는가?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까 강하다고 알려진 것이다.
약한 캐릭터는 그게 불가능해서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했고.
실제로 태현은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대장장이로 다른 놈들을 사냥하기 전까지 정말 피나는 고생과 노력을 해야 했다.
태현은 솔직히 자신이 있었다. 다른 강한 캐릭터를 키웠으면 진작에 1위를 찍었을 자신이.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거 괜히 걱정한 건가?’
판타지 온라인 1에서야 만렙을 찍으면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드니 느리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2에서는 만렙도 없었다.
그래서 시작할 때 살짝 걱정을 했었다.
태현은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하지 않았는가.
일반인이면 모를까, 순위 경쟁을 노리는 랭커들한테 그 정도 시간이면 차이를 엄청 벌렸을 시간이다.
그런데도 태현은 굳이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직업도 안 고르고 스탯은 오로지 행운에!
‘못 따라잡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내가 거기까지인 거다.’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다 가는 길은 안 간다!
어찌 보면 변태스러울 정도의 집념!
그런데…….
생각보다 성장이 훨씬 빨랐다.
‘행운 스탯이 생각보다 쓸모가 있어.’
다른 스탯, 힘이나 민첩 같은 스탯들이 워낙 좋아서 플레이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
행운은 충분히 좋은 스탯이었다.
스탯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라 행운에 투자하는 사람이 없을 뿐.
게다가 다른 스탯들은 올리면 바로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힘을 몇백 올리면 공격력이 미친 듯이 올라갈 것이다.
민첩을 몇백 올리면 이동속도나 공격속도가 미친 듯이 올라갈 것이다.
그에 비해 행운은 몇백을 올려도 뭔가 이거다! 싶은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천 단위로 넘어가자 효과가 무시무시해졌다.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던 확률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행운을 올려주는 아이템을 초보자 마을 앞에 던져놓은 덕에 일어난 나비효과!
태현은 전혀 몰랐다.
지금 토끼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사이에, 제작진들이 필사적으로 토끼발을 삭제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아오, 이걸 대체 왜 넣어가지고!
-그냥 전부 인공지능한테 맡기자고 했잖아요!
-이 마을 어차피 플레이어들도 적게 올 텐데, 이 정도 보너스는 괜찮을 줄 알았지! 누가 알았겠냐고! 야, 솔직히 저 레벨 동안 전직도 안 하고 토끼만 잡고 있는 놈이 이상한 거 아니냐?!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가 선택한 길로 결과가 나온다는 건 기뻤다.
그런데 너무 쉽게 결과가 나오는 것 같자 살짝 아쉽기도 했다.
‘이건 그냥 평범하게 강한 캐릭터잖아?’
최하준과 최하영 파티의 레벨은 아마 30 후반에서 40 초반 정도 될 것 같았다.
태현은 그들이 입은 아이템에서 그들의 레벨을 짐작했다.
태현의 레벨은 25. 그런데 파티원들은 엄청나게 놀라워했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파티 초대까지.
‘내가 보여준 게, 적어도 레벨 40~50은 넘겨야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란 거겠지?’
태현이 생각해도 그의 회피율과 치명타율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니, 자만하지 말자. 전직을 안 하면 직업 스킬을 얻을 수 없으니까. 나중에 차이가 점점 벌어질 거야. 지금 조금 잘나간다고 흐뭇해할 때가 아니지.’
전직을 안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믿을 건 스탯뿐!
태현은 어디 토끼발처럼 다른 스탯을 올려주는 아이템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파티에 들어간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험치가 공유되고, 희귀 이상의 아이템은 얻기 전에 서로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정도?
판타지 온라인 2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의 정보는 매우 보기 힘들었다.
파티는 물론이고 길드에 들어간다고 해도 플레이어의 정보가 공유되지는 않았다.
직업, 아이템, 스킬…… 이런 정보는 하나하나가 가치가 있었다.
초보자들이면 모를까, 랭커들 같은 경우에는 다른 랭커들과 순위 경쟁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떤 직업이고 어떤 스킬을 갖고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약점이 있는지는 군침이 도는 정보였다.
이런 정보만을 모아서 파는 곳도 따로 있었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이런 임시 파티 사냥에서 서로 자세한 정보를 묻지는 않았다.
믿을 수 있는 건 본인의 말뿐!
어차피 레벨이나 직업을 속여봤자 실제로 사냥에 들어가면 들통이 나게 되어 있었다.
레벨 50이라고 했는데 레벨 10짜리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피가 반이나 깎이면 그게 말이나 되겠는가.
“파티 들어오셨네요.”
“이야. 든든하네.”
“일단 오크 머리부터 챙기자! 퀘스트 깨야지.”
최하준은 오크의 시체에게 다가갔다. 태현이 학살을 했지만, 그도 두 마리는 잡았다. 다른 파티원들이 한 마리를 잡았으니 총 세 마리는 그들이 잡은 셈.
“오크의 머리가…… 없네?”
“나도 없어.”
“나도 없는데……?”
그걸 본 지수가 속삭였다.
“머리 잘라야 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섬뜩한 소리를 하는 거야? 원래 이런 퀘스트 아이템은 그냥 나오는 거라고.”
이런 걸 직접 잘라서 가져가야 한다면 플레이어 중에서 절반은 포기할 것이다.
잔인한 설정은 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 법!
“머리가 없어요?”
“네. 안 나오는데…… 야, 이거 골치 좀 아프겠다. 드랍률이 낮은가 봐.”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역시 잘츠 왕국의 퀘스트는 만만하지 않았다.
드랍률. 아이템이 떨어지는 확률.
오크 머리 10개를 모아오라고 하면 간단하게 들리지만, 오크 머리가 잘 안 나오는 희귀한 아이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오크 머리 10개를 얻기 위해 100마리를 사냥해야 할지, 1,000마리를 사냥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각자가 10개씩 가져가야 하는 퀘스트!
지수가 다시 속삭였다.
“우리는 저거 필요 없죠?”
“그렇지. 대신 더 빡세지…….”
-오크 부족의 마을을 파괴하고 부족장의 머리를 가져와라.
‘이게 말이야 개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레벨 30도 안 되는 둘한테 줄 퀘스트는 아니었다.
“저…… 태현 씨가 잡은 오크도 확인해 봐도 됩니까?”
“그러시죠.”
말과 함께 태현은 오크들에게 다가갔다.
[오크 머리(2)를 획득했습니다.]
[오크 머리(4)를 획득했습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메시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크 한 마리한테서 왜 머리가 2개, 4개가 나와……?’
행운 중첩으로 인한 드랍률 폭증!
태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주는 대로 챙겼다.
“머, 머리가 6개……?”
“여기는 3개 있어!”
순식간에 10개가 채워졌다.
“그냥 내가 재수 없었던 건가?”
최하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잘 나오는 아이템인데 3마리를 잡았는데 하나도 안 나올 줄이야.
그들은 태현의 행운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기…….”
최하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크 머리 10개 채우셨으면 남은 건 저희가 좀 챙겨도 될까요? 골드 필요하면 드릴게요.”
최하영은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원래 파티장에 사제 정도 되면 ‘파티니까 아이템 좀 나눠 가집시다!’ 하고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상대가 이렇게 공손하게 나오면 친절해지는 게 태현이었다.
“그러시죠.”
“어? 돈 안 받아요?”
“뭘 돈을 받아. 저게 뭐 얼마나 하는 거라고. 아까야 파티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파티로 움직이는데 이런 거 하나하나 일일이 돈으로 따져서 달라고 하면 안 되지. 괜히 뒤에서 칼 맞는다고.”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를 잡은 건 다 태현이었으니까 그녀가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질투!
‘저 사람들한테 잘해줘서 뭐가 좋다고…….’
그러나 태현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오크 머리를 구하려는 플레이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 * *
“아니, 이 오크 놈들은 대가리가 없어?! 지금 몇십 마리짼데 머리가 안 나와! 머리가!”
“아오! XXXX!”
잘 나오지 않는 아이템들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
여기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머리를 가져오라는 퀘스트를 이 주변 영지에서 일하는 기사한테 받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오크 머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크 머리 파는 사람 없냐?”
“이걸 누가 팔겠냐? 다 자기가 퀘스트 깨는 데 썼겠지.”
“나 돌아버릴 거 같다.”
김병국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둘은 현실에서도 친구였다. 말 그대로 게임 폐인 콤비!
김병국은 레벨 56, 최은철은 레벨 51. 약간 늦게 시작한 것 치고는 매우 빨리 올린 셈이었다.
게다가 둘 다 희귀 직업이었다. 김병국은 강철 도끼 전사, 최은철은 화염 전문 마법사.
“아, 영지 친밀도 올리려면 이거 깨야 하는데…….”
“어? 저기 파티 있다.”
“어쩌라고. 파티 말고 오크 찾아. 오크.”
“아니, 잘 봐봐. 저거 오크 머리 아냐?”
태현과 최하준 파티는 이제 오크 머리가 넘쳐나서 버리고 있었다.
모두가 10개를 채웠는데도 나오는 것이다.
“???”
“저거…… 뺏자!”
1초도 고민하지 않고서 나오는 방법!
상대는 딱 봐도 레벨이 낮아 보였다. 8명이나 있었지만 이 정도면 레벨 차이로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을 성격으로 분류한다면, 그들은 매우 질이 나쁜 플레이어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PK(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해서 죽이는 것)를 하는 타입!
“야!”
“……?”
“오크 머리 전부 내놔라. 100개 채워주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김병국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서 오만하게 말했다.
둘은 이들과 받은 퀘스트가 달랐다. 당연히 가져가야 하는 머리 숫자도 달랐다.
둘이 합해서 무려 100개!
“뭐라는 거야?”
“아니, 너희들이 뭔데 달라고 하는 건데?”
피식-
김병국은 웃었다.
“이해력이 딸리네.”
-폭발적인 힘!
-도끼 투척술!
스킬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한 공격!
그 공격을 그대로 맞은 파티원이 순식간에 즉사 직전까지 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법사의 화염 화살!
“크아악!”
“한 명 처리했고.”
“……!”
이제야 파티원들은 상황 파악이 됐다.
저 둘은 처음부터 PK를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오크 머리를 뺏기 위해서!
“얌전히 내놓을래, 아니면 다 죽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