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7화 (17/1,826)

§ 나는 될놈이다 17화

‘영주를 만나라고?’

판타지 온라인 2는 계급이 있었다.

왕, 그 밑에 고위 귀족인 도시의 영주(성주), 그 밑으로 귀족, 또 그 밑으로 기사들…….

NPC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도 퀘스트를 깨면 그런 계급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귀족 자리를 얻으면 혜택이 따랐다.

도시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쩔쩔맨다거나, 상인들이 알아서 좋은 걸 바친다거나…….

하위 귀족만 얻어도 이 정도인데, 영주나 성주 자리를 얻으면 그 이득은 상상을 초월했다.

NPC들의 반응을 떠나서, 명령이 가능했고, 세금을 걷을 수 있었으며, 도시나 성 주변 시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지금 랭커들은 성주나 영주 자리를 얻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도 영주 자리는 대단했지…….’

모두가 도시나 성을 갖고 싶어 했다. 갖고만 있어도 돈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판타지 온라인 2가 1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진 걸 봤을 때, 영주 자리 하나만 얻어도 평생 놀고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자네 정도라면 만날 만하지. 준비가 끝나면 나한테 말하게. 영주님은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예.”

태현은 대충 겉모습을 점검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이럼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물론 타이럼 사냥꾼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덩치 큰 험악한 산적으로 보이겠지만.

“준비됐습니다. 가죠.”

“그래! 따라오게나!”

* * *

‘오, 제법…….’

태현은 내성 안을 걸어가며 감탄했다.

사실 타이럼시는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다른 왕국의 도시는 말 그대로 ‘도시’다운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 큰 상단의 건물이나, 마법사의 마탑, 뛰어난 예술 작품, 제작 직업들의 길드들.

그러나 타이럼시는 그런 게 없었다.

있는 건 근육질의 험악하게 생긴 타이럼 사냥꾼들과 그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 정도.

다른 왕국의 NPC들이 괜히 잘츠 왕국을 야만인들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산악 지대에 위치한 소국인 데다가 저런 식이니…….

그렇지만 내성 안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장식이나 그런 건 없었지만 흰색으로 잘 칠해져 있어서 깔끔했다.

도시 주변에는 병사 대신 자유로운 복장의 타이럼 사냥꾼들이 있었지만, 내성 안에는 병사들이 보였다.

‘저건 꽤나 질이 좋은 금속 갑옷 같은데. 단순히 철로만 만든 게 아닌 것 같아.’

태현은 바로 병사들의 장비를 알아보았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대장장이로서 온갖 아이템을 만져본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병사들의 갑옷 색이 살짝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재료를 눈치챈 것이다.

‘딱 봐도 꽤나 레벨이 높아 보이는데. 다른 곳도 병사들이 이 정도로 레벨이 높으려나?’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쾅!

문이 열리고 넓은 공간으로 들어가자 잘 무장한 병사들이 보였다.

“팔론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어거스트! 잘 지냈나!”

쩌렁쩌렁한 두 남자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하게 울렸다.

태현은 귀를 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 이리 영주 목소리가 시끄러워?’

짐승 가죽으로 덮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대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핏줄이 솟아 나온 근육질의 팔.

영주면 귀족인데 입고 있는 옷은 사냥꾼의 옷 같은 모습이었다.

태현은 작게 속삭였다.

“영주님 맞습니까?”

“팔론 백작님? 아. 옷 때문에 그러나? 팔론 백작님은 우리와 같은 사냥꾼 출신이시지. 전장에서 세운 공으로 폐하에게 영지를 받은 거야. 어때, 자네도 슬슬…….”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아오!’

슬슬 욕이 나올 것 같았다. 이게 사냥꾼이야, 스토커야?

“됐거든요?”

둘이 떠들던 도중 백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 기특한 모험가인가? 가까이 오게.”

태현은 바로 입을 다물고 팔론 백작에게 다가갔다.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는가.

그는 태현의 팔을 잡더니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아주 강력한 힘으로.

“아, 아야! 아야야!”

“생각보다 힘이 별로군? 더 훈련을 하게! 젊은 친구가 이래서야 되겠나!”

“하하, 팔론 백작님! 백작님과 비교한다면 누가 괜찮겠습니까!”

“하하, 어거스트 이 사람! 아부하는 솜씨는 여전하군! 나도 늙었는데 말이야!”

늙기는 무슨. 지금 당장 무장하고 전장에 나가도 통할 것 같았다.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산적같이 생긴 사람도 귀족은 귀족.

태현은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얼얼한 팔을 매만지며, 태현은 혓바닥을 놀렸다.

“아닙니다! 영주님의 강철 같은 근육을 보니 젊었을 적에는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팔론 백작이 좋아합니다.]

“그래? 하하하. 이거 쑥스럽구만. 그래, 내가 젊었을 때 오크들이 나를 많이 무서워하기는 했지. 내가 이 팔로 오크들 부족을 쓸어버렸단 말이야! 내가 그 전공으로 영지를 받았지. 폐하도 나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하시네. 말 위에 올라타서 혼자 오크들을 상대로 돌격하던…….”

‘이거 미친놈 아니야?’

살아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네도 그런 경험을 한 번 해보면 좋겠군. 그러면 많이 배우는 게 있을 걸세.”

차라리 죽으라고 말을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 렇군요. 가능하면 해보겠습니다.”

그 이후로 태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잘츠 왕국은 산악 지대에 위치한 소국이지만, 주변에 자꾸 나타나는 떠돌이 오크 부족들이나 다크 엘프들을 상대하느라 전투력은 다른 왕국에 비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거기에 쓰는 돈 때문에 비교적 가난하다는 이야기.

현재 잘츠 왕국의 왕도 팔론 백작처럼 근육질에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귀중한 정보였다. 태현은 귀를 크게 열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얼굴도 자네처럼 위엄이 좋고 풍채가 있으시지.”

팔론 백작이 말하자 바로 어거스트가 끼어들었다.

“하하, 백작님도 폐하와 많이 닮으신 편입니다!”

“그런가?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긴 하지! 하하하!”

태현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잘츠 왕국의 왕은 태현과 생김새가 닮았다.

팔론 백작은 잘츠 왕국의 왕과 생김새가 닮았다.

그렇다면?

태현은 팔론 백작과 생김새가 닮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런 XXX…….’

그가 비록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이 산적 두목 같이 생긴 인간과 닮게 생겼다고!?

NPC한테 이런 굴욕감을 느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 저는 안 닮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찌 백작님의 풍채를 조금이라도…….”

“아니야! 사람이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지. 자네는 나나 폐하와 닮았어!”

팔론 백작은 등을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아주 닮았네! 아들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아!”

‘XX…….’

태현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외모 디스가 슬펐지만 뭐 어떠냐.

보상만 잘 받으면 되지!

“그래. 토끼들의 씨를 말렸다고? 그동안 우리 도시에 온 많은 모험가들에게 그 일을 맡겼지만, 대부분 조금 잡다가 도망치고 말았지.”

‘그건 그냥 이 도시가 구려서 떠난 건데…….’

물론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지. 모험가라는 놈들은 근성도 없고 쩨쩨한 놈들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자네를 보니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군. 자네한테는 사냥꾼들만 갖고 있는 뜨거운 심장과 큰 간덩어리가 있는 게 분명해!”

“타이럼 사냥꾼으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고집이 만만치 않더군요!”

“그래? 타이럼 사냥꾼으로 일할 생각이 없나?”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이제 영주의 힘까지 빌려서 당신을 타이럼 사냥꾼으로 만들려 한다…….

이제 어거스트가 스토커로 보이기 시작했다. 치사하게 영주까지 동원해?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친밀도를 쌓은 건 그였으니까.

이럴 때는 역시 넙죽 엎드리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물론 ‘백수에서 전직 안 하고 계속 갈 겁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걸 들었다가는 영주라도 화를 낼 테니까.

“그래? 아쉽군. 타이럼 사냥꾼이 싫다면 내 호위로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희귀 직업-귀족 근위병 전직 퀘스트>

귀족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귀족을 가장 옆에서 지키는 호위, 귀족 근위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려고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이상 쉽게 관둘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분명히 명예롭고 대가가 따르는 일. 모시는 귀족의 힘이 크면 클수록 근위병으로서의 자리도 커질 것이다.

보상: 귀족 근위병으로 전직.

다른 사람들은 찾지 못해서 안달이 난 직업들이 태현에게는 쏟아져 들어왔다.

‘이 직업은 무슨 간신 최적화 직업이냐?’

설명을 보니 영주 옆에 붙어서 한 재산 챙길 수 있는 직업 같았다.

물론 태현은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백수! 어떤 직업을 제안해도 백수! 무조건 백수!

팔론 백작은 태현이 거절하자 아쉽다는 듯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손뼉을 쳤다.

병사 몇 명이 낑낑거리며 보관함을 들고 왔다. 백작은 그 함을 열더니 안에서 묵직한 도끼를 꺼냈다.

태현은 순간 긴장했다. 저 양반이 설마 거절했다고 저걸 들고 덤비지는 않겠지?

“타이럼 사냥꾼도, 귀족 근위병으로도 일하고 싶지 않다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군. 명예를 아는 사람한테 돈으로 보상하는 건 모욕이겠지?”

“아니, 모욕 아닌…….”

“자, 받게!”

[오크 두개골 분쇄기를 얻었습니다.]

[힘이 부족해서 착용이 불가능합니다.]

[레벨이 부족해서 착용이 불가능합니다.]

주르륵 뜨는 상태창들! 현재 태현은 장착도 못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오크 두개골 분쇄기라니, 이름 참…….’

그래도 기대가 됐다. 영주가 직접 포상으로 주는 무기라니.

NPC의 지위가 높을수록 퀘스트 보상으로 주는 아이템이 좋지 않겠는가.

오크 두개골 분쇄기: 내구력 420/420, 공격력 160

스킬 ‘강타’ 사용 가능. 스킬 ‘전사의 분노’ 사용 가능. 스킬 ‘폭풍돌격’ 사용 가능. 스킬 ‘대지분쇄’ 사용 가능. 일정 확률로 위압, 공포 발동. 오크 상대로 데미지 1.5배.

레벨 제한 125, 힘 제한 500

팔론 백작이 젊은 시절에 오크들의 머리통을 쪼개고 다닐 때 쓰던 무기다. 자세히 보면 오크의 피가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쓰지도 못할 만큼 무겁고 강력하다.

<아이템 등급: 영웅>

“……!”

화려하게 주르륵 달린 옵션.

팔론 백작이 젊은 시절에 애용했던 무기답게 옵션부터 시작해서 스탯이 화려했다.

문제는…….

‘이거 내가 절대로 못 쓰는 무기잖아?’

레벨 제한이야 언젠가는 125가 된다고 쳐도, 지금 행운만 주구장창 올리고 있는데 힘 500을 언제 찍는단 말인가.

‘끄응…….’

그래도 일단 좋은 무기였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래 사이트에만 올려도 몇천만 원은 할 것이다. 전사 계열 직업들은 다들 탐을 낼 것이고.

“백작님! 그 무기를 주시다니요!”

“하하. 오랜만에 만난 명예를 아는 모험가에게 이 정도 선물은 줄 수 있지!”

“백작님의 아량에 이 어거스트, 다시 한번 감동했습니다!”

태현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에 두 남자는 감동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잠깐, 이거 팔아도 되나?’

백작이 선물한 무기를 판다고 해서 걸리지는 않겠지. 설마 백작이 그를 불러서 무기를 잘 쓰고 있나 검사하지는 않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