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화
“레벨 100까지 계속 저거만 잡으면 행운이 얼마까지 오르지?”
“어…… 계산해 봐야 알겠지만 이천은 무조건 넘을 겁니다.”
“100에서 스탯 하나가 이천이 넘는다고? 아무리 행운이라지만…….”
“어떻게 하죠? 지금이라도 수정할까요?”
“수정하려고 하더라도 이건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정기 패치 때 아니면 우리도 못 건드려. 인공지능이 괜히 인공지능이겠어?”
“그렇긴 하네요.”
“일단 다음 패치 때 수정하자고. 그때까지 너무 막 나가지 않기를 빌자.”
말끝을 흐리던 윤주환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외쳤다.
“아!”
“왜 또? 뭐 문제 있어?”
“아뇨, 아뇨. 아까 잘츠 왕국에 있는 전설 직업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잖아?”
“아니, 그런데 김태현이 이대로 계속 가면 전설 직업 조건을 충족합니다.”
“그런 게 있어? 지역 없이…… 아, 아키서스의 화신?!”
최명성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놀랐다.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니.
전설 직업들은 대부분 조건이 까다로웠지만 이건 특히 까다로웠다. 사실 그는 아키서스의 화신은 아무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버려지는 전설 직업으로 여겼던 것이다.
“네! 아키서스의 화신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행운이야 그렇다 쳐도 전직을 안 해야 하잖아.”
“지금 안 한 상태잖아요?”
“그거야 아마 토끼발로 스탯 올릴 때까지 올리려고 안 하고 있는 거겠지. 전직을 안 할 수는 없어. 아마 할 거야. 김태현이니까 대장장이나 그런 걸로 하겠지. 잠깐만, 행운을 그 정도 찍은 대장장이라면…… 강화 시스템도 바꿔야 하나…….”
윤주환은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둘은 알지 못했다. 둘 다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것을.
* * *
“활 좀 주시죠.”
“그,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아무리 NPC라고 해도 사람처럼 반응한다고요!”
태현이 어거스트에게 가서 다짜고짜 활을 달라고 하자 지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녀가 어거스트에게 말만 걸어도 어거스트는 시큰둥하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날씨 참 좋죠?
-흥!
-안녕하세요. 토끼 잡았는데 혹시 어디서 파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안 된다.
-안녕하세…….
-귀찮으니 저리 가라!
이게 무슨 초보자를 도와주기 위한 NPC인지 초보자의 혈압을 올리기 위한 NPC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어거스트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하! 역시 자네답군! 그래, 내가 인정한 남자라면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
“?!”
“활이 필요하다고? 활이 필요하다고 하는 걸 보니 타이럼 사냥꾼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아, 안 해요. 안 해.”
지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건 분명히 직업 전직 퀘스트인데?
“왜, 왜 거절해요?”
“타이럼 사냥꾼 하기 싫어.”
“일반이에요? 보통 저렇게 NPC가 제시하는 거면 희귀 직업이지 않아요?”
“희귀 직업이야. 근데 싫어.”
“영웅 직업 노리는 거예요? 너무 불확실하잖아요!”
“영웅 직업 노리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넌 네 앞가림이나 해라.”
태현의 말에 지수는 얼굴을 붉혔다.
“타이럼 사냥꾼은 보아하니 궁수 계열 직업 같은데, 하고 싶어? 조건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어거스트가 성격이 더럽긴 한데, 결국 끈기 있게 매달리면 되거든. 무슨 필요한 일 있는지 물어본 다음, 계속 해결해주면 친해질 거다.”
노가다!
뭐든지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였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대장장이로 랭커들을 꺾고 다닌 것도 결국 노가다가 그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한테 도움이 될까요?”
“타이럼 사냥꾼? 일반 궁수보다는 낫지 않을까? 일단 희귀 직업이잖아. 판타지 온라인의 직업은 딱 이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일반보다는 희귀가 더 쓸 만하니까…….”
“그러면 한 번 해볼게요!”
“그러든가.”
태현은 별 관심 없이 말했지만 지수는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활과 화살을 받은 지수는 시위를 튕겨보았다. 그 폼이 꽤나 익숙해 보여서 태현은 살짝 놀랐다.
“활 쏴본 적 있어?”
“네. 부 활동 해서요.”
“부 활동에 양궁부 있는 곳 드물지 않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상관없었다. 익숙하면 좋은 거겠지.
“화살 갖고 몇 발 쏴본 다음 실전에 들어가 보자.”
“저…… 감사합니다.”
“응?”
“이렇게 챙겨주셔서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저 컨트롤 못하는 거 보면 욕하고 가시던데…….”
“내 눈에는 너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 같이 못하는 걸로 보인단다. 그리고 난 컨트롤 못하는 사람한테 친절해. 불쌍하잖아?”
“…….”
어쨌든 간에 태현은 그녀에게 잘 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미소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만 빼면. 타인에게 저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저, 제가 레벨 10 되면 파티 끝인가요?”
“응? 파티 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은 없는데. 너한테 안 좋을 거야.”
“네? 왜요?”
“난 여기서 계속 토끼 잡을 거거든.”
“???”
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여기 토끼를요?”
“그래. 여기 토끼를.”
“왜요?”
“스탯 작업 좀 하느라. 근데 솔직히 효율적이지는 않아. 그러니까 괜히 나 따라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정석적인 레벨 업 하는 게 좋을 거야.”
“기, 기다렸다가 같이할게요.”
“뭐?”
“토끼를 계속 잡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토끼한테서 더 이상 토끼발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다른 곳에서 사냥하고 있다가, 그때 되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때 되면 제가 더 레벨 높을 테니까!”
태현은 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아무리 레벨 높아도 네 도움을 받지는 않을 것 같은데’나 ‘난 혼자 플레이하는 게 좋은데’ 같은 말은 저 순진무구하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니 잘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놈은 이래서 편하다니까.’
아마 바람 부는 가을에 나뭇잎 떨어지는 나무 밑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만 서 있어도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그에 비해 태현은 겉모습만 보면 불량배 역할에 가까웠다. 얼굴과 덩치가 딱…….
“알겠어. 미소년. 같이하자 이거지?”
“미, 미소년이 아니라 지수예요.”
“그래. 지수. 잠깐. 친구들은?”
“친구들은 게임 많이 하지도 않고…… 꼭 걔네들하고만 같이 해도 되는 건 아니니까요!”
“너 걔네들이랑 같이하려고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냐? 뭐, 상관없나. 알겠어. 일단 활부터 쏘러 가자고. 스킬창 켜봐.”
태현은 말과 함께 본인의 스킬창도 켰다.
판타지 온라인은 스탯도 중요하지만 스킬도 중요했다.
기본 스킬, 특정 직업만 배울 수 있는 직업 전용 스킬, 특정 퀘스트로 배울 수 있는 퀘스트 전용 스킬, 기본적으로 갖고 시작하는 일반 스킬…… 분류는 다양했다.
초급 검술 3 (15%)
초급 요리 1 (14%)
초반인 데다가 한 게 별로 없어서 기본 스킬은 한정적이었다.
‘요리가 기본 스킬이긴 한데 왜 오른 거지? 아. 토끼발 요리한 거 때문에?’
요리: 각종 조리로 식재료를 음식으로 만드는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다양한 요리가 가능해진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 스킬은 태현의 밥줄이었다.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고른 탓에,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스킬 숙련도를 더 높일 수밖에 없었다.
기본 검술을 정말 미친 듯이 올리고, 그가 익힐 수 있는 스킬이란 스킬은 다 익히고 숙련도를 올렸다.
그 노가다를 생각하니 속이 쓰려졌다.
이번 2에서도 그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전직도 안 할 생각이었으니 더더욱.
‘요리, 검술. 좀 올려놔야겠군. 요리를 할 곳 있나?’
요리는 얼핏 보면 별로 쓸모가 없어 보였지만, 후반으로 가면 매우 강력한 스킬이었다.
요리로 만들어진 음식은 일시적인, 혹은 영구적인 버프를 주었다.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요리사는 어느 길드나 데려가고 싶어 했다.
판타지 온라인은 제작 직업들도 충분히 밀어주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태현이 생각에 잠긴 동안 준비를 끝낸 지수가 입을 열었다.
“켰어요.”
“활 들어서 몇 발 쏴봐. 아마 궁술이 생길 거야.”
“생겼어요!”
“좋아. 가자고. 나 맞추지 마라?”
“안, 안 맞출 거예요. ……아마.”
* * *
태현은 다시 놀랐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너…… 재주가 있었구나?”
빠르게 뛰어다니는 토끼의 눈을 정확히 맞추다니!
치명타가 터졌다는 알람을 본 지수는 그녀도 놀란 것 같았다.
“저, 저도 놀랐어요.”
“잘됐네. 적성 찾았으니까. 어거스트한테 가자.”
“네?”
“가서, 뭐 부탁할 거 없냐고 물어봐. 나야 토끼 학살하고 다니면서 친밀도 강제로 쌓아진 거지만, 너는 그렇게 할 필요 없잖아. 퀘스트 깨면서 친해져.”
“네!”
어거스트는 지수를 보자 얼굴을 찌푸리고, 태현을 보자 얼굴을 풀었다.
“무슨 일이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싶어서 왔습니다.”
“오! 마침 잘됐군. 도시 밖에 요즘 늑대가 들끓는다고 말이 많네. 우리 타이럼 사냥꾼들에게 퇴치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지. 앗, 그러고 보니 자네도 훌륭한 타이럼 사냥꾼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지?”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아, 안 한다니까!”
“자네가 부정하고 있지만 자네는 이미 훌륭한 타이럼 사냥꾼이야! 누가 여기서 이만큼 토끼를 사냥하겠나! 시민을 생각하는 희생정신! 그야말로 타이럼 사냥꾼!”
행운 올리려고 했던 짓이 이렇게 귀찮아질 줄은 몰랐다. 태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걸 또 지수는 존경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가자. 늑대 잡으러.”
<늑대 사냥>
어거스트는 신뢰하는 당신에게 늑대 사냥을 맡기려고 한다. 타이럼 사냥꾼에게 들어온 의뢰를 당신한테 부탁했다는 건 그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증거. 실패하거나 게으르게 처리할 경우 어거스트가 많이 실망할 것이다.
늑대 : 0/20
퀘스트 보상: 어거스트의 친밀도 증가. ???
???로 뜬 건 아마 적은 양의 은화나 초보자용 아이템일 것이다.
친밀도에 따라 주는 게 달라지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친밀도 올리다가 나중에 강제 전직 되는 거 아니야?’
강제로 전직시키게 될 것 같으면 바로 친밀도를 깎는 한이 있더라도 깽판을 칠 생각이었다.
‘아니, 차라리 지금 하는 게 나으려나…… 얘가 있어서 안 되겠군.’
퀘스트를 고의로 실패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해가 많았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라 지수한테까지 피해가 가는 것이다.
“일단 늑대가 너한테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텐데, 레벨 업 좀 하고 가자. 10 넘어서 전직해도 괜찮지?”
“네! 희귀 직업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죠!”
지수는 태현이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넌 거리 두고서 토끼 맞춰라. 혹시 너한테 달려가는 놈 있으면 소리 질러.”
지수는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파티 플레이의 즐거움이구나.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치명타가 연속으로 터졌습니다! 데미지가 중첩됩니다!]
“어…… 다른 토끼 쏠까요?”
태현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치명타가 너무 자주 터지고 있었다. 토끼가 강하기는 했지만 저레벨 몬스터였다. 치명타가 연속으로 터지면 지수가 활을 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아니. 내가 좀 살살 때려볼게.”
“그런 게 가능해요?!”
“급소 아닌 곳을 때리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