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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32화 (최종화) (132/132)

#외전 2

열 번째 생일파티 - 실비아 편(2)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호흡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과장께서 한 말, 사실이니?”

“…네.”

“정말 화가 나서, 괴롭힐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건 아니고…….”

“그럼?”

어쩐지 내가 상처받았을까 봐 굉장히 걱정하는 눈빛이다. 그게 아닌데. 역시 거짓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모님을 욕보이니까…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그럼 그 말을 한 아이가, 네가 마음에 뒀다던 그 아이고?”

“사실은…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그랬어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 곳에나 발설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어머니가 그러셔서… 거짓말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나는 죄스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고 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으나, 두 분이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조금 초조해졌다.

“실비아.”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조금 화내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어주신다.

“그건 타인의 흉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나쁜 소문을 퍼트리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어. 우리 실비아가 왜 아카데미에서 있던 일을 말해주지 않나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아니 뭐, 그건 딱히 할 말이 없어서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니 내 얘기를 매번 궁금해하는 어머니가 상처받으실까 봐 입을 다물었다.

“나쁜 말을 옮기지만 않으면 괜찮단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수업을 듣는지, 학생식당의 음식 맛이 어떤지 듣고 싶어.”

“…정말 별다른 특별한 게 없어요.”

“특별하지 않아도 돼. 친구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내게도 사소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정말 듣고 싶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는 어머니의 표정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옆에서 헛기침을 하더니 근엄하게 한 소리 덧붙인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상의해라.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니.”

“…네, 아버지.”

사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나는 거의 말을 안 하는 편인지라. 약간 태생적으로… 말이 없는 건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나이보다 꽤 조숙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드래곤의 피가 섞여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 아버지의 정체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나저나 우리 딸이 이렇게 우리를 생각해주다니. 기특하네. 너무 아버지를 닮아서 정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내 예상보다 착하게 자라주어서 고마워. 정말 뿌듯하다.”

“벼, 별말씀을 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우리 아기.”

“아! 다행히 늦진 않았나 보네.”

막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퍼지던 그때, 갑자기 식당 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른 셋, 또래 남자아이 둘. 그리고 아버지의 표정이 확 구겨지면서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매년 방해꾼이 등장하는군.”

나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드레스 치맛자락을 가볍게 붙잡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오세요,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또…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실비아. 칼라인이 너를 너무 보고 싶어해서…….”

“어마마마!”

블랑 제국의 세 분은 꽤 자주 뵙는 분들이었다. 불랑 제국의 황후 폐하는 어머니와 친구 사이이기도 하고 디저트 가게의 동업자라 더 자주 뵈었다. 황태자 전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라버니인데 꽤 예쁘게 생겨서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부끄러움도 잘 타서 나만 보면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배배 꼬는 그 모습도 꽤 귀여웠다.

“우리 실비아가 벌써 열 살이라니. 생일 축하해, 귀염둥이야. 이제 슬슬 제왕학을 배워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니? 우리 루즈 제국의 황제 자리는 언제든 비어있단다?”

그리고 함께 들어온 루즈 제국의 황제 폐하와 그 아들인 황자 전하 역시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해주신다.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편이었으나, 저분 덕분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들었다. 감사하게도 매년 내 생일 때마다 꼬박꼬박 방문하셨다.

게다가 두 제국에서 모두 나를 데려가려고 벌써부터 기 싸움을 했다. 루즈 제국에서는 황자 전하와 혼인해 황제 자리를 주겠다고 하고. 블랑 제국에서는 황후로 데려가고 싶다고 난리다.

물론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기만 했다. 어머니도 아직은 멀었다며 더 큰 이후에 생각해보겠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누님. 이거 내 선물.”

루즈 제국의 황자 전하는 나보다 두 살 아래로 황제 폐하를 쏙 빼닮았다. 블랑 제국의 황태자 전하가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루즈 제국의 황자 전하는 야생의 표범 같은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내게 붉은색의 작은 보석 상자를 건네주는 황자 전하가 아버지의 눈치를 슬쩍 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선물을 받으면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황자 전하.”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중에 꼭 내 부인이 되어줬으면 해.”

…어린 것이 벌써부터 저런 말을 다 하고. 루즈 제국의 황제 폐하는 그걸 또 굉장히 흐뭇하게 바라보며 잘한다고 박수를 친다.

“흠, 실비아. 나도 선물이 있다.”

그에 또 지지 않겠다는 듯 블랑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내게 푸른 보석 상자를 건넸다. 무슨 파란휴지 빨간휴지도 아니고. 두 제국의 색이 너무 뚜렷해서 선물이 섞일 일이 없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네가 갖고 싶다는 그 얼음꽃으로 만든 목걸이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작년 겨울방학에 처음으로 블랑 제국에 방문했을 때, 정원에 펼쳐진 얼음꽃을 보고 첫눈에 반했지.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상자를 열어보니 정말 그 얼음꽃 한 송이가 고스란히 담긴 목걸이가 우아한 자태로 놓여 있었다. 어머니도 갖고 계신 거긴 하지만. 내 것이 생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황태자 전하의 얼굴에도 승리의 미소가 감돈다.

“주인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나저나 그분, 또 온 건가.

내 생일이면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분이 한 분 더 계셨다. 그것도 어머니의 디저트 가게가 있고 내가 태어난 나의 고향 치치르자 왕국에서 이곳 마세티앙 제국까지 오시는 분. 아버지는 대놓고 싫어하셨고, 어머니는 난감해하는 분이었지. 두 제국의 황제 폐하들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분이었다.

“실비아. 안녕? 생일 축하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흡혈귀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그 면상을 들이대는 거냐.”

내가 이래서 생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축하해야 할 파티장이 늘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로 변해버리니까.

치치르자 왕국의 비플라츠 공작. 자신을 리브엘이라 불러달라던 저분은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예전부터 공작 각하에게 굉장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간혹 내 마력에 겁먹은 아이들이 나더러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곤 했다. 그때 내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웠고, 꽤 많은 상실감에 힘들어했었다. 작년 생일파티 때 공작 각하에게 그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더니, 내게 꽤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의지가 되기도 했었다.

“또 일 년 만에 뵈어요, 공작 각하. 축하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리브엘이라고 불러. 우리 사이에 경어라니.”

어머니가 말해줬는데, 원래 공작 각하가 어머니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을 것 같아서 깔끔히 포기하겠다고 하면서 네 딸을 달라고 했다나 뭐라나. 그것도 내가 태어난 그해에.

제국의 황제냐, 황후냐, 공작 부인이냐. 작위도 없는 졸부이자 드래곤의 딸로 태어나, 본의 아니게 세 나라의 대단한 분들에게 구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파이. 그래도 우리 아기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이잖아요. 다들 앉아요. 식사를 넉넉하게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오신 김에 함께 식사해요.”

어머니가 타이르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무뚝뚝하시지만 아버지가 내 일에 관해서 유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던 때는 내 생일 날 뿐이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모였을 때. 그것도 내게 접근하려는 남자들이 있을 때.

…아까도 내가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고 했을 때, 집요하게 캐물었지. 내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지원해주기만 해도 한발 물러나서 지켜보기만 하던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가 두 눈에 불을 켜고 경계하는 건… 남자 문제인가? 어머니가 어렸을 때도 남자 문제는 굉장히 보수적으로 굴었다던데.

지금도 굉장히 초조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모인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설마 우리 아버지가 그 유명한 딸바보라는 건가?’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주는 만큼의 애정을 내게 퍼붓진 않았어도 굉장히 의지가 되는 든든함으로 보듬어주곤 했다. 다만 내가 어머니만큼 애교가 없었다. 어머니가 가끔 나랑 아버지랑 왜 이렇게 성격이 똑같냐고 할 정도였으니까. 원래 딸이 애교를 부리는 만큼 아버지의 딸바보 능력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한다던데.

…한번, 해봐?

“아버지.”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환하게 웃으려 노력하며 아버지를 불렀다. 잘 쓰지 않던 뺨근육이 한껏 올라가서 상당히 어색했다. 그런 나를 보는 아버지를 포함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봐서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나, 불렀나?”

“네. 지금껏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무엇을?”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젠 어머니마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본다. 나는 수줍게 몸을 꼬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잔뜩 숙여 아버지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쑥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러자 잠시 멍한 얼굴을 보이던 아버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무섭게 부라리던 눈빛도 한순간 가라앉으면서 당황하셨다.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래. 내 딸로 태어나주어 나 역시… 고맙구나.”

“사랑해요, 아버지. 어머니도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자, 이젠 눈가가 촉촉해지기까지. 어머니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감격스러워하신다. 덕분에 나까지 뭉클해졌다. 내가 부모님께 너무 받기만 하고 그동안 베풀지 못했구나 싶어서 죄송하기도 했고.

그날 생일 파티는 지금까지의 파티 중에서 가장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두 부모님도 만족했고, 와주신 손님들 역시 얼굴에 웃음이 떠나가지 않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마 평생, 오늘 내 생일파티를 잊지 못할 만큼.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주 소박한 것들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서로 사랑하기를. 모두가 건강하기를. 부디, 이 행복이 아주 오래 갈 수 있기를.

[외전 2. 열 번째 생일파티 - 실비아 편, 完]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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