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30화 (130/132)

#외전 1

결실 - 카르디옌(6)

에이든의 중얼거림과 함께 치즈의 비명이 뚝 멈추고 가느다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우렁차게 우는 목소리에 순간 울컥했다.

“주인님! 예쁜 따님이세요! 아기님도 부인도 모두 건강하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모가 나와 직접 말을 전해주었을 때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산실 안에서 치즈의 피 냄새가 진하게 퍼져 나온다. 지난번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와도 비슷한 느낌이어서 수백 가지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카르디옌.”

“득녀를 축하드려요, 카르디옌 님. 어서 들어가 보세요.”

레이라가 나를 등 떠밀어 얼어붙은 발을 겨우 떼어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칭얼거리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게 이어졌고 피 냄새가 독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침실로 가까이 다가가자, 침대 시트 여기저기가 피에 얼룩진 상태다. 그나마 정리한 것일 텐데. 내 것을 집어삼키기에도 좁은 그곳으로 팔뚝보다 더 큰 아기가 나왔으니 멀쩡할 리가 없지.

“파이, 왔어요?”

땀에 젖어 엉망인 치즈가 힘겹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해서 왠지 미안하기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리와 봐요. 빨리. 아기 봐야지, 응?”

역시 혈흔이 군데군데 묻은 이불보로 감싼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치즈가 작게 속삭였다. 본능처럼 어미젖을 입에 무는 아기가 제대로 빨지는 못하고 헤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치즈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웃기만 한다.

이불보 사이로 얼핏 보이는 아기는 그저 빨갛고 쪼글쪼글하다. 까만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고 인상을 잔뜩 쓴 채 젖을 문 채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아기님이 주무시니 침대에 눕혀놓겠습니다.”

치즈에게서 아기를 받은 유모가 네모난 아기침대에 조심조심 내려놓는다.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치즈에게 조심히 다가간 나는 그녀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고생 많았다.”

“파이도 계속 밖에서 문이 부서져라 노려보고 있었다던데요? 사용인들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아기한테 ‘아기님 빨리 나와야 해요. 아버님이 기다려요.’라고 재촉하더라니까?”

“들었어.”

치즈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몸을 기댔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아기침대에 향해 있었다.

“밖에 레이라가 와있다.”

“정말?! 레이라, 밖에 있어?!”

잔뜩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외치자,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치즈가 조금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베개를 정리해주고 뒤로 물러났다. 레이라는 경험자로서 치즈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살뜰히 보듬어주었다.

“칼라인은?”

“밖에. 폐하께서도 오셨어.”

훌쩍 커버린 칼라인을 본 치즈가 아기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으나 레이라가 극구 반대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서 최소 반년은 무리하거나 무거운 걸 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태아가 모체의 영양분을 전부 가져가서 뼈도 약해진 상태라고.

레이라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 뒤. 치즈가 방금 출산을 마친 터라 쉬어야 한다고 레이라와 에이든도 돌아갔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찜질팩을 침대에 잔뜩 집어 넣어준다. 나는 다시 치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치즈를 제대로 눕혀주면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파이. 왜 아기 안 봐요?”

“…봤어.”

“그냥 흘끔 보고 말았잖아.”

“나중에 천천히 보면 돼.”

“아기는 정말 빠르게 성장한대요. 눈 깜짝할 사이에 쑥쑥 커서 어릴 때는 더 많이 눈에 담아두라고 그랬어요.”

“너 닮았으면 이미 많이 봐둔 거지.”

“파이, 뭐가 무서워서 피하는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치즈의 말에 나는 치즈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서워해? 내가?”

“내가 파이를 지금껏 봐온 햇수가 무려 이십 년이 훌쩍 넘어요. 아까 여기 들어올 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던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예상해본 적 없는 일들이 펼쳐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보니.

그런 내 손을 조심히 잡아주는 치즈가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설핏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파이와 나의 아이예요. 아까 에이든이 칼라인을 그렇게 예뻐하는 거 봤죠? 에이든도 처음에는 아기를 안지도 못했대요. 동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것과는 또 별개였다고.”

“…….”

“파이도 시간이 걸릴 거예요. 우리처럼 보통 인간이 아니었으니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아이니까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노력은 해줬으면 좋겠어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치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솔직히 말해 피한 건 사실이다. 그녀의 뱃속에 있을 때도 거의 막달에 가까워져서야 아이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 손바닥에 느껴지던 그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나타난 낯선 존재는 내 아이라기보다, 위험한 짐승에 가까웠다. 드래곤의 아이에 대한 정보는 조금도 없기 때문에. 다행히 치즈가 무탈하기는 했으나, 아이의 미래는 장담할 수가 없다. 위험한 존재라면…….

“끙… 끄응…….”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작아서 보통 사람이 들을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기침대에서.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핏물이 여기저기 번져있는 이불보 아래가 꿈틀거려서 순간 어깨가 굳어진다. 숨소리도 죽이고 신중하게 다가갔다.

“…….”

“…….”

이불보로 몸이 꽁꽁 감싸인 아기의 눈이 또르르 굴러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 그건 핏빛처럼 맑은 선홍색이었다.

‘내 기억에는… 치즈가 제대로 눈을 뜬 건 생후 3일 뒤였는데.’

그것보다 눈동자가 너무 맑았다.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빛에는 아직 초점이 없어 보였으나 나를 향한 채로 느리게 끔뻑거린다. 본능적인 건가? 그런데… 대체 이 기분은 뭐지?

다시 눈동자를 데굴 굴려 반대쪽을 보다가 조막만 한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한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치즈와 매우 닮아있었다. 커다란 눈도 그렇고, 앙증맞은 코와 입술 모양도 전부. 임신 초기에 치즈가 꿈을 꾸었을 때 봤다던 그 모습이 이런 느낌인 것 같은데.

나는 조금 더 고개만 숙여 자세하게 살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내가 치즈를 데리고 왔을 때와 흡사하다. 치즈는 옹알이를 굉장히 열심히 하고 말도 빨리한 편이었는데. 아마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 아기는 행동 자체가 느긋하고 여유롭다. 자주 놀라던 치즈와는 다르게 소리 반응에도 느린 편 같았다.

‘그냥 보면 평범한 인간 아기와 다를 게 없어 보이기는 하고.’

그러다가 또 아기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한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순간 가슴에 작게 뭉쳐있던 응어리가 한순간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치즈가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고 난 이후에 차곡차곡 쌓이던 불안감. 의구심. 경계. 그 모든 최악의 감정을 묻어두었던 그것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여전히 쪼글쪼글하고 피멍이 든 것처럼 붉은 아기의 뺨을 향해 조심히 손가락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치즈가 아기였을 때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떨리는 손가락 끝에 말랑하고 따뜻한 아기의 피부가 닿는다. 그러자 아기의 얼굴이 씰룩거리더니 입을 헤 벌리고 활짝 웃는다. 그러더니 이불보에 꽁꽁 묶인 몸을 뒤척거리면서 안아달라는 듯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눈가에 이유 모를 촉촉한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심장을 에워싸면서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눈시울이 달아오르면서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셀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저 귀엽기만 하던 치즈를 이런 아기였을 때 키웠으나, 그때는 그저 귀엽게만 여겼었는데.

이 작달막한 아기가, 아직 시야조차 제대로 트이지 않은 아기가 나를 보려고 애를 쓰는 그 행동에 감격했다. 또 치즈의 뱃속에 있을 때에도 나와 소통하려고 끊임없이 움직이던 그 아기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다. 나와 치즈의, 아기가.

“파이, 울어요?”

치즈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아기도 치즈의 목소리에 반응해 머리 위를 쳐다보려 애를 쓴다. 어느새 눈을 뜨고 내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치즈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린다.

“진짜 울었어? 파이 눈에 눈물이 가득해. 세상에! 파이가 우는 거 처음 봐!”

“…안 울었다.”

“그게 눈물이라는 거예요. 지금 파이 눈가가 젖어있는 그거. 내가 자주 울 때도 눈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잖아. 이 바보야.”

나는 재빨리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치즈가 손으로 아기를 가리키며 데리고 와달라는 손짓을 보인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력을 사용하려고 했더니.

“어머?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손으로 조심히 안고 와야지!”

…손으로 안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 싶건만.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다시 아기를 내려다봤다. 꿈틀거리는 아기가 작은 목소리로 끙, 거리면서 얼굴을 구긴다. 빨리 어머니께 데려다달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히 손을 뻗어 아기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히 감싸 안아서 들어 올렸다. 이십 년 전의 기억이 물씬 떠오르며 감회가 새로워졌다. 치즈도 이렇게 가볍고 작았던가.

아기를 조심히 품에 안자 또 크게 하품을 하는 모습도 치즈와 닮아서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천천히 걸어 치즈에게 아기를 안겨주었고, 나는 치즈의 옆에 조심히 앉았다.

“어머? 눈 떴네? 칼라인은 그렇게 잠만 잤다던데. 우리 아기는 굉장히 부지런하려나 보다. 나도 이렇게 일찍 눈 떴어요?”

“삼일쯤 뒤에.”

“네가 나보다 낫구나. 빨리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진짜 그때 꿈에서 봤던 그 모습이랑 너무 똑같아요. 아무래도 둘째를 빨리 낳아야겠어.”

“…뭐라고?”

새벽부터 그 고생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싶다. 임신 내내 체온이 높아 열 달을 꼬박 앓아야 했던 기억이 그새 사라진 건가.

“내가 임신했을 때 결심했던 게 있는데, 자고로 형제는 많아야 아기에게도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둘은 있어야지. 그래야 나처럼 가짜 나무에게 물을 주거나 말을 걸지 않을 거 아니야?”

나를 흘겨보며 투덜거리는 치즈가 어릴 때의 일에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었나 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좋지 않은 건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 문제다.

“나는 적어도 둘째는 낳을 거예요. 뭐, 한번 해보니까 별거 아니네. 파이랑 똑 닮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힘내봐야겠어요!”

아무래도 보석가루는 숨겨놔야 할 것 같다. 저러다가 평생 아기만 낳자고 할까 봐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 않아도 꼬박 열 달을 손도 대지 못하고 조심하느라 꾹 참고 있었건만.

치즈는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아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왠지 섭섭하기는 하지만, 마치 우리의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듯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아기는 내가 봐도 귀여웠다.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옹알이를 한다. 그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아기에게 향한다. 아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면서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게, 행복이라는 걸지도.

“파이.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

“…네가 크림치즈파이를 좋아했으니까, 크림?”

“…또 애한테 먹을 걸로 이름 붙이지 마! 무슨 아버지가 돼서 아기 이름을 음식으로 짓는 게 어디 있어!”

이름, 이름이라.

아마 치즈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정하려면 또 꽤나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쁜 이름으로 찾아봐야겠군. 나중에 아기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외전 1. 결실 - 카르디옌,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