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결실 - 카르디옌(5)
“가슴도 더 커지고. 살이 쪄서 큰일이야. 아기 낳으면 바로 운동부터 해야겠어. 파이가 도와줄 거죠?”
“…밤일이라면 언제든.”
“하여간 음흉해!”
그러고 보니 임신 이후에 신경 쓰느라 관계를 갖지 못했다. 치즈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나는 치즈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서로 조심하고 있어서.
임신할 때에 성욕이 증가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치즈는 해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워낙 열 때문에 몸이 힘들어하는 경우라서 그럴 수도.
“아! 파이, 지금! 발로 찼어!”
“누가!”
그렇지 않아도 온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세워진 상태인데. 감히 내 여자를 발로 찬 간 큰 새끼 면상을 밟아버릴 생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욱한 거라 치즈도 조금 놀라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 아기가 그랬는데……. 왜 화를 내? 오… 나 파이가 화내는 거 처음 봤어. 맨날 눈빛으로 사람 기죽이더니!”
“…아기가?”
“응. 뱃속에서 방금 아기가 발로 뻥! 찼어. 만져봐, 빨리요!”
부른 배를 움켜쥐고 다가온 치즈가 내 손을 덥석 잡아 제 배 위에 올려놓는다. 정말 손바닥에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더니 무언가가 꾹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어허, 아기가 아버지하고 소통하려는데 그렇게 무서워하면 어떡해? 무슨 드래곤이 이렇게 겁이 많담? 큰일일세.”
연신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태아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것을 느끼기 전만 해도 치즈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체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관심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그저 내 여자에게 기생하고 있는 독한 벌레 한 마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고작 촉감을 느꼈을 뿐인데. 그 움직임 하나가 뭐라고 이런 요상한 기분인지.
“이제 당신 아기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좀 되어가요?”
“조금.”
“서서히 익숙해질 거예요. 급할 건 없고, 다만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 소심함부터 좀 없애든지 해요. 답지 않게 왜 이러나 싶다니까, 정말?”
치즈는 내게 연신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먹거렸다. 이제 진정한 가족이 되는 거라며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열 기운에 자주 지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행복이 전염된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고.
주기적으로 치즈의 상태를 살피러 오던 출산 전문의가 부드럽게 웃으며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아마 며칠 내로 몸을 푸실 것 같습니다. 산실을 준비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 나는 지옥을 경험했다.
“아… 으으…….”
새벽에 곤히 자던 치즈가 갑자기 신음하며 뒤척거렸다. 또 지난번처럼 배가 눌려서 그러나 싶어 옆으로 뉘려고 손을 뻗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진통이 시작된 건가.
“치즈? 괜찮아?”
“배가, 찢어질 것 같아. 흑!”
식은땀을 흘리면서 한번 크게 통증을 느끼다가 차츰 가라앉는지 안색이 돌아온다. 나는 바로 유모를 불렀고, 치즈는 산실로 들어갔다. 같이 들어가려고 하자, 금남구역이라 거부당했다. 치즈도 내가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아 했고.
“아아악!!!”
“…후우.”
덕분에… 산실 밖에 치즈의 비명이 울려 퍼질 때마다 온몸에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다 보니 손가락에 한 움큼씩 뽑혀 나왔다.
대체 저러고도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저러고도 살아남는 게 가능해? 치즈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름에도 산실에 출입하는 이들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다. 나만 애를 태우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심지어는 최악의 경우까지 내 정신을 좀먹어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당장 루즈 제국을 전부 박살을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대지를 전부 갈아엎어 버리고 싶다.
‘아니야. 진정해야지. 진정해.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위험해진다 해도 당장 내 피를 먹이면 되니까.’
얼마 전에 치즈가 내게 당부했었다.
[출산하는 건 나도 안 해봐서 무섭지만, 겁이 나진 않아요. 다들 경험하는 거니까. 내가 아무리 죽겠다고 소리쳐도 절대 반응하지 마요. 홧김에 욕해도 못 들은 척해요. 알았죠?]
[욕은 왜 하지?]
[뭐, 레이라도 그러더라고요. 아기 낳을 때만큼 에이든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적이 없었대요. 그냥 원망하는 거였는데, 낳고 나서는 그 생각이 전부 사라졌다고.]
[…이해가 되질 않는군.]
[그렇죠? 나도 이해 안 돼. 하지만 언제는 인간이 이해된 적 있었나요?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요.]
반응하지 말고. 아무 말도 못들은 걸로 하고.
최대한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고 복도 테이블에 놓인 화병을 마주보았다. 백합과 소국으로 장식된 유리 화병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하얀 백합 꽃잎을 어루만지는 사이.
“으으윽!”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치즈의 가느다란 신음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꽃잎이 손에서 엉망이 된 채다. 꽃을 망가트린 걸 치즈가 알면 울적해 할 텐데.
나는 재빨리 망가진 꽃 한 송이를 꺼내 창문 밖으로 대충 던져버렸다. 그리고 호흡을 고르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후우……. 돌겠군.”
사용인 한 명이 산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그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
“아직 멀었나?”
“산파의 말로는 오후가 되어야 아기님 나올 길이 열릴 거라고 하셨어요. 첫 출산이라 아마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늦은 새벽이다. 그런데 오후라니.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께서 주인님을 걱정하셨어요. 블랑 제국이든 루즈 제국이든 어디든 좋으니 멀리 가 계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전하고 가버린 사용인의 말에 머리가 지끈지끈 쑤신다. 저렇게 죽을 만큼 비명을 지르고도 내 걱정이라니. 인간이 참 대단한 종족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치즈를 볼 때마다 새삼 다시 느끼곤 한다.
‘고생하는 내 아내를 두고 도망갈 수는 없지.’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다. 그럼 견뎌내야 한다. 치즈가 아무 방비 없이 지금 그 대단한 고통을 감내해내는 것처럼.
해가 뜨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왕국 수도로 내려갔다. 늘 하던 일정대로 가장 먼저 디저트 가게를 꼼꼼히 점검했다. 굽기 직전의 빵 반죽 상태나 토핑할 과일들의 상태를 살폈다. 치즈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위생도 확인한 뒤, 가게를 맡아 대신 운영해주는 점장을 격려해주고 나왔다. 그 이후로 거래하는 과일가게를 들러 치즈가 좋아하던 사과 몇 개를 구입했다.
“부인께서는 오늘 같이 안 오셨네요?”
“진통 중이라.”
“어머! 그렇지 않아도 배가 아래로 내려가서 곧 출산하겠구나 싶었는데.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아! 산모에게 좋은 과일도 있어요. 잠시만요?”
과일가게 주인이 딸기와 포도를 포함한 여러 과일을 담아주며 건네준다. 내가 산 것보다 더 많은 양이라 묵직하다.
“신선한 과일도 좋지만, 적당히 드시길 권해드려요. 무사 출산을 기원합니다. 다음에는 귀여운 아기와 함께 오세요.”
여러 거래처나 단골집을 돌아다닐 때마다 다들 치즈의 안부를 묻는다. 산모에게 좋다는 음식이나 아기용품들을 받았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북하게 쌓여버렸다. 심지어 치즈가 꽤 예뻐하던 옷 가게의 열 살 된 아이에게, 곧 태어날 아기의 선물이라며 작은 인형까지 받았다.
축하를 건네는 이들의 표정은 전부 밝았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모습들에 나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누구 하나 나처럼 혼란스러워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출산을 경험한 남자들도 내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원래 첫 아이를 낳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고, 태어난 아기를 보면 또 세상이 달라 보이더군요. 아마 당신도 곧 느끼게 될 겁니다.”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중년의 남자도 있었다. 그게 뭐라고 제법 위로가 되어 신기하기도 했다.
치즈가 매번 내게 누누이 설명했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서로 공유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성장해야 한다고. 그 뜻을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의 정리가 제법 되었다. 아마 혼자였다면, 지금쯤 저택의 모든 물건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볼일을 마친 뒤에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진통에 시달리는 치즈의 비명에 심장이 요동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제 경부가 조금 더 열리면 될 것 같습니다.”
“치즈의 상태는?”
“아직은 기운이 넘치세요. 꽤 지쳤을 법한데 멀쩡한 정신으로 아기를 볼 거라고 다짐하시더라고요.”
“…잠깐 들어가도…….”
“주인님께서 절대 출입하지 못하도록 꼭 막아달라고 부탁을 하셔서요. 만약 지금 산실에 들어오면 아기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어찌나 걱정하셨다고요.”
치즈는 내가 홧김에 아기를 해칠 수도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현명하군. 나도 나를 믿지 못하고 있긴 해서.
“그럼 치즈에게 이걸 줘. 옷 가게 꼬마가 태어날 아기에게 주고 싶다던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가져온 물품들 중에서 열 살짜리 아이가 준 인형을 사용인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은 사용인도 흐뭇하게 웃으며 인형을 들고 산실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도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진통시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나는 산실 앞에 석상처럼 서서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주시했다.
“치즈가 출산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거의 끝나가나 보네.”
가게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기를 한쪽 팔로 안아 든 에이든과 레이라와 함께 나타났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아기의 머리카락은 두 사람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영롱한 군청색의 눈동자는 샛별이 뜬 새벽하늘처럼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얼굴은 누가 봐도 에이든의 판박이였다.
‘하필이면 저 쓰레기 놈을 닮다니. 안타깝군.’
갓 태어났을 때 봤던 아기는 이제 제법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물을 구경할 정도로 컸다. 그 아기를 보니 치즈가 아기였을 때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황제가 참 여유롭군. 이런 곳까지 행차하실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나 보지?”
“우리 황후가 치즈 출산일이 거의 임박했다고 혹시 몰라 가게에 갔는데 마침 소식을 들었거든. 우리 카링의 배우자가 될지 모르는 아이니까 궁금하잖아?”
“…어디서 개가 짖는군.”
감히 내 아이를 넘보다니. 정녕 딸이라 한들 너 같은 쓰레기 새끼의 자식에게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곧 아이의 아버지가 될 텐데 입이 험하군그래?”
그때 또 찢어지는 치즈의 비명 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를 낳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