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28화 (128/132)

#외전 1

결실 - 카르디옌(4)

다시금 내 품에서 울다가 잠이 든 치즈를 침대에 조심히 눕혀놓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각국의 오래된 도서관에 잠입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꺼내 가지고 돌아왔다.

루즈 제국의 고서에도 히아루르 보석가루의 효능에 부작용은 없다고 나와 있다. 단 한 번도 실패했던 적이 없기로 유명하다고. 그러나 그 보석가루를 통해 출산한 이후의 기록은 없었다. 산모에 대한 것도, 아이에 대한 것도. 그래서 더 불안해진다.

‘아무래도 장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아직 치즈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침실에 방어 마력을 여러 겹 쳐놓은 뒤, 나는 루즈 제국으로 향했다.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인 황성에 발을 디디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이 더러운 곳에 또 발을 딛게 될 줄이야.

“드, 드래곤! 블랙 드래곤!”

“도망쳐! 피해!!”

주위에 시끄러운 날벌레의 외침이 귀에 거슬린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하유르가 있을 만한 곳, 황제의 침실로 곧장 찾아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하아… 밖이 시끄럽네. 이러면 집중할 수가 없… 카르디옌?”

붉은 휘장이 화려하게 나풀거리는 침실 안쪽. 실루엣만으로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알몸의 남녀가 서로 뒤엉켜있었으니까.

그러나 침실 안에서 마력으로 일궈낸 바람이 불어오면서 휘장이 걷어진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정사의 향기가 진하게 퍼진다. 치즈의 체취에 익숙해져서인지 후각에 영 거슬리는 냄새다.

“카르디옌,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기별도 없이?”

서로 몸을 섞던 상대를 밀어낸 하유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내게 총총 다가왔다.

“머리카락이 짧은 거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진작 자르지 그랬어. 그런데 치즈는 어쩌고 온 거야? 설마, 이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야?”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풍만한 가슴을 더 내밀고는 진한 붉은색의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잔뜩 기대에 찬 그녀의 표정은 내 코웃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혼인식 선물. 치즈에게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 그거?”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하유르가 가볍게 손짓을 한다. 그러자 침실 안에 있던 남자가 허둥지둥 옷으로 몸을 가린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하유르도 대충 하얀색의 가운을 챙겨 입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별다른 뜻은 없었는데? 정말 좋은 뜻으로 준 선물이라서.”

“그 보석가루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아니면 그것을 복용한 여성을 좀 만나보고 싶다.”

“왜? 혹시 치즈가 그거 먹었어?”

“그래.”

하유르의 표정에 화색이 돋는다. 그러더니 내 반응을 집요하게 탐색하고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치즈 임신했구나? 우리 치즈가 드래곤의 아이를 가지다니. 생각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너무 기쁘다. 내 일도 아닌데 내 일보다 기뻐! 정말 축하해, 카르디옌!”

박수까지 치며 환하게 웃는 하유르의 행동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치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축하 따위는 필요 없어. 정보나 뱉어.”

“정보?”

“부작용에 대해서.”

“그런 거 없는데?”

“…없다고?”

“아, 일단 뭐… 아무래도 인외 종족의 아이니까 보통 임부와는 좀 다르긴 하겠지. 예전에 늑대와의 교합을 시도해본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계속 열에 시달려서 많이 힘들어했거든.”

열. 치즈에게 미열이 있는 건 그런 것 때문인가. 보통 짐승은 인간보다 체온이 높다. 치즈가 사계절 내내 내게 붙어있는 이유가 따뜻해서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서 여름에도 이불을 꼭 덮고 자는 아이였으니.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지?”

“지금 삼대가 함께 잘살고 있어. 몸에 털이 좀 많은 편이긴 하지만, 보통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 그런 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전부 평범한 인간의 외형을 타고 났으니까 걱정할 건 없을걸?”

그렇다면 다행인데. 문제는 열이 지속되면 몸이 버티기 힘들지도 모른다. 내겐 다른 것보다 치즈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한 가지 경고하는데, 만약 치즈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 마. 열나는 것만 좀 잘 잡아주면 될 거야. 또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우리 루즈 제국에서 치즈의 무사 출산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울게.”

대대로 드래곤의 아이를 노리던 황제이다 보니 영 믿음은 안 가지만. 치즈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도 치즈는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마를 슬쩍 만져보니 조금 높은 체온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발그레해진 뺨도 조금 따뜻하게 느껴지고.

“…치즈.”

내 목소리와 손길에 잠에서 깨어난 치즈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초록색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돈다.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는 치즈의 표정에 심장이 저릿해졌다.

“그만… 일어나야지. 종일 잠만 자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나, 크흠. 나 방금 꿈을 꿨는데. 예쁜 딸 둘이랑 같이 넷이서 나들이 가는 꿈이었어요.”

주섬주섬 일어나 눈두덩을 비비는 치즈가 아직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듯 연신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그녀를 조심히 감싸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으나, 복잡한 머릿속 덕분에 굳어버린 표정이 풀어지진 못했다.

“딸 둘이라. 쌍둥이?”

“그건 아닌데. 둘 다 똑같이 생겨서 쌍둥이 같기는 했어. 확실히 기억나는 건 둘 다 나를 닮았는데 머리카락하고 눈동자는 파이 닮았더라.”

“그래? 그냥 치즈 너를 닮으면 족하다만.”

그런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치즈가 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또 왜 그러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치즈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본 자세로 앉는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풀린 눈은 아직 잠에 취한 것 같아 보였다. 다만 그 동공 안에 담긴 영롱함은 내 심장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왜?”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 주면 안 돼요? 아까부터 파이 표정 어떤 줄 알아요? 지옥에서 온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 같아요. 무서워 죽겠어.”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댄다.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온기가 저를 힘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좋다고 웃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임신하면 다 그렇대요. 레이라가 해줬던 말이 이제 좀 이해가 가. 물론 나는 보통 임부들과 다른 경향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랑으로 맺어진 소중한 생명이잖아요.”

“…출산하는 날까지 고열에 시달릴 수도 있어.”

“그럼 어때요? 추운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열이 얼마나 오를지도 몰라. 그 열이 네 장기를 갉아 먹을 수도 있고.”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있대요? 나 자는 사이에 알아봤을 거 아냐.”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도 치즈는 대수롭지 않아 한다. 원래 배짱이 두둑한 편이긴 했으나, 아픈 건 딱 질색이던 그녀인데. 고작 뱃속에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이십 년 전 그녀의 어미도 그랬다. 죽음 직전에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보지도 못했음에도 아이만큼은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생명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알고도, 어떻게든 아기를 살리고 싶어 하던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혈육의 정이라는 건가.

“무사히 출산했다고는 하지만…….”

“그럼 되었어요. 뭐, 나도 할 수 있겠네. 레이라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할까?”

지난번 레이라가 아기를 낳는 건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 것과 같은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걸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정말, 마음이 바뀌지 않을 자신이 있나? 분명 널 괴롭게 할 거다. 네가 짊어져야 할 그 고통을, 나는 대신해줄 수가 없어.”

“걱정 마요. 할 수 있어요. 난 너무 기대되는데?”

그저 좋기만 한지 나와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시선을 똑바로 맞춘 그녀가 단호하게 경고했다.

“파이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내 곁에 있어요. 도망가면 겁쟁이 드래곤이라고 평생 놀릴 거야. 알았어요?!”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저택을 방문한 의원에게서 확실한 임신임을 판정받았다. 치즈는 뛸 듯이 기뻐했고, 나는 여전히 초조해졌다. 아직 배가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배를 쓰다듬으며 태아와 대화를 나누려는 치즈의 행동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잠이 늘어난 건 여전했고, 미열이 가라앉을 생각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괜찮냐고 물어봤으나 그때마다 치즈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내가……. 내가 안 괜찮다고.

“파이 눈가에 눈그늘 내려앉았어. 피곤해요? 요새 잠 못 잤어요?”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치즈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살포시 껴안아 주기만 했다. 예전에도 눈그늘이 내려앉은 적이 있었지. 그건 아기인 치즈를 데리고 왔을 때였는데. 아직 육아는 시작도 않았건만 마음이 복잡하고 온 신경이 곤두세워진 채다.

“너만 무사하면 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정말 어디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해. 의원도 버티면 안 된다고 했다.”

“응. 알았어요.”

치즈는 레이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임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것을 치즈와 함께 공유하고, 미리 유모를 들여 치즈의 상태를 매일 체크하게 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진다는 치즈의 배가 서서히 부르는 걸 매일 확인했으나,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오래전 치즈가 가슴이 나오면서 이러다 터져 죽는 거 아니냐고 울먹였을 때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기도.

치즈가 만삭이 되었을 때에는 더 걱정되어서 잠도 오질 않았다. 덕분에 매일 밤을 꼬박 새웠다. 오죽하면 함께 독서할 때, 깜빡 졸기까지 해서 치즈가 배를 잡고 웃다가 배가 당기는 바람에 서로 당황해버리기도 했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