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27화 (외전) (127/132)

# 127화

#외전 1

결실 - 카르디옌(3)

그리고 다음 날, 치즈가 몸살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어디가 아파? 여기?”

“윽, 아……. 아야, 응. 거기… 흑!”

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끙끙 앓는 치즈의 어깨와 허리를 마사지해줬다. 어제 그렇게 힘들게 한 것도 없는데. 역시 처음에 애무를 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던가.

…앞으로는 절대 애무 없이 바로 해주진 않겠군.

“그러게 왜 평소처럼 하지 않고. 힘들면 말해야지. 왜 그걸 참고 있나, 미련하게.”

“일명, 실험이랄까……. 아윽!”

“실험?”

“그런 게 있어요. 신이, 파이를 굽어 살피시… 아! 살살해요! 아프잖아!”

빽 소리를 지른 치즈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나를 흘겨본다. 하지만 곧 다시 나풀거리는 종이처럼 흐느적거리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말을 이었다.

“호기심이라는 게 있잖아. 과연 내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궁금하고… 파이처럼 절대 죽지 않는 몸인지도 궁금하고…….”

“쓸데없는 짓이군. 그 호기심, 이제 그만 없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사실, 내가 큰 위험에 처해도 파이가 살려내 줄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요. 설마… 모른 척할 건 아니죠?”

요망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치즈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런 치즈의 행동을 볼 때마다 여전히 철이 들려면 멀었구나 싶다.

“완전히 생명이 꺼지면 아무리 나라도 살릴 수 없어. 그러니 그런 호기심이 들면 내게 미리 말해주도록 해.”

“물론이죠!”

배시시 웃는 치즈의 말랑한 피부가 매우 쫀득하다. 뽀얀 살이 군침이 돌 만큼 맛있어 보인다. 그냥 핥아먹기만 해도 달콤한 맛이 느껴질 것만 같다. 아니, 그냥 이 아이가 내 손이 닿는 곳에 있기만 해도 그저 좋다.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자꾸 내 모든 신경과 감각이 본능에 쫓기듯 그녀를 탐하게 된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어미젖을 찾는 것처럼.

“이렇게 아프니 어딜 나가지도 못하겠군. 오늘 모처럼 가게에 들러볼까 했는데.”

“응. 못 가요. 못 나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래. 그럼 푹 쉬자.”

둘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껴안은 채 하루를 보냈다. 치즈가 배고프다고 하면 간단한 간식을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아기새처럼 넙죽 받아먹고는 기분 좋게 웃는 그녀가 내 품에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다가 치즈가 내 손등을 찰싹 내리칠 때면 움찔거렸다.

“씁! 손 떼요.”

그 말에 내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랑한 엉덩이를 슬쩍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마다 본능이라는 게 참 무섭다가도 우습기도 하고. 치즈가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만물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도 재미있고.

그날 이후로 간혹 산책을 하는 것 이외에는 밖에 나가질 못했다. 산책도 힘들어할 정도로 치즈의 몸살이 낫질 않아서.

“힘들면 말해. 안아줄게.”

“안아줘.”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안기는 치즈가 평소와 또 다르다. 산책만큼은 꼭 제 발로 걷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이인데. 정말 몸이 좋지 않은지 기운 하나 없이 축 늘어진 모습에 점점 불안해진다.

“의원이라도 부를까?”

“싫어요.”

“아픈데 참지 말고. 몸살이 회복되지 않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약 써서 싫어. 좀 있으면 낫겠지.”

그럼에도 치즈 역시 걱정스러운 한숨을 푹 내쉰다. 날이 따뜻한 초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춥다는 듯 잘게 떠는 치즈가 내 품속에 더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산책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눕혀놓았다. 일부러 체온을 나눠주려고 함께 누워 끌어안은 채 곁에 있어 주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치즈의 상태가 미묘하게 변했다. 병든 닭처럼 종일 잠을 잤고, 여전히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조금 미열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의원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

“약 싫은데……. 왜 이렇게 아픈 게 오래가는 거지?”

“벌써 한 달째다. 더 방치했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 일단 진찰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약 먹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아프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잠만 잤지, 절대 아프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나만 속이 타들어 가지. 강요하면 며칠간 내 얼굴도 봐주지 않으니까.

나는 사용인을 시켜 유명한 의원을 모셔오라고 명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지금 당장 데리고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 마력을 써서 데려와 버리고 싶은데. 치즈가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답게 살자고 당부해서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모셔왔습니다, 주인님.”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든 치즈의 곁을 지키고 있을 때, 왕궁에서 귀족들의 주치의로 유명하다는 의원이 도착했다. 잠귀가 밝은 아인데, 말소리가 들렸음에도 깊이 잠들었는지 깨질 않는다.

“치즈. 치즈? 잠깐 일어나봐.”

“우응…….”

억지로 잠을 깨워서 일으켜 앉혔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었는지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잠에 취한 상태다. 그래도 깨우면 잘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다. 체취를 봐서는 그 금단의 열매 냄새는 거의 사라진 상태고, 내 피도 적절히 섞인 것 같은데.

여전히 침대에 기대앉아 축 늘어진 치즈를 진찰하던 중년의 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조심스레 묻는다.

“평소 부인의 증상이 어떻습니까?”

“한 달째 이런 상태다. 기력도 없고 몸살 기운이 계속 남아있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 같고. 열도 조금 있는 것 같더군.”

“달거리는 언제 하셨는지요?”

달거리?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치즈가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건강한 체질이라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정말 무슨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아닌가?

“…원래는 주기적으로 했었는데,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임신 증상과도 비슷하군요. 다른 특별한 병이 있어 보이진 않…….”

“임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심하게 놀랐다. 드디어 내 청력에 문제가 생겼나 싶을 만큼.

연체동물인 것처럼 흐물거리던 치즈도 그 말에 덩달아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꼭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뜬 눈으로 의원을 바라보는 치즈를 향해 인자한 눈웃음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 그가 눈가의 주름을 더 곱게 접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나, 증상으로만 봐서는 임신 이외에 다른 병명을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확실해지려면 앞으로 두 달은 더 지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임신이라니. 치즈가 임신이라고?

인간이 드래곤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범고래와 사자가 교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불가능이란 말이다. 그런데 치즈가 임신이라면… 대체 누구의?

“만약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결정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부인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이겠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 가방을 정리하는 의원이 아까와 다르게 조금 서늘한 눈빛으로 변한 채다. 아마도 내 굳은 표정 때문에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럼 한 달 뒤에 다시 방문해서 확실한 진찰을 다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처리하고자 하시면 다시 기별을 주십시오.”

의원이 인사를 마치고 나갔다. 방에는 나와 치즈뿐이다. 치즈는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웃고 싶은 걸 참느라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한 달이다. 레이라의 아이를 보고 온 그날 이후로 치즈는 종일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럼 그 전에? 하지만 나는 치즈의 곁을 비웠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대체… 어떤 새끼가 나 몰래…….

“그 가루. 정말 효과가 있나 봐. 이렇게 한 방에… 우와, 신기해.”

오랜만에 치미는 분노가 내 정신마저 잠식하려던 그때. 치즈의 중얼거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나큰 감동이 밀려와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치즈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휘청거리면서 내 품에 와락 안겼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그것도 그거지만 그녀의 행동에 혼란스러워진다.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휘저어놓는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잇새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떤, 놈이냐. 어떤 새끼의…….”

“어떤 놈이냐니! 당연히 파이 당신밖에 더 있어요?!”

“…뭐?”

“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요. 믿기도 어렵고. 만약 그 말이 거짓이라면, 실망할까 봐 말 안 했던 건데.”

치즈가 내 가슴팍에 더 뺨을 깊게 묻고 허리를 더 꽉 감싸 안는다. 그때까지도 영문을 모르겠어서 그저 당황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 사실 벌 받는 줄 알았어요. 파이가 그랬잖아? 아무거나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지 말라고. 그래서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고요.”

“…무슨, 말이냐?”

“지난 혼인식 선물로 하유르가, 그 루즈 제국의 황제 언니가 준 선물이… 히아루르라는 보석가루였어요. 그냥 한번 호기심에, 아기도 탐나고 이래저래…….”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던 치즈가 울먹거리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역시 그 보석가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거다.

인외 종족과의 교합에도 실패 없다던 그 가루는, 여성이 먹기만 하면 난소에서 특별한 여포를 생성해낸다고 했다. 그 여포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악마든 천사든, 그 어떤 수컷의 정자도 전부 받아들여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고.

그 황제 계집이… 기어코 이 사달을 만드는군. 오래전부터 드래곤의 아이를 염원하더니 분명 치즈의 몸을 빌어 얻으려던 것이 분명하다.

“그 보석가루를 먹었으면 말을 해야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를 의심할 뻔했어.”

훌쩍거리는 치즈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게 가장 먼저다. 육아에 대한 지식은 머릿속에 있지만, 아직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임부의 감정이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건 안다. 레이라가 임신을 했을 때, 옆에서 치즈가 종알종알 이야기해준 내용들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었으니까.

그래서 치즈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아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그저 다독여주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혼란이 가중된다. 이것이 현실인지. 정말 치즈가 임신을 한 게 맞는지. 그 보석가루가 내 지식과 다르게 좋지 않은 성분이 들어있진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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