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외전 1
결실 - 카르디옌(1)
“으아, 너무 귀엽다! 작아! 왜 이렇게 작아?!”
“정말 작지?”
“응! 인형 같아! 만지면 다칠 것 같아서 못 만지겠어.”
감격에 물든 얼굴의 치즈가 호들갑을 떨며 작은 아기침대 근처를 서성거린다. 그곳에는 이불보에 돌돌 말린 채로 얼굴만 빼꼼 내민, 갓 태어난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그 깜찍한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방방 날뛰는 치즈의 오두방정이 더 귀여운 것 같은데.
뽀얀 피부에 그 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는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되었다고 했다. 높은 톤으로 감탄하는 치즈의 목소리에 아기가 움찔거렸으나 눈을 뜨진 않았다.
‘저게 귀여운 건가? 하긴, 치즈도 핏덩이였을 때는 제법 귀여웠지.’
이곳은 블랑 제국의 얼음 성. 현재 블랑 제국은 겹경사에 연일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혼인한 지 겨우 석 달 된 제국의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제1황자가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미치광이 남색가라는 소문이 돌던 황제 에이든의 뒷소문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 봐야 내게는 여전히 쓰레기 새끼지만.
“레이라, 정말 수고 많았어. 고생했겠다.”
치즈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이라를 격려했다. 레이라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시무시했다.
“다른 부인들 말이 맞았어.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 느낌이었지.”
“으엑. 그게 정말이야?”
“낳을 때는 정말… 지금 우리 그이 안 오셨지?”
눈치를 보면서 문 근처를 기웃거리는 레이라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민망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고는 시선을 피하면서 헛기침을 뱉어냈다.
“내가 우리 그이한테는 말 안 했지만, 다시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어.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으… 그래?”
아픈 건 딱 질색이라는 치즈가 레이라의 말에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어깨를 바짝 움츠린다. 볼 때마다 정말, 나의 치즈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 같다. 당장 저 부드러운 몸을 부서지도록 안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아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기를 딱 보는데. 순간 그 죽을 만큼 괴로웠던 고통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너무 예쁜 거 있지? 처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너무 좋아서?”
“응. 기분 참 이상하더라. 그냥, 행복했어.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레이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치즈의 표정이 수십 번 변했다. 황홀하다가도 걱정스러워하고, 레이라가 웃으면 웃다가 울적해하면 같이 울컥한다.
여전히 감정변화와 공감 능력이 뛰어난 그녀다. 보통 키워준 상대의 성향을 닮는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를 닮지 않아 주어서 가끔은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마음이 싱숭생숭.
“가게는 어때?”
“파이가 일을 못 하게 해서. 그냥 넘겨버릴까 싶다가도 우리의 추억이 담긴 곳이라서 이대로 둘까 싶기도 하고. 아직 고민 중이야.”
나를 힐끔 쳐다보는 치즈의 눈동자에 원망이 담겨있다. 밤낮없이 내 밑에 깔려 좋다고 예쁘게 울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여간 치즈의 속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무슨 생각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지.
“조금만 기다려봐. 반년 정도 지나면 나도 시간이 좀 생겨서 다시 복귀할지도 몰라.”
“어? 에이든이 그렇게 해주겠대?”
“이 나라에서는 워낙 황권이 신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대. 호위를 여럿 대동해야 하지만. 그림자처럼 숨어서 호위를 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오, 내가 남자 소개를 잘 시켜준 것 같네. 다행이다. 그럼 네가 복귀할 때까지 내가 잘 유지하고 있을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러고도 한참을 레이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치즈의 눈이 아기에게 고정된 채다. 꼬물꼬물 뒤척거리는 아기가 하품을 하면 같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인상을 쓰면 같이 얼굴을 구긴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아기 흉내를 내는 모습도 꽤 흥미롭다. 정말 볼수록 내 시선을 강탈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 쓰레기 새끼의 아이에게 저런 관심을 보이는 건, 역시 기분이 더러워.
“다 봤으면 그만 가지.”
“잠깐만요. 아직 덜 봤다고.”
나를 보지도 않고 대꾸하는 치즈가 여전히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자 레이라가 고개를 돌리더니 숨죽여 웃는다. 나는 다시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는 레이라가 치즈에게 조심히 묻는다.
“치즈 너는 아직 소식 없어?”
“응. 신혼생활을 좀 더 즐기려고 했지.”
“아기 보니까 생각이 바뀌지?”
“그러게. 왔다 갔다 하네. 네가 임신할 때 많이 힘들었다는 얘기 듣고 반은 포기했었는데.”
귀가 쫑긋 세워지면서 둘의 대화에 집중이 된다. 이미 혼인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치즈가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서로 연애를 했을 때부터 아이만큼은 줄 수 없다고 했었다. 치즈 역시 아이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했고.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지 모르겠다.
“흐음… 나도 2세를 생각해봐야 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치즈의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 도 아니고 생각해본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난 아이를 줄 수 없는데?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잠만 자? 원래 이렇게 잠만 자는 거야?”
“네가 오기 전에 모유를 먹어서 배부른지 계속 자네. 원래 아기는 하루 대부분을 잔대. 잘 자야 건강한 거고.”
“그렇구나. 이름은 지었고?”
“칼라인. 애칭은 카링이야.”
“귀엽다, 애칭.”
싱글벙글한 치즈의 표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대체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건지. 나 몰래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건지.
‘설마……?’
아니, 다른 연인을 만날 시간은 없을 텐데. 비밀리에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은 흔적은커녕 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나저나 눈뜬 거 보고 갈랬는데 안 되겠네. 백일 전까지는 공개하지 않을 거라며?”
“아무래도 면역력이라는 게 없으니까. 귀한 황손이라고 황태후 폐하께서 얼마나 신경을 써주시는지 몰라. 블랙 드래곤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허락한 거지, 아마 치즈 너만 왔으면 절대 들여보내지 않았을지도?”
“우리 파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제야 나를 쳐다보며 방긋 웃는 치즈의 표정에, 방금까지 어지럽던 머릿속이 다시 차분해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심장을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 앙큼한 치즈를 어떻게 또 혼내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아기에게 집중하던 치즈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보러 와야겠다. 눈동자 색은 너랑 같은 파란색이랬지? 약간 어두운 군청색?”
“응. 머리카락은 조금 더 자라봐야 알 것 같더라고.”
“기분 이상할 것 같아. 너하고 똑같은 눈동자를 가진 아들이라니.”
마지막으로 치즈는 두 손을 모아 입가에 가져다 댄 뒤, 아기를 향해 속삭였다.
“엄마 말 잘 듣고,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해? 네 엄마 힘들게 하면 내가 엉덩이 때찌하러 올 거야, 알았지?”
은근 아기와 잘 어울리는 치즈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쓰리다. 어디 아이를 입양이라도 해 와야 하나 싶은 고민에 사로잡힌 채, 치즈와 함께 다시 치치르자 왕국으로 돌아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치치르자 왕국에 새로운 신혼집을 마련해서 머물고 있었다. 마을이 아닌 산속이라 인적도 드물고 조용했다. 치즈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머물렀던 숲속의 저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일부러 새로 만든 집이었다.
아직 날이 밝은 대낮. 치즈는 내 손을 잡아끌고 현관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른 숨을 쉬는 치즈가 눈을 감고 햇살을 만끽했다.
“일을 못 하게 해서 섭섭했나?”
“계속 이렇게 놀기만 하니까 심심하잖아요.”
“심심할 틈이 있어? 그럼… 지금 다시 침대로 갈까?”
“어허! 그건 밤에만 하자고 약속했잖아요.”
이제는 치즈에게서 흘러나오는 체취만 맡아도 하체에 열기가 몰린다. 늘 함께 있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발정이 날 정도였다. 그때마다 치즈에게 들러붙어 하체만 슬쩍 문질러도 덩달아 흥분하곤 했는데.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수명이 늘어난 보람도 없이 죽겠어. 오늘부터는 해가 떠 있는 낮에만큼은 사람처럼 삽시다.]
얼마 전부터 낮에는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일부러 체력이 달릴까 봐 일도 하지 못하게 했던 건데. 그 의미가 퇴색된 느낌이다.
치즈는 이제 쉬는 것도 좀이 쑤시는지 하루의 대부분을 산책에 쏟아부었다. 제법 오랜 세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던 나와는 다르게 치즈는 활동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발발거리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그건 나이를 먹어도 똑같았다.
“치즈.”
“응?”
“아이를 가지고 싶나?”
아까부터 물어볼까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레이라와의 대화가 머릿속에 자꾸 맴돌아서 초조해지는 건 여전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런 이야기는 서로 신중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이는 어때요?”
“네가 원한다면,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열 명도, 백 명도 데려다줄 수 있지. 보육원을 차려줄까?”
그녀의 배를 통해 낳을 수 있는 건 불가능하지만. 입양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원하는 건 뭐든 해줄 생각이었는데. 언젠가는 아이가 발목을 잡게 될 거라는 예상을 했음에도 조금은, 속이 쓰리다.
“나 키울 때 힘들었다면서요.”
“그때야 방법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 아이는 우리 사이에 없는 걸로 합의하고 혼인한 거잖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묻는 치즈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 맑디맑은 호수처럼 깨끗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쾌락에 젖어 울게끔 만들어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고운 살결에 얼굴을 파묻고, 말랑한 살을 깨물고 핥고. 그녀의 뜨거운 육체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예쁜 목소리로 신음하는 치즈의 눈물을 전부 먹어치울 수 있는데.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