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Epilogue1
“혼인 축하해, 치즈!”
“어… 응. 고마워. 레이라…….”
“드디어 기다리던 혼인식을 치르는구나. 왜인지 내가 더 설레. 이제 진짜 한 사내의 반려가 되는 순간이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레이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이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받고 일주일 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우리의 혼인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는 장미꽃잎처럼 화려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도 얼떨떨했다. 이유인즉, 파이가 혼인식이 치러지는 오늘까지 내게 모든 걸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난데, 이 앙큼한 남자 같으니라고!’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이나 자볼까 싶어 파이의 품에 안긴 채 잠을 만끽했었다. 그러다가 뭔가 따뜻한 물이 피부를 감싸고 있는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눈을 떴다.
[…파이?]
잠에 취한 채로 눈을 비비며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파이와 함께 온수가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로.
[깼어? 잘 자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재울까 싶었는데.]
[이게 뭐야……?]
[목욕시켜주는 중이었다. 깨면 데리고 갈 곳이 있었거든.]
[…데리고 갈 곳?]
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나를 꼼꼼하게 씻겨주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말린 뒤에 평소에 즐겨 입는 홈드레스를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영문도 모른 채 파이의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 저택 1층에는 한껏 차려입은 레이라와 에이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디 중요한 행사라도 있어? 어제 아무 말도 없었잖아.]
하지만 두 사람도 그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기만 했다. 그리고 에이든이 정문을 열어주자, 그 건너에 익숙한 얼음 나무가 우아한 자태 그대로 서 있었다.
‘뭐야? 또 마력?’
나는 정문 너머로 건너가며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파이에게 물었다.
[이게 다 뭐야?]
[혼인식 해야지.]
[…혼인식? 혼인… 식?!]
그랬다. 그건 내 주변 사람들이 나한테 비밀로 하고 진행한 혼인식 자리였다.
혼인식 장소는 블랑제국 황궁의 얼음 나무가 있는 지하였다. 얼음 고양이 블랑이 꼭 이곳에서 치렀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기도 나의 혼인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고.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지만.
특별히 블랑이 얼음으로 만들어준 꽃나무들과 꽃망울들이 한가득 둘러싼 그곳은, 정말 꿈같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눈이 부셨다. 이러다가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만큼.
[진짜, 내 혼인식 맞아요?]
[응.]
[아니, 주인공이 모르는 혼인식이라는 게 말이 돼요?!]
[깜짝 비밀 혼인식을 진행하면 좋아할 거라고 하던데.]
[…누가?]
[레이라가.]
그래서 또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오물거렸다. 그러다가 레이라의 손에 이끌려 얼음나무 뒤에 세워진 간이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이, 이, 이건 또 뭐야?!]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혼인식 드레스! 마음에 들어? 네 취향대로 만들라고 했어.]
내 몸의 치수를 정확히 알고 있는 파이가 블랑 제국의 황실 제단사에게 내 혼인식 드레스를 맡겼단다. 그리고 에이든이 이 혼인식을 기획하고 레이라가 거들고.
‘대체 나만 두고 자기들끼리 언제 쑥덕쑥덕한 거람?!’
비즈와 레이스가 섬세하게 문양을 만들어내는 그 하얀 드레스를 입고도 여전히 당황했다. 손에 레이라가 직접 만들었다는 백장미의 부케를 쥐고도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에 새하얀 면사포를 썼음에도… 나는 그저 멍청하게 두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나, 이 혼인식 준비하면서도 몇 번 울컥한 거 있지?”
“왜?”
“모르겠어. 그냥 기분이 그렇더라. 감격스럽고, 막 이 옷을 입는 네 모습을 상상하니까 괜히 눈물이 나고. 아무튼, 그랬어.”
또 레이라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그래서 괜히 나까지 코가 따가워졌다.
“레이라…….”
“넌 울면 안 돼. 드레스 망가져.”
코를 훌쩍거리는 레이라가 손수건으로 내 눈가를 콕콕 눌러주며 다독여준다.
“걱정 많이 했는데 그래도 드레스가 어울려서 다행이다. 나, 기분이 이상해.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딸이라니. 그건 또 느낌이 다르긴 하겠지.”
“지금이니까 말하는데 너하고 있으면 다 큰딸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나 본가에 동생들이 많잖아. 막내 여동생을 딸처럼 생각했던 거하고 비슷했으니까.”
그래서 요새 그렇게 나만 보면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던 걸까?
어쩐지 심장이 조금 간질거렸다.
“원래 마세티앙 제국에서 황실 연회장을 빌려주겠다고 했데. 우리 치치르자 왕국에서도 얼마든 홀을 빌려주겠다고도 했었고.”
“파이한테 얘기 들었어. 블랑이가 내 혼인식을 보고 싶다고 했다며.”
“맞아. 내가 그랬어. 너희 둘이 연결된 건 내 공이 크다고.”
드레스 치맛단을 갈무리해주는 레이라 대신, 나뭇가지 위에서 블랑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도도하게 나뭇가지를 사뿐사뿐 걷는 블랑이 내 옆으로 뛰어내리더니,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드레스를 살펴본다.
“드레스 예쁘네. 얼음으로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네가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거절하더라고.”
“얼음으로 만들면 예쁘긴 하겠는데. 그 말대로 살갗이 얼어붙는 느낌이긴 할 것 같네. 잘 지냈어, 블랑?”
바로 앞에서 엉덩이를 부착하고 앉는 블랑이 얼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자주 찾아온다는 네가 오질 않아서 외로웠어. 에이든 녀석도 연애하느라 바쁘고.”
“일하느라 정신이 없네. 네가 밖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묶인 몸이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나는 이 혼인식을 비밀로 한다는 말에 반대표를 든 유일한 생물이라고.”
…꼭 내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듯 당돌하게 말하는 걸 보니, 칭찬해달라는 것 같다. 얼음 고양이나 드래곤이나, 다를 게 없네. 원래 인외종족이 다 그런가?
“그랬구나. 진짜 나만 몰랐나 봐. 난 진짜 생각지도 못했다고.”
“그런 것 치고 기분 나빠 보이진 않는데?”
사실 기분이 나쁠 시간도 없었다. 또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저 얼음꽃들로 꾸며진 공간에 한껏 반해버리기도 했고. 드레스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너무 아름다웠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파이가 일주일 전에 청혼한 이후로 혼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아서 섭섭하긴 했다. 낮에 쌓아둔 욕구를 밤마다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지. 일단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나중에 말할 기회가 생기면 물어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 서운했던 감정들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것 같다. 그가 내게 깜짝 선물을 주기 위해 준비하면서 내 생각들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싶어서. 그래서 더 감동을 하게 된 것 같았다.
너무 기특하잖아?!
드레스를 직접 다 매만져준 레이라가 마지막으로 머리에 쓴 면사포를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려준다. 그리고 굉장히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아름다운 반려를 기다리시는 부군께 나가볼까요?”
파이는 또 얼마나 근사하게 차려입었을지 기대된다. 가게에서 앞치마를 두른 모습도 멋있었는데.
나는 떨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주체하지 못하는 심장을 억누른 채 간이 드레스 룸 밖으로 나갔다.
“…응? 헉?”
순간 눈앞에 드리워진 상황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예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맙소사. 이건 대체 또 무슨 일이야?!’
온 힘을 다해 꾸며놓은 혼인식 자리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파이와 에이든이 당장에라도 공격할 듯 대치하고 있는 상대방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두 사람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승마복을 입고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는 여자. 그리고 초콜릿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향하는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
바로 루즈 제국의 황제인 하유르와 비플라츠 공작인 리브엘이었다.
세상에 저 두 사람이 여긴 어떻게 온 거람?
“치즈.”
게다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리브엘이 다정하게 나를 부른다. 동시에 나와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근사한 예복을 차려입은 파이의 표정이 더 험악하게 굳어져 버렸다.
‘울적하다, 울적해. 기껏 준비한 혼인식이 엉망이 되겠어.’
리브엘과의 첫 데이트 이후, 나를 감시하던 이들도 완전히 사라졌고 리브엘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차라리 이대로 리브엘과 멀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나타나도 이 시점에 나타나는 거냐고. 그것도 내가 정말 보기 싫은 저 여자하고 같이!
하유르만 보면 과거 그녀가 파이에게 대놓고 추파를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또 그녀가 파이에게 키스했던 일도!
“두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어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내 의지와 다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두 사람이 나와 파이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 경계했다.
하지만 파이는 내가 그들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매우 싫은가보다. 아주 질색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나를 제 등 뒤에 숨기려고 애를 썼다.
슬프게도 그 덩치가 참 대단하게 커서 앞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진 기분이었다.
“파이.”
“그만 꺼지라고 했다. 둘 다. 전부 박살 내버리기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파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그가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팔뚝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의 상체 너머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궁금해서.
그러다가 나를 보고 있던 리브엘의 눈과 딱 마주쳐서 흠칫 놀라긴 했지만.
파이의 목소리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하유르가 굉장히 아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두 사람 혼인식 축하해주러 온 건데. 하객에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카르디옌?”
“초대하지 않은 하객이 멋대로 찾아오는 것이 더 무례한 짓 아닌가.”
“이런 기쁜 날에는 당연히 하객이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겨우 증인 두 사람만 세워두고 혼인식을 치르면, 치즈가 과연 기뻐할까?”
아니, 저 언니는 또 왜 나를 걸고넘어지는 거야!
그런데 또 틀린 말은 아닌지라 반박을 못 하겠다.
내가 생각했던 혼인식은 따뜻한 봄날, 저택의 야외에서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는 거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 왕국 사람들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파이가 이렇게까지 준비한 혼인식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그랬는데 불똥이 내게로 튀었다.
“치즈.”
“응?”
“네 생각은 어떻지?”
파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심각한 선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간 갈고닦은 연기력을 선보일 때가 온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올바른 대답은 단 하나다.
“나는 파이가 해주는 건 다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