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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20화 (120/132)

# 120화

당장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다. 당장 저 예쁜 말만 하는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진다. 마음을 인정한 이후로 내 심장에 그에 대한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넘쳐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내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내 얼굴은 평소에도 실컷 볼 수 있잖아. 이건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거다. 식기 전에 먹어, 어서.”

앞에 놓인 접시의 쫄깃한 느낌의 고기가 붉은 양념에 뒤덮여 고소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음식에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말해야 해. 어서.’

그런데 뭘 어떻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진다. 대뜸 이 자리에서 우리 당장 혼인하자고 말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곤란함에 입술만 오물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마실 것이 없군. 음료를 사러 가야겠어.”

내 팔뚝을 잡은 파이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내 손에 든 포크를 빼앗아 내려놓고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인파에 섞여 그를 뒤따랐다.

곧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선 뒤에 멈춘 파이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어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애틋한 눈빛에 또 심장이 난리도 아니다.

“무슨 일이야? 왜? 레이라가 네게 딱히 나쁜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그게 아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할수록 그의 표정도 점점 험악해져 간다. 익숙한 선홍색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초조함이 깃든다. 곧게 뻗은 검은 눈썹 끝이 점차 위로 치솟아 올랐다.

조각 같은 평온한 얼굴이 안달 나는 그 모습에 문득 웃음이 터졌다.

“치즈?”

과거 내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그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생떼를 써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그였는데, 이제는 미묘하게 변하는 내 표정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모습에서 나를 향한 크나큰 애정이 느껴져서 또 코끝이 찡해졌다.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그의 얼굴이. 내게만 머무는 그 눈동자가. 나만을 부르는 그의 입술이 내게 너무 소중하다. 도저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파이가 루즈 제국 황제랑 혼인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내 뺨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살짝 비볐다.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손바닥은 여전히 부드럽다. 그 촉감을 뺨으로 느끼며 기분 좋게 웃는데, 파이는 그대로 얼어버린 채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뭐라고?”

“하유르 그 사람이랑 파이랑 혼인하기로 되어있다던데요?”

두 번 확인을 받고 나서야 파이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진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 말 자체를 매우 격렬하게 불쾌해하고 있음을.

“맹세코 그런 일은 없어. 오해하지 마라. 누가 그런 헛소리를 퍼트리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 흡혈귀 새끼가 그런 말을 했나?”

“네. 루즈 제국에서 그런 내용의 밀서를 받아 협력해달라고 그랬대요. 나와 파이를 떼어놔 달라고.”

아, 따뜻해. 적당히 폭신한 이 손바닥 느낌이 너무 좋아.

그가 침묵하는 사이에 나는 그의 손바닥을 열심히 내 뺨에 새겼다. 그러나 곧 그가 내 뺨에서 손을 떼어내 사뭇 아쉬워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머릿속에서 당장 지워버리도록 해. 이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그럴 일은 없어.”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춘 파이가 내 양쪽 어깨를 붙잡고 나를 진중하게 설득한다. 이미 아니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어서 별로 놀랍지도 않다. 또 그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털어놓은 사실들이 나를 기쁘게 했다.

“다 잊었어요. 깨끗이.”

얼굴에 절로 그려지는 미소를 감출 이유도 없다. 나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살짝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그의 예쁜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꾹 눌렀다.

말랑한 입술이 맞닿은 곳이 화끈거렸다. 야릇한 감촉만으로도 머릿속이 다 녹아버린다. 하지만 바짝 굳어있는 파이의 입술이, 서서히 달아오른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히고 있다.

“파이, 키스해줘요.”

입술을 살짝 떼고 살짝 내리깐 눈으로 교태를 부렸다. 스무 살의 성년이 되던 그 날, 어떻게든 파이를 유혹하려고 열심히 연습했던 그 표정으로.

그런데 파이는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더니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가? 역시 정신적으로 충격이 큰가 보군. 아무래도 쉬어야겠어.”

…이, 이게 아닌데?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자 진짜 심각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파이가 그 자리에서 나를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바로 이동할 테니 눈 감아.”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자, 곧 옅은 바람이 밀려오면서 시끄러웠던 주변이 고요해진다. 파이는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익숙한 내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머리 장식 풀고 옷 갈아입고. 목욕은 내일 하더라도 세안 정도는 하고 자면 되겠어.”

여전히 멍하니 눈꺼풀만 빠르게 파닥거리는 나를 파이가 화장대 의자에 앉혀놓는다. 그리고 빠르고 섬세하게 내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핀들을 하나씩 제거해주었다.

거울에 비치는 그의 표정이 심각해 보인다. 진짜 내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나저나 나 지금, 파이한테 거절당한 거야?’

순간 갑자기 수치심이 확 몰려왔다. 당연히 내가 먼저 키스하면 옳다구나 받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병자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가 빠르더니.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미련 곰탱이같이 구는 거람?

“파이. 나 어디 아픈 거 아닌데요.”

나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투덜거리며 거울 속의 그를 흘겨봤다. 그러자 손놀림을 멈추지 않는 그가 눈동자만 굴려 거울 속의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애써 아닌 척 참지 않아도 된다. 꽤 많이 놀랐을 텐데 오늘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픈 거 아니라니까 그런다!

진짜 그 타이밍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분위기 잡지 말고 대번에 밀어붙였어야 했어. 그에게는 직설적인 말이 더 잘 통한다는 걸 잠시 망각했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결판을 짓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매우 진지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절반만 핀을 빼낸 상태라 엉망이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치즈?”

“이리와 봐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끌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푹신한 소파에 그를 앉혀둔 뒤, 나는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아프지 않아요. 정신도 아주 말짱해요. 아까 놀라기는 했어도 겨우 그 정도에 충격을 받거나 미칠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고.”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다.”

“결과적으로 죽지 않고 살았잖아요? 아무튼,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내 얘길 들어요.”

나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소파 깊숙이 무릎을 파묻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시선을 마주하며 조금 수줍게 웃었다. 그러자 파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 파이한테 사과부터 할게요. 사실 파이가 미워서, 나를 외롭게 만든 파이가 너무 미워서 복수하려고 파이에게 못되게 굴었어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뱉어내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사실 리브엘하고 데이트하면서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내 마음을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데이트가 즐거울 줄 알았는데, 내내 파이 생각만 했거든요.”

내가 말을 꺼낼수록 파이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내가 파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여전히,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게 깨달았고요.”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파이의 표정이 꽤 재밌다. 아마도 내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랐나 보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내 진심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잠깐 방황하느라 가출했었는데…… 파이가 받아준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받아줄래요, 나?”

그러고도 파이는 멈춰버린 기계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조금도 예상 못 했다는 표정이다. 하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멋대로 끼어들지 말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으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네가 말하는… 뜻이,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 건가?”

“내가 파이 생각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맞을걸요?”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최후의 한 방을 날렸다.

“우리 혼인하… 꺅?!”

진짜 깜짝 놀랐다. 분명 1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은 파이였다. 그런데 한순간 시야가 빙글 돌더니 등에 푹신한 소파가 닿았고, 나와 파이의 위치가 뒤바뀌어있었다.

“다시 말해봐. 네가 방금 했던 말들.”

다행히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 입술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감격스러워.’

늘 목석같다고 느낀 그가 점점 더 보통의 인간처럼 감정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있다. 또 그럴수록 내 가슴을 더 뒤흔들어놓았다. 이 예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이 나라서 더 기뻤다.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그의 매끄러운 뺨을 매만졌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미 5년 전에 고백했던 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그래서… 이 심장이 완전히 멈춰버릴 때까지, 파이와 함께 지내고 싶어요. 영원히.”

“그 말 번복하지 마라. 지금의 네 결심이 또 변심한다 해도 놓아주지 않겠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선홍색의 눈동자가 조금 무섭긴 했다. 그게 또 나를 향한 대단한 집착이라서 그 오싹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소유욕이 나를 더 안정시켜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파이야말로 나한테 잘해요. 잘해야 내가 평생 곁에 있어 주지.”

그제야 그가 굳은 표정을 조금 풀긴 했으나 아직도 어리둥절한가 보다.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가볍게 매만지고는 양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린다.

“나 역시 네게 사과하고 싶다.”

“파이가 나한테 사과해야 할 일은 참 많기는 하죠. …알았어요. 끼어들지 않을게요. 말해요.”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그에게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여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네게 솔직한 내 생각을 전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긴 시간을 돌아오진 않았겠지. 너를 잃을까 봐, 네가 나를 떠날까 봐 혼인을 거절했던 내가 참 바보였다.”

진중한 그의 음성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야 나도 확신이 섰어. 나도 너를 사랑한다. 나 역시 너와 영원히 함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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