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나와의 혼인을 허락해줘, 치즈.”
생각지도 못한 청혼을 받고도 나는 그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사고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그 사람은 네가 없어도 너를 대신할 이가 얼마든 있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네가 없이는…….”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없어도 나를 대신할 이가 있다고? 파이에게? 리브엘의 청혼보다 그 말이 더 신경 쓰이면서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러자 리브엘이 얼굴 가득 그리던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설명을 이었다. 물론 반지를 끼운 내 왼손을 꼭 붙잡은 채로.
“얼마 전에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서찰이 하나 왔었어. 블랙 드래곤 카르디옌에 관한 이야기로, 그가 루즈 제국의 황제와 혼인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지.”
루즈 제국의 황제라면… 하유르? 혼인을 앞두고 있다고?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래서 내게 부탁을 하더라. 그 사람, 그 드래곤이 치즈 너를 이용하고 있는 거니까 늦기 전에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파이가 하유르와 혼인을 한다니.
그러다가 몇 달 전, 에이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과거 에이든이 하유르에게 약점을 잡혀 나와 파이를 갈라놓기 위한 계략을 세웠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리브엘에게 접근한 걸까?
‘…그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악질이네. 파이보다 더.’
파이가 그런 이야기를 숨겼을 리가 없다. 또 나 몰래 다른 누군가 혼인을 맹세했을 리는 더더욱 없고. 지난번 하유르가 찾아왔을 때도 파이는 루즈 제국의 황제들을 증오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하유르와 혼인?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다.
나는 리브엘을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자세를 바로 고쳤다. 그리고 그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된 마음으로 타인을 우롱하는 것만큼 악질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는 내 감정을 속이면 나도 리브엘도 서로 힘들어질 것이다.
“있잖아, 리브엘? 솔직하게 말하기 전에 하나만 믿어줘. 네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려는 건 아니었어. 이건 진심이야.”
최대한 침착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사이, 리브엘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묻는다.
“갑자기 지금 왜 그런 말을 해?”
지금 털어놓아야 한다. 내 솔직한 마음을.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살짝 내리깐 뒤에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서찰의 발신인이 대충 누구인지 짐작은 가. 내가 아는 사람일 것 같네. 그 여자가 이미 예전부터 파이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안다고? 누구인데?”
“루즈 제국의 황제. 나, 그 여자와도 아는 사이고. 그보다 일단 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네 청혼을 받을 수가 없어. 미안해, 리브엘.”
레이라의 말대로 너무 멀리 돌아오기는 했다. 옹졸하게 자존심을 세우다가 소중한 주위 사람들을 이유 없이 괴롭힌 것 같았다.
“꽤 많이 고민했었는데 고민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내 감정이 변하질 않아. 네 말대로 마음에 품은 사람의 존재가 너무 커서…….”
솔직한 내 심정은 그래, 아직도 파이가 좋아. 좋아 죽겠어. 과연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솔직히 모르겠고. 그 상대가 리브엘이라도… 힘들 것 같기는 해. 오늘도 내내 리브엘과 같이 있었음에도 파이가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래서 깨달았다. 리브엘과의 사이가 아무리 친밀해진다 해도 내 가슴에 가득 채워진 파이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어쩐지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아버렸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아니라고 발뺌했었다. 나 자신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했다. 치졸하고 부끄럽게 모르는 척했다.
단지, 혼인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아껴주는 파이가 얄미워서.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인지했으면서 그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리브엘에게도 쓸데없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정말 바보 같아, 나.
“처음부터 솔직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할 말이 없어. 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널 받아준다 해도 서로가 불행해질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닐 수도 있잖아. 네가 그 사람과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후회한다 해도, 지금의 내 마음은 이미 파이에게 전부 주었으니까. 선택도 후회도 내가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사실 파이가 다른 사람과 혼인한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파이가 지금껏 내 투정을 받아주면서 얼마나 심란했을지 이해가 되기도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조심스레 빼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굳어버린 리브엘을 조심히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바닥에 반지를 쥐여주었다.
“날 미워해도 좋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내 감정을 거짓으로 속여서 리브엘 너도 아프게 만들었어. 그건 백번 천번 사죄할게.”
당장 돌아가고 싶다. 저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파이를 떠올리자 심장이 발작하듯 크게 뛴다. 파이에게 돌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숨이 끊어질 만큼 격렬한 키스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아마 파이라면 좋다고 덤벼들 테니까. 내가 뻔뻔하게 키스해달라고 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키스를 해줄 테니까.
내 진심을 인정한 이후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마 레이라에게도 리브엘에게도 꽤 많이 사과해야 할 것 같다. 특히 리브엘이 나를 평생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평생 그에게 사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리브엘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잃어버렸던 길을 되찾았으니까.
“정말 미안해, 리브엘. 너와 세 번의 데이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먼저 돌아가 볼게.”
빨리 돌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자, 잠깐만!”
그러나 내 손목을 덥석 잡는 리브엘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리브엘의 표정이 시야에 한가득 보인다. 아마 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겠지. 그도 나와의 혼인을 고대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그럼 내게는…. 내가 네 마음에 들어갈 틈이…,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야?”
잘게 흔들리는 초콜릿 눈동자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고백한 상대에게 차이는 슬픔을 세상에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래서 리브엘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약해지면 안 된다. 차라리 단호하게 내 뜻을 밝히는 게 낫다.
“한 사람의 심장에 자리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고 생각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가 채워진 상태고, 아마 꽤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 비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치즈…….”
“네가 불러주는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을 나는 저버릴 수 없어.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리브엘 네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조금도 남아있질 않아.”
그런데도 리브엘은 잡고 있는 내 손목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아카데미 입학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하니까 꽤 오랜 시간 짝사랑에 가슴을 졸였을 거다. 그래서 그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 기분을 안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손등을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이런다고 위로가 될 수 있진 않겠지만 최대한 그를 보듬어주고 싶었다.
“리브엘에게도 언젠가는 나보다 더 좋은 반려자가 나타날 거라 믿어. 많은 사람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열심히 살다 보면 신께서 너를 위한 상대를 내려줄 거야.”
“…….”
“신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어. 너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이상 너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지마.”
“응?”
“가지… 말라고.”
나를 더 꽉 잡아 쥐는 그의 힘도 파이 못지않게 세다. 게다가 나를 붙잡는 리브엘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라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괴로움이 뼛속까지 전해져서 괜히 울컥했다.
“미안해, 리브엘.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다시 입을 꾹 다문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인다. 늘 상냥하고 밝게 웃던 모습만 봐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냥 친구 사이로 남아있었어야 했는데.
“정말, 나는… 안 되는 거야?”
“미안해…….”
“그래. 알았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네.”
느낌이 이상하다. 리브엘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바뀌었다. 초조함에 떨리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해져서 소름이 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리브엘의 초콜릿 눈동자에 낯선 광채가 드리워진다.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리… 리브엘?”
“아쉬워. 처음으로 발견한 희망이 내게서 사라진다는 것이.”
늘 그랬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는 그가 여전히 차디찬 손을 뻗어 내 뺨을 가볍게 쥔다. 반대쪽 손으로 쥔 손목을 놓치지 않을세라 꽉 쥔 채로.
“내 손에 넣을 수 없다면… 그 짐승 새끼도 가질 수 없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빨간 경고등이 스치며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온몸의 신경세포가 멈춘 것 같았다. 리브엘의 기묘한 미소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내 목덜미를 향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이제야 먼 길을 돌아 방황하다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럴 수는 없어!
“내, 내 피 마시면 주… 죽을지도 몰라! 신과 드래곤의 피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힘껏 소리를 질렀다.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내 목소리가 터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리브엘이 움찔거리며 그대로 멈췄다.
“…뭐?”
“나 신의 열매를 먹었어. 그거 먹고 죽는 줄 알았는데, 파이가 피를 줘서 수명이 늘어났다고. 그리고 신의 눈물도 먹었으니까! 뭣도 모르고 내 피 마셨다가는 너도 지옥 갈걸?!”
반은 거짓 협박이지만. 이미 판단력을 상실한 리브엘이 내 말에 넘어가 주길 바랐다.
‘제발!’
리브엘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꾹 감고 있는 눈을 한쪽만 살짝 떠서 리브엘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로 동상처럼 굳어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게 움찔거리며 내게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간다.
…내 말이 먹혔나?
“저 흡혈귀 새끼가 기어코 이 사달을 벌이는군.”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파이의 목소리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화난 짐승처럼 목을 긁으며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이빨을 세워 뼈까지 씹어 먹을 기세다. 내장이 다 바짝 조여질 만큼 거칠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파, 파이!”
고개를 돌리자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에 또 검은 비늘이 돋아버린 파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단 안전한 파이의 품에 달려들었고, 그런 나를 보호하려는 듯 그가 두 팔로 꽉 안는다.
그제야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이 그의 품이자 그의 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