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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16화 (116/132)

# 116화

치치르자 왕국의 건국기념제는 연말을 장식하는 대단한 축제라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수도 전체가 굉장히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한쪽 구석에서는 신나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모여 춤을 췄다. 반대쪽에서는 서커스단 사람이 재주를 부리고 있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차 바깥의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동화될 수 없었다.

“치치르자 왕국은 워낙 강대국으로 유명해서 평화롭지. 사람들도 대체로 여유가 많은 편이고 치안도 꽤 좋아.”

“응. 그런 것 같아.”

“치즈.”

“응?”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리브엘이 나를 불러서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어딘지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 지금만큼은 내게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

“아…….”

지금 나 데이트 중이었지. 혼란스러운 감정에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 망각했다.

“미안해, 리브엘. 축제는 오랜만이라 바깥에 정신이 팔렸나 봐. 집중할게.”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그리는 그가 내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나의 삶들을 전부 알아내겠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질문에 최대한 자세하게 대답해주었다. 파이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하면서.

“뭐, 그렇게 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거야.”

“뭔가 평탄해 보이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네. 늘 밝은 얼굴이라서 참 사랑받고 자랐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어.”

사랑이라…….

쓸데없이 대단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라기는 했다. 내 손짓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주시하는 드래곤이 곁에 있었으니까.

“드래곤은 자기 소유의 것에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집착을 보이잖아. 드래곤이 얼마나 똥고집인지 모르지?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걸 바로 얻어 본 적이 없어. 오죽하면…. 흠, 뭐 아무튼 그래.”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다. 고백했다가 스물일곱 번이나 차였다는 걸 데이트하는 상대에게 털어놓을 뻔했어.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잠시 고민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와 이렇게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 건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파이와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곤 해서 고민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리브엘이 조심스레 묻는다. 그래서 나는 그제야 손뼉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리브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

나는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최대한 관심 있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내 관심이 굉장히 쑥스러운지 뺨을 살짝 붉히면서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나는…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 같은 게 없어서. 어머니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아버지를 미혹해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들었어. 그 이후로는… 뭐, 지금과 같지.”

자신의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점점 리브엘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의 말대로 그가 살아온 과거가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별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눈치이기도 하고.

“오래 살면 감정이 점점 메마른다고 하던데, 너도 그랬어?”

“숨 쉬는 것도 귀찮은 적이 있고. 매일 똑같이 태양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게 싫을 때도 있고. 아예… 세상이 멸망해서 죽길 바란 적도 있고.”

참 이상하지? 리브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머릿속에는 파이가 떠오른다. 파이가 간혹 폭주하는 이유도 그와 비슷했으니까.

“영생을 산다고 좋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 지겨운 삶을 견뎌내서 치즈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처음으로… 내게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서 지금까지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다 네 덕분이야.”

그의 두 눈동자에 영롱한 빛이 드리워진다. 감격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맞잡는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차가운 손길에 살짝 소름이 일었으나 애써 감췄다.

“네가 세상에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만나게 될 운명이라는 걸 신이 점지해준 게 분명해.”

내 손을 잡은 그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 하나로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애가 타게 기다려왔는지 느껴진다.

언제나 나를 향해 달콤한 빛을 머금던 초콜릿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녹아내릴 듯 달달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답답해졌다.

“도착했습니다, 각하.”

그 부담스러운 기분과 함께 죄책감이라는 것을 깨닫던 그 순간. 마차가 멈추면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리브엘이 내 손을 놓아주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걸까?’

리브엘이 마부가 열어주는 마차 밖으로 먼저 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잠시 빤히 쳐다봤다.

“치즈?”

“아, 응.”

정신 차리자. 일단 지금은 리브엘과 데이트 중이니까 그에게 실례되는 일을 하면 곤란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 왕궁 아니야?”

“맞아.”

시내를 돌아다니면 저 멀리 높은 산 중턱에 우뚝 서 있는 성이 있었다. 그게 바로 치치르자 왕궁이었는데 그게 바로 눈앞에 있다. 절대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왕성이라 어리둥절하다.

“여긴 왜……?”

“건국기념제 기간에만 왕성을 공개하는데, 그중에 특별한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어.”

“그런 곳이 있었어?”

“예약을 하면 갈 수 있는 곳이지. 원래는 다른 귀족이 예약해둔 곳인데 내가 꼭 필요하다고 했더니 선뜻 날짜를 옮겨주었거든.”

지난번 마세티앙 제국에서 황실 무도회가 열리던 그 장소가 떠올랐다. 치치르자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의 귀빈실도 나름 화려하긴 했었지. 왕성이라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제국의 그 연회장만큼이나 휘황찬란할지도 모른다.

곧 리브엘의 에스코트를 받아 한적한 성안 쪽을 걸어서 더 깊은 곳으로 진입했다.

“발밑 조심해.”

“응.”

계단을 올라 위에 도달하자,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널찍한 정원이 나타났다. 넓기도 넓지만 마치 퍼즐처럼 완벽하게 잘 짜인 모양에 환호가 절로 터져 나왔다.

“나 이렇게 큰 정원은 처음 봐.”

“치치르자 왕국 자체가 워낙 영토만 넓어. 그에 비하면 정원도 큰 편은 아니지. 이건 타국의 사절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겠지?”

“정답.”

우리는 정원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거닐며 알록달록 예쁜 꽃들을 구경했다. 향긋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인다. 그래도 외관상으로 봤을 때, 역시 블랑 제국의 얼음꽃이 최고인 듯.

“이쪽으로.”

정원을 빠져 나와 거대한 성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왕궁의 시종들과 시녀들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만찬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있으니 바로 로잘리아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종 중 한 명이 먼저 앞장서서 출발했다. 리브엘은 내게 가벼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내 손을 더 꼭 잡아 시종의 뒤를 따랐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걸음을 맞추었지만…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파이와 함께 다닐 때는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초조함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긴장하지 말고. 괜찮아.”

리브엘은 내가 낯선 왕궁에 들어와서 긴장한 줄 아는지 내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나는 그 뜻 모를 감정을 일단 뒤로 하고, 리브엘과 함께하고 있다는 거에 집중했다.

계단 하나를 올라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시종이 방문을 열어준다. 그 안을 리브엘과 함께 들어서자마자 또 한 번 환호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우와…….”

정면의 커다란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장관에 이끌리듯 창가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해가 완전히 져버려서 밝은 보랏빛의 하늘 아래로 수많은 불빛이 일렁인다.

아마 리브엘이 건국기념제 때만 볼 수 있다는 장면이 바로 이것인가 보다. 축제로 인해 수도 곳곳의 길목을 밝히는 불빛들이 꼭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반짝거렸다. 워낙 왕궁이 높은 지대에 있다 보니 수도가 발아래 깔린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어?”

“처음 봐. 이렇게… 멋진 야경은.”

“나도 말로만 들어봤던 거였는데 제법 좋네. 누군가의 옆에서 이렇게 같이 나란히 보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고… 그 상대가 치즈라서 더 좋고.”

나와 함께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리브엘이 수줍게 웃는다. 나도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이고는 시선을 돌려 바깥을 구경했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리브엘과 함께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왕궁 전속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

아쉽게도 리브엘 역시 샐러드 몇 조각과 피가 줄줄 흐르는 고기 몇 점을 집어먹은 게 다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진다. 파이는 아예 음식 자체를 먹지 않기는 했지만.

…왜 또 파이가 생각나는 건지.

조금만 방심해도 파이의 마지막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마다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 들어 속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를 썼다.

“아직 정리되질 않는 거야?”

마지막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으려던 찰나, 내 맞은편에 앉은 그가 뜻 모를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고기를 입에 밀어 넣어 오물오물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테이블에 두 팔을 얹어놓고 상체를 내 쪽으로 숙여오는 리브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네 마음속에 자리한 그 사람의 존재가 너를 괴롭히는 것 같은데.”

괜히 뜨끔했다. 자신도 긴가민가했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무안해지기도.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 포크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훔친 뒤에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목 뒤로 넘기면서 벌렁거리는 마음을 다스렸다.

“어, 그러니까 그게…….”

“당장 날 받아달라는 뜻으로 데이트를 제안한 건 아니었어. 애정이야 천천히 쌓으면 되는 거니까. 나는 우리의 관계가 꽤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리브엘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내 옆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리브엘?”

“아직 이르다고 생각되지만, 네가 좀 더 쉽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내 왼손을 조심스레 잡아 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서늘한 그의 손길만큼이나 차가운 링이, 내 손가락 사이즈에 딱 맞게 끼워진다. 커다란 에메랄드 보석이 매달린 반지가 반짝거리면서 낯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기분이 이상하다.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드는 건지. 아름다운 반지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손가락에 경련이 오는 것 같았다. 내 것이 아닌 반지를 억지로 끼고 있는 것 같아서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리브엘이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나와의 혼인을 허락해줘,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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