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반응이 묘하군.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파이가 내 이불을 걷어내 나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나는 방금 꾸었던 꿈의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휴일이라고 너무 잠만 자면 더 피곤할 거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식사부터 하고 오늘의 일과를 시작해야지.”
내 눈가에 맺힌 눈곱을 떼어내 준 파이가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서 정리해주었다. 그 뒤에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식당으로 안내해주는 것이 꼭 시종 같기도 하고 보모 같기도 하고.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파이가 건네주는 다디단 차를 마셨다. 방금 깨서 그런지 연신 하품을 뱉어내 눈물이 살짝 맺혔다.
혼자 분주한 파이가 밖으로 나가고, 곧 잠이 덜 깬 레이라가 안으로 들어와 나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일찍 일어났네, 치즈?”
“눈이 일찍 떠졌어. 너도 지금 일어난 거야?”
“응. 그 차는 뭐야? 향이 달달한데?”
“마셔볼래? 그런데 네 취향은 아닐걸? 과일을 말려서 우려낸 거래. …그런데 파이는 어딜 간 거람?”
레이라에게 마세티앙 제국에서 내게 보냈다는 차를 맛보게 해주려고 했는데 파이가 보이질 않는다. 아까 나가긴 한 것 같았는데.
그때 갑자기 레이라가 두 눈을 반짝 빛낸다. 그러더니 상체를 숙여 두 팔을 테이블에 얹어놓고는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직도 얄미워? 쉽게 용서할 수 없고? 널 외롭게 만든 대가로 상대방도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응?”
“아니면 공작 각하를 이용해 질투심을 유발하겠다는 작전?”
“…무슨 소리야?”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추궁하는 레이라가 이번엔 손깍지를 껴 그 위에 턱을 얹어놓는다. 어쩐지 예리한 눈빛이 독수리처럼 매서워 보인다. 방문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본 레이라가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솔직하게 털어놔 봐. 공작 각하에 대한 감정이 친구 그 이상으로 느껴지기는 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것 같아’라는 대답이 나오지도 않았고, 거짓 감정으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네 그분은?”
리브엘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파이가 거론되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뛴다. 심장에서부터 목을 타고 뺨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간질거림에 또 당황해버렸다. 또 방금 꾸었던 꿈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레이라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는 게 어때? 마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부, 부정한 건 아니지만…. 아니,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파이를 직원으로 채용해?”
“직원 백여 명분을 혼자서 할 수 있는 분이니까. 가게의 사장으로서 순익을 계산해보면 그분만큼 우리에게 득 되는 사람은 없을걸?”
틀린 말이 아닌지라 반박할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요리만 신경 썼고, 레이라가 가게의 전반적인 수익을 책임졌다. 각자의 일이 정확하게 분배되어 있었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 역시 레이라의 담당이었으니까.
나는 모른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이라는 사용인이 챙겨다 준 차를 마시고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야기의 논점을 흐리진 말고. 지금은 사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친구로서 널 진심으로 걱정하니까 하는 말이야. 정말 네 본심이 뭔지 궁금해.”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지 않겠지.”
입을 삐죽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레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그랬던 거구나.”
“…무슨 의미야, 그거?”
“나는 우리 치즈가 팜므파탈로 거듭나려는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
“팜므파탈?”
“희대의 요부라고 하지.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성격상 힘들 것 같다는 예상은 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네.”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한숨을 쉬는 레이라의 행동에 꽤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만큼 말 못 하고 혼자 걱정을 했다는 것도 안다. 그게 레이라의 성격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으니까.
곧 파이가 직접 아침을 가지고 들어와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아예 집사 노릇을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뭐예요?”
나는 내 앞에 놓인 커다란 쟁반 안에 담긴 음식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오목한 그릇에 담긴 것은 수프 같았다. 걸쭉한 느낌의 황갈색 액체는 딱 수프인데 속에 면과 고기가 섞여 있어서 꼭 국물 느낌이다. 그리고 그 옆에 먹기 좋게 잘린 크레페가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누워 있었다. 크레페는 알겠는데 그 국물 같이 진한 색의 수프는 처음 보는 거였다.
“보통 수프보다 목 넘김이 좋다고 타국에서 꽤 유명하다더군. 맛을 봤었는데 먹기 좋을 거다. 만약 입맛에 맞지 않으면 크레페를 먹도록 해.”
신메뉴를 가져다주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익숙한 음식을 함께 곁들여 오다니. 분명히 이 새로운 음식은 어제의 바닷가재 요리에 대한 견제인 게 분명하다. 내가 해산물을 즐겨 먹지 않으니까 해산물이 아닌 요리 중에서 고르느라 꽤 애를 썼겠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어디 한번 맛이나 봐볼까?”
“잘 먹겠습니다.”
레이라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음식을 내려다보며 거침없이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 미각을 총동원하여 맛을 평가했다.
“맛있어. 고소하고 전혀 느끼하지 않아. 아침에 부담 없어서 속이 편할 것 같아. 국물이 조금 특이하네. 전분 가루를 넣은 것 같고.”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국물을 한 입 떠먹어봤는데, 정말 생각 외로 보기보다 맛있었다. 아침에 입맛이 없어서 식사하기가 애매한 내게는 잘 맞았다. 내일 아침에도 먹고 싶을 정도로.
위장을 따끈따끈하게 채우고 나서 레이라는 잠시 볼일이 있다고 해서 나갔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파이가 가져다 준 차도 정말 내 입맛에 너무 잘 맞아서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오늘은 집중해야 하니까 레몬티로 마셔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뜻한 물에 가루를 개어 호로록 마시면서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 그렇게 며칠 하지 못한 레시피 연구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제철 과일만 사용해 타르트를 만들기로 해서 그에 대한 자료연구가 꼭 필요했다. 또 여러 가지 빵도 고민해봐야 하고.
점심은 대충 파이가 챙겨다 주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리고 중간에 산책하러 한번 갔다가 강아지처럼 뒤를 졸졸 쫓아오는 파이 때문에 숨죽여 웃기도.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잠시 책을 읽다가 소파에 반쯤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
“치즈. 외출준비 해야지.”
그러다가 귓가에 파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몽롱했던 정신이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깊게 자려던 건 아니었는데. 창밖은 벌써 노을이 져서 붉은빛이 가득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나는 하품을 뱉어내며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리고 파이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고 단장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리브엘과의 첫 데이트를 앞두고 있는데도 기분이 마냥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설레는 마음은 있긴 한데, 파이와 수도로 식도락 여행을 가는 것만큼 들뜬 기분이 아니다.
“내일 또 일찍 출근해야 하니 늦지 말고 들어오도록 해.”
오늘 오후 내내 말 한마디 없던 파이가 드디어 입을 연다. 그것도 내 머리를 조금만 땋아서 핀으로 고정해 매만지며 마치 보모처럼 잔소리로. 그래서 나는 작게 코웃음을 터트리고 앉아있는 화장대 거울을 통해 파이를 흘겨봤다.
“새벽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요? 해가 진 이후의 밤공기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오늘 그 밤공기를 실컷 맡고 올 거라고요.”
“밤공기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온도다. 건강상 좋지 않아.”
“따뜻하게 입고 다니면 되죠?”
“스스로 챙겨 입는 버릇이 없으니 더 걱정이지.”
고개를 가볍게 휘젓는 파이가 의미심장한 한숨을 푹 내쉰다. 괜히 손가락 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라 나는 헛기침을 뱉어내며 창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파이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바람에 정면을 보게 되었지만.
단장을 마치고 구두를 마저 신은 뒤에 1층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외출이라는 생각에 그제야 기분이 깃털처럼 가볍게 상승했다. 계단을 하나하나 신경 써서 내려오자마자 눈앞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고개를 들었다.
“리브엘?”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내 앞에 서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리브엘은 마치 대단한 연회에 참석해도 될 만큼 근사하게 차려입은 채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밀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오는 내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 방금도 심장이 너무 뛰었어. 일하는 네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차려입으니 더 눈이 부시네? 오늘따라 유난히 빛이 나기도 하고.”
내게 손을 내미는 리브엘이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가볍게 맞춘다. 여전히 서늘한 입술의 촉감은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았지만. 나도 그를 따라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리브엘은 환한 옷이 어울려. 밝고 산뜻하고. 너와 참 잘 맞는 것 같아.”
그러자 수줍어하는 리브엘이 조금 머뭇거리면서 나를 쳐다보다가 내 어깨너머를 보고 표정을 싹 굳힌다. 그 분위기 변화가 한순간에 얼마나 차이가 크던지. 리브엘이 이런 무섭고 차가운 표정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짝 보자, 계단 위에서 험악하게 굳은 표정의 파이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절대 화해라는 걸 하지 못하는 관계인 것 같다. 나는 일단 어색하게 웃으며 리브엘의 손을 잡아챘다.
“어서 가자. 축제, 보러 가야지?”
그제야 파이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리브엘의 얼굴에 다시금 환한 미소가 그려진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은 시간에 감정이 변하는 그가 신기하다. 리브엘도 나름 오래 살아서 그런가? 파이처럼 표정을 바꾸는 게 너무 빨라서 꼭 홀린 것 같았다.
“그래야지. 그럼 오늘, 제게 귀한 아가씨의 에스코트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영광입니다.”
나는 조금 다급한 걸음으로 저택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리브엘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가의 마차는 이렇게 생겼구나.’
겉에서 봤을 때는 화려하고 밝은 느낌이었는데, 안쪽은 어둡고 음침했다. 마차 창문을 가리는 작은 커튼도 빛 한 줌 새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검은색이었다. 아마 그가 흡혈귀이기 때문이리라. 햇빛을 받으면 몸속의 피가 증발한다고 했으니까.
“마차 내부가 좀 어둡지? 내가 아늑한 걸 좋아해서.”
“어둡긴 한데 괜찮아.”
리브엘이 내 맞은편 자리에 올라타고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내부가 더 어두워졌다. 리브엘은 혹시 내가 답답해할까 봐 펼쳐둔 커튼을 걷어내 옆의 고리에 걸어놓았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밝아지긴 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저택 정문을 빠져나가는 마차 밖을 내다보며 묻자, 그가 이미 계획했다는 듯 바로 대답해주었다.
“우선 식사부터 해야지. 내가 괜찮은 곳을 예약해뒀어.”
“어딘데?”
“그건 비밀. 가보면 마음에 들 거야. 딱 건국기념제 기간에만 들어갈 수 있거든. 그리고 이때만 진귀한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든.”
“오…….”
이상하다. 진귀한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하면 꽤 설레어야 하는데 저택을 벗어난 이후부터 감정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자꾸… 아까 계단 위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파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크게 다친 야생 짐승처럼 소리 없이 울부짖는 그런 느낌의 파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