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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14화 (114/132)

# 114화

아픈 심장을 스스로 다독이던 그때 파이가 먼저 시선을 내리깐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수그러지는 그의 행동에 기분이 참 오묘해진다.

“선택도, 후회도 네가 떠안을 문제이니… 이제 신경 쓰지 말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방금 내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더니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손목을 세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손목에 빨간 손자국이 남아있었지만, 하얗던 손에 다시 피가 통해 간질거렸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가족 그리고 연인. 내 삶을 만들어준 소중한 사람.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나만 생각해주는 이 남자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내 가슴이 저며 드는 통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전처럼 그에게 휘둘려지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해. 일단 그에게서 벗어난 후에 내 마음을 확고하게 다져놓는 것이 먼저다. 파이와 있을 때면 단 한 순간도 침착해질 수가 없는 것 같으니까.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내 인생을 파이의 뜻대로 쥐락펴락할 생각은 하지 마요.”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것 같았고, 갈비뼈를 짓누르는 느낌에 호흡도 버거워진다. 그래서 돌부처처럼 서 있는 그를 지나쳐 방 안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급격하게 피로해져 몸이 땅 아래로 파묻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내가 상처를 받은 느낌인지. 매번 그에게 이런 말을 던질 때마다 심란해졌다. 마음이 좋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침울한 그 상태로 버릇처럼 목욕물을 받고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잃어버린 초점 덕에 흐릿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한 채로.

“드레스는 벗고 들어갔어야지. 원단 다 상한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던 욕실에서 파이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리면 안 될 목소리에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욕조 안으로 손을 뻗어 드레스 끈을 풀어내는 그가 어딘지 안타까워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 파이?”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는 버릇이 있었던가? 이런 행동은 또 처음 보는군.”

그가 내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데 몸이 묵직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 드레스를 입은 채다. 그제야 나는 내가 드레스를 벗지 않고 그대로 욕조 안에 들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나를 탓하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 순간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드레스가 어깨를 타고 훌렁 벗겨지는 바람에 더 깜짝 놀랐다.

“으… 으악!”

팔 부분이 딱 달라붙는 드레스라 평소에도 벗으려면 손목 부분을 잡아당겨야 했다. 그런데 젖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쑥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더니 속옷마저 홀랑 벗겨져 순식간에 알몸이 되는 바람에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다 파이가 마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빽 소리를 지르며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위험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파이가 내게 손을 뻗어서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발에 무언가 걸려서 순간 몸이 허공에 뜨는 기분이었다. 발 부분에 벗겨진 드레스가 있어서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파이가 한 손으로 내 등을 감싸 안아주었다. 다행히 수도꼭지에 뒤통수를 박지 않을 수 있긴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네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네 마음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그만 밀어내려고 애쓰지 마라.”

내 발에 걸린 옷가지들을 물속에서 전부 거둬낸 그가 나를 똑바로 세워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욕조에 다시 몸을 담글 수 있도록 앉혀준다. 그때까지도 나는 방금 그가 뱉어낸 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뜻이에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 뜻을 존중해주려고. 더 이상 네 인생에 간섭하진 않을 생각이다. 다만…….”

“…다만?”

“네가 마음의 결정을 확고하게 내릴 때까지 곁에 머물겠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단호한 입장을 밝히는 그가 손으로 물을 퍼서 내 어깨위에 흘려보낸다. 그러더니 온수를 틀어서 줄어든 물을 더 채워주기까지.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마음을 확고하게 결정짓는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리브엘과 데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벌어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파이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봐야겠어. 그가 내 선택을 존중해준다고 했다.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드래곤이니까 내 결정을 멋대로 번복하진 않을 거다.

“마음대로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서 나가요. 씻는 건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알았다.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불안했던 감정이 차츰 평온을 되찾아간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 주어 고마웠다. 어쩐지 어깨의 무거운 짐을 털어낸 느낌.

‘결과적으로 잘 된 거야.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해서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조금은 홀가분한 정신으로 목욕을 마칠 수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타월로 머리를 말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파이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와 나를 의자에 앉혀둔다. 곧 내 손에서 타월을 낚아채서는 대신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말려주었다.

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칠까 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그 부드러운 손길이 또 굉장히 익숙해서 기분이 조금은 들뜨는 느낌이다.

“식사는 무얼 했지?”

“바닷가재 그라탕이라는 걸 먹었는데 꽤 괜찮았어요.”

“해산물은 별로라며.”

“생각보다 비린 냄새가 덜해서. 해산물을 잘 다루는 요리사는 그 비린 향과 맛을 잡을 수 있대요.”

“그렇군. 참고하도록 하지.”

참고하겠다는 말이 앞으로 내게 해산물을 많이 먹이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내일은 가게가 쉬는 날이라더군.”

“네.”

“쉬는 날에는 레시피에 대한 연구를 한다던데. 내일도 그럴 참인가?”

“오후까지 그럴 생각이고 저녁에는 리브엘과 만나기로 했어요.”

분명히 느껴졌다. 리브엘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 두피에 느껴지는 떨림이. 아주 찰나였지만 그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확실히 전해져 왔다.

“…그래. 알았다.”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는 그의 대답 이후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저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 집중하며 브러시를 챙겨와 빗질을 해주는 그의 손길을 받아냈다. 곧 물기를 전부 털어내고 완전히 말린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파이.”

그리고 나는 잠들기 전까지 어제 하지 못한 레시피 연구에 몰두했다. 파이는 그런 내 맞은편에 앉아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창밖을 응시한다. 정수리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또 신경이 조금 쓰이기는 했다. 그래서 결국 완전히 집중하진 못했고,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왜 파이가 내 침대로 들어와요?”

“재워주려고.”

침대 위로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눕는데, 옆에 검은 인영이 드리워져 흠칫 놀랐다. 누워서 파이한테 촛불 좀 꺼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이 남자가 은근슬쩍 내 옆에 모로 누워, 당황해하는 내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자라. 오늘은 깨우지 않을 테니까 푹 자고 일어나.”

옆에 있는 게 더 불편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래도 내게 이상한 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어보여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최대한 닿지 않으려고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기대 누워있는 걸 보니까 더 그랬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는 사이에 수상한 짓 하지 말아요.”

한 번 더 경고 삼아 엄포를 놓자,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진다.

“알았으니까 눈 감아. 오늘도 수고했다.”

수고했다. 별거 아닌 그 한마디가 가슴에 진동을 일으킨다. 위로는 아닌데 뭔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느낌?

눈을 감아 잠들기 직전까지도 그의 ‘수고했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한가득 들어찼다. 그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레이라에게도 꽤 자주 들었던 말인데, 파이에게 듣게 되니까 더 특별한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꿈 꿔.”

귓가에 나직이 들려오는 그의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구름을 안은 듯 몽글몽글한 기분을 안고 잠들어서인지 몰라도 그날은 참 행복한 꿈을 꿨다. 오래전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파이와 함께 꽃밭을 뒹굴고 뛰어놀았던 꿈을.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던 그때는 정말 매일매일 기쁨의 연속이었는데. 밖에 자주 나가지 못한 것만 빼면 파이가 참 배려를 많이 해주었다고 생각이 된다.

[해가 지고 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지.]

[잉, 더 놀고 싶어요!]

[안 돼. 해가 지면 추워져서 감기 걸린다. 지금 네 다리도 거의 풀렸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잖아.]

그렇게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이 나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놀다가 파이에게 질질 끌려 레어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에게 끌려다니는 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걸까?

레어에 돌아오면 파이는 바로 나를 목욕시켜주었다. 그의 말대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힘이 빠져버렸다. 그 무거운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서 유아용 욕조 안에 퐁당 들어가 노란 오리들과 가족놀이를 했다. 어렸을 때나 커서나 늘 한결같은 내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났다.

‘그때도 저랬었구나.’

손가락이 퉁퉁 불어 쪼글쪼글해질 때쯤 파이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꿈속의 나는 나체의 모습으로 들어오는 파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어? 파이 다리에 똥 달렸어!]

…똥? …내가 저런 말을, 했었던가?

“깼어?”

정신이 번쩍 들어서 눈을 반짝 떴다. 아직 흐릿한 시야를 애써 거둬내고 초점을 맞추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바로 옆에 여전히 모로 누워있는 파이가 보인다. 동시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왜 그래?”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었다.

맙소사, 정말 맙소사?!

방금 그 생생한 꿈은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아니, 정말 사실인 걸까? 아니면 그저 꿈? 일단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라 혼란스럽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파이는 목욕시킬 때 늘 수건으로 하체를 가리고 있었는데. 워낙 결벽증이 심했던 남자라 옷에 물이 묻는 걸 아주 싫어했으니까. 방금 꿈에서는 내가 파이의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던 살덩이를 가리키며 그런 말을 했다. 워낙 어릴 때니까 그때는 그게 신기했을지도 모르지만.

“꿈이라도 꿨나? 혹시 야한 꿈?”

그랬는데 이 남자가 또 눈치 없게 실실 웃으면서 이불을 걷어내려고 당긴다. 나는 이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눈만 빼꼼 내밀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하필 꿈을 꿔도 그런 적나라한 꿈이람? 기분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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