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세 번?”
리브엘이 내 손을 놓아주면서 허리를 똑바로 세운다. 그리고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오늘따라 더 반짝거리는 초콜릿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너도 언제까지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잖아. 내일 가게도 쉬는 날이고, 건국기념제로 밤에 축제가 열리니까 내게 첫 번째 데이트를 허락해주길 바라.”
데이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머리가 멍했다. 이성이 교제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데이트고, 그것은 곧 두 사람의 감정을 확인하는 시간이니까. 만약 리브엘의 고백을 받아주던 그때에 파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매일 데이트라는 것을 했겠지. 역시 인생은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나저나 고민이다. 리브엘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질 않았다. 지금은 딱히 누군가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기가 좀 그런데. 하지만 이렇게까지 내게 상냥하고 친절한 그를 밀어낼 수가 없다. 나를 위해 저택까지 선물로 주려고 했다는데 어딘지 양심이 찔리기도 하고.
‘괜찮… 겠지?’
그래도 한창 심란하던 나를 위로해준 그에게 보답으로 데이트쯤이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참에 리브엘과 조금 더 관계를 발전시켜서 좋은 사이가 된다면 판을 뒤엎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파이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할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지.
“좋아. 그럴게. 세 번. 그때까지 나도 충분히 고민해서 선택할까 해.”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 이후로 우리는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리브엘이 꽤 신경을 써서 만들게 했다는 오늘의 메인 메뉴는 바닷가재 그라탱이었다. 해산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치즈가 위에 깔려있어서 괜찮아 보였다.
“맛은 어때?”
포크로 가재의 꼬리 부분을 치즈와 함께 퍼서 입에 넣어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괜찮아. 처음 먹어봐서. 나 해산물은 많이 안 먹어봤거든.”
“해산물은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져. 비린내를 어떻게 잡아내느냐가 관건이니까. 재료도 신선해야 하고.”
“맞아. 그나마 문어 다리는 먹기 쉽더라.”
“그럼 다음에는 문어요리 먹으러 가자.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항구도시로 가면 새로운 음식들도 맛볼 수 있을 거야.”
레어나 아카데미 근처는 바다가 꽤 멀리 있는 완전한 육지라 해산물보다는 육산물이 더 주를 이뤘다. 그리고 고기만큼 맛있게 만들어내는 음식점도 없었으니까 더 꺼려졌었다. 새로운 음식, 그것도 맛있는 것을 먹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지. 우리는 두 번째 데이트를 항구도시에서 하기로 약속하고 식사를 마쳤다.
“잘 먹었어, 리브엘. 이거 꽤 괜찮은 것 같아.”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야. 한시름 놓았어. 마음 졸였었는데.”
“마음을 졸일 것까지 뭐 있어? 요즘에 뭐든 다 잘 먹어서 이젠 가리지도 않아.”
“그보다 지난번 만찬에 초대해줬을 때의 음식이 너무 대단해서. 혹시 비교가 될까 봐 걱정했거든.”
“아……. 그 주방장의 요리만큼이나 맛있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 처음 먹어보는 생소한 요리라서 제대로 맛을 느껴보진 못했지만. 또 미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그런 자리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지만 거부감 없이 먹었으니까 그것도 맛있게 먹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확신을 담아 리브엘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해가 거의 다 져버려서 어두컴컴하다. 저택 바깥쪽 여기저기에 낮은 키의 등을 설치해놔서 아까 밝을 때 보던 것보다 분위기가 더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여긴 정원으로 꾸며두면 예쁘겠다.’
그렇게 저택 입구에서 바깥을 눈으로 살펴보는데, 어느새 준비했는지 그가 타고 다니는 마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리브엘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면서 내게 손을 내민다.
“귀한 아가씨를 댁까지 모실 기회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뜬금없이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어투로 정중한 예법을 보여주는 그가 설핏 눈웃음을 그린다. 대놓고 유혹하려는 표정이라는 건 알겠다. 파이도 요즘 들어 더 저런 얼굴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일단 나는 모른 척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여 화답하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그러고 나서 치맛자락을 가볍게 잡아 올린 채 마차의 발 디딤대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갑자기 조금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움찔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검은 인영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데리러 왔다. 이리와 치즈.”
마차의 앞쪽으로 타고 온 말을 멈춰 세운 파이가 바짝 굳은 얼굴로 나와 리브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리브엘의 손에 얹어진 내 손에 시선을 멈추더니 미간을 좁히며 눈빛이 더 사나워진다. 당장 손을 떼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서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 뒷짐을 졌다.
“직접 데리러 오지 않았어도 내가 알아서 갔을 텐데요.”
“배달만 하고 돌아온다던 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어서 가지. 레이라도 네가 오면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어.”
“레이라가요?”
아까 리브엘이 분명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고 했는데. 혹시 나갔다가 걱정돼서 다시 돌아온 걸까? 혹시라도 레이라를 기다리게 했나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파이에게 달려가려다가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리브엘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오늘 고마웠어. 내일 오후에 어디서 만날까?”
“…붉은 노을이 네 저택을 전부 물들일 때 데리러 갈게.”
“응. 그럼 내일 봐. 먼저 갈게.”
그렇게 약속을 잡고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파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긴 하다. 나를 내려다보는 매서운 눈빛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었다. 어딘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나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면서 파이의 도움을 받아 말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파이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고삐를 돌려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치즈!”
저택의 바깥 정문 앞에서 걱정 어린 표정을 한가득 담고 있는 레이라가 나를 보자마자 크게 불렀다. 곧 파이가 레이라의 앞에서 말을 멈췄고, 그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릴 수 있었다.
“레이라. 에이든이 왔다는 얘기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아까 잠깐 가게 도와주러 들렀다가 바로 가셨어.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리브엘이 말해주던걸? 네가 에이든과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고도 해서 나는 또 마음 놓고 식사까지 하고 왔지. 식사 준비를 해놨다는데 그냥 오면 미안해서.”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왠지 심각해 보이는 레이라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내 손을 잡아챈 레이라가 저택 안으로 황급히 들어서는 것을 말없이 뒤따라갔다. 곧 파이도 우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고, 레이라는 주위를 경계하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플라츠 공작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자세하게 말해줘.”
“별말 안 했어. 앞으로 세 번만 만나달래. 그리고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아니, 그것도 궁금하지만 그거 말고 아까 했던 말. 내가 폐하와 만났다는 그 말.”
나는 리브엘이 했던 말을 다시 레이라에게 전해주었다. 그러자 레이라는 기괴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얼굴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폐하께서 오신 걸 네가 본 건 아니지?”
“응. 그래서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 그… 나를 감시한다는 사람, 혹시 리브엘의 사람일까?”
“나도 그게 의심이 가네.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공작 각하께서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까 조금 수상하기도 해.”
리브엘이 대체 왜 나를 감시하는 걸까? 그것도 마력을 사용하는 사람까지 이용해서. 파이가 나타난 이후에 그랬다면 그나마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그 전부터 나를 감시했다고 하니까.
아니지. 그 감시자들이 리브엘의 사람들이라는 걸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단정 짓진 말자.
“그건 그렇다 치고, 세 번만 만나 달라는 건 또 뭐야? 나는 치즈 널 기다리느라 쫄쫄 굶고 있었는데, 식사하고 왔다니.”
“리브엘이 그 말만 안 했어도 식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돌아올 생각이었어. 설마 지금까지 굶은 거야?”
“네가 오기 전에 대충 먹었어. 그래서 그 세 번은 뭔데?”
“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레이라의 시선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등 뒤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걸 보니 파이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나 보다. 양쪽의 대단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괜히 부끄러워지면서 심장이 간질거렸다.
“리브엘이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그거에 대한 확실한 답을 달래. 그 전에 세 번의 데이트를 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어.”
“데이트?! 너 정말 공작 각하의… 고백을 받아주려고?”
나는 봤다. 레이라가 정말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치다가 내 뒤에 있는 파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걸 보아하니 파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어깨를 크게 으쓱거리면서 당당하게 허리를 세웠다.
“리브엘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나도 장담하진 못하지만, 고민은 해봐야지. 일단 내가 이미 리브엘의 고백을 받아주었었고, 이대로 어물쩍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니까.”
파이가 그전에만 와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솔직히 파이에게 너의 선택은 이미 늦었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번 시간 맞춰서 떠나간 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이럴 때 사용하는 거다.
“꺅?!”
“이야기 좀 하지.”
그랬는데 갑자기 뒤에서 내 손목을 덥석 잡는 우악스러운 힘이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파이가 내 손을 잡아 2층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덕분에 나는 당황하긴 했으나 곧 다가올 새로운 국면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익숙하게 내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는 그가 문을 강렬하게 노려봤다. 저 선홍색 눈동자에 저만큼 어두운 기운이 배어 나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가 먼저 말문을 트길 기다렸다.
“데이트, 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여전히 문만 노려보는 그의 음성에 살짝 소름이 일만큼 살벌한 기운이 느껴져서 등을 바르르 떨었다.
“파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않아요? 내가 데이트를 하든 말든.”
“안 돼.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
“…그걸 왜 당신이 결정해요? 당신이 나의 뭐라도 돼요?!”
그 말에 내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로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분노 어린 표정은,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싶을 만큼 오싹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또 이대로 파이의 생각대로 끌려가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다. 이번에야말로 저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콧대를 제대로 눌러 놓고야 말겠다. 그래서 나 역시 그의 거친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단호한 내 마음을 표출했다.
“리브엘은 내게 있어 은인이나 마찬가지예요. 상처 난 내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얼마나 노력한 사람인데. 그리고 당신 참견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놈은 네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
“당신은 뭐 호락호락해요? 어차피 이기기 어려운 상대라면 고집불통인 당신보다는 말이 통하는 리브엘이 더 나아요.”
“후회할 거다.”
“선택도 후회도 전부 내 몫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 겁니다. 그러니까 파이도 이제 그만 내게서 관심 끄는 게 정신 건강이 이로울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도 가슴이 아팠다. 자꾸만 파이에게 심술을 부리는 내가 너무 밉다. 매번 이런 식으로 다투게 되는 것도. 끈질기게 간섭하려는 파이도 밉지만, 그것 역시 내가 고집을 부리기 때문임을 안다.
차라리 그가 나를 받아주지 않았으면… 이런 마음의 통증 따위 몰랐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