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늘 같은 미소에 같은 표정. 리브엘을 보고 있으면 그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피부로 느껴지곤 했다. 최대한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이미 얼굴에서부터 드러나 버리니까. 그게 더 간질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문해줘서 고마워.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만든…. 그런데 리브엘, 목에 그거 뭐야?”
파티시에로서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그의 목과 턱에 천과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목 근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표정으로 묻자, 리브엘이 손으로 붕대 위를 어루만지며 작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화상을 입었는데 보기가 흉해서 가린 거라.”
“화상? 뭐하다가?”
되묻다가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파이가 내게 상처 난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며 투덜거리던 모습이.
[그놈이 마력은 없지만, 힘과 속도는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어. 네게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겠지만.]
[그럼 리브엘이 이랬다는 거예요?]
[여기뿐만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지. 지금도 아프다. 이러다가 상처가 덧날까 봐 걱정이다.]
나 몰래 리브엘을 찾아갔었다던 파이가 당하고만 올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 상처, 왠지 파이가 해놓은 것 같은데.
지난번 황실 무도회 때도 파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큰 상처를 입었던 그다. 그런데 또 파이에 의해 다치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이 밖에 나가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걸 보는 부모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거 파이가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
흠칫 놀라는 리브엘이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면서 잠시 당황했다.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나 보다. 바짝 긴장하는 모양새가 꼭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았다. 파이는 당당하게 일러바치던데. 리브엘은 숨기려고 한 모양이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눈치 하나는 또 제법이거든.”
“그 드래곤…. 아니, 그 사람이 그래? 뭐라고… 했는데?”
“나 몰래 두 사람이 만났다고, 자기 팔에 생긴 상처도 보여줬거든. 그러게 너를 왜 내 허락도 없이 찾아간 건지. 정말 화가 나.”
나는 팔짱을 끼며 미간을 바짝 좁히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리브엘은 마치 죄를 지었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며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미안해, 치즈.”
“네가 뭐가 미안해. 사과해야 할 쪽은 파이인걸?”
“갑자기 찾아와서 나도 놀랐거든.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사실… 내가 먼저 공격했고…. 나도 모르게 한 일이라…….”
리브엘이 먼저 공격을 했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지난번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까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럴 수도 있지. 리브엘 답지 않은 행동이긴 하지만, 리브엘에게는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너를 충분히 이해해, 리브엘. 두 사람의 문제를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고. 이미 서로 화해하기는 그른 것 같으니까… 일단 파이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나도 미안해.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친 것 같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민망하면서도 수줍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초대한 손님을 너무 밖에 세워두었네. 우리 비플라츠 가문에 방문한 걸 환영해, 치즈.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리브엘의 안내를 받아 그와 나란히 서서 저택 입구로 향했다. 높은 담벼락 안은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 커다란 철문이 있던 입구에서 저택까지 걸어가는 것도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저택 주위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둘러싸고 있었다.
“저택이 근사해. 역시 공작가의 저택답네.”
“네가 온다고 해서 신경을 썼지. 하루 만에 정리하느라 가문의 사람들이 꽤나 고생했어.”
매우 깨끗한 저택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어디 하나 흠집이 난 곳이 없이 너무 멀쩡해서 조금 낯설었다.
“너무 새 집 같은데?”
“아, 사실 우리 공작가는 왕국 밖의 공작령에만 있어. 그동안 수도에 거의 방문하지 않았거든. 이제 슬슬 정계에 진출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 최근에 저택을 세웠지.”
레이라에게 들었었다. 비플라츠 공작가는 지금까지 국무회의에 대리인을 세우고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아마 최근 수도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이유가 나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정계에 진출한다는 건…. 앞으로 수도에 자주 머물 거라는 거야?”
“건국 초에는 직접 국정에 참여했었는데, 초대 국왕이 나를 배신했거든. 그래서 그냥 손을 떼고 은신했었어. …물론 오래전의 일이고 비밀이긴 하지만.”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가보다. 하긴, 그도 오래 살았고 인간세계에 섞여 살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상처도 많았을 거고.
나는 일부러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 먼저 저택의 문을 열어주는 리브엘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저택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실내는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널찍한 홀은 작은 무도회를 열어도 될 만큼 넓었다. 홀의 양쪽 가장자리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쌍둥이처럼 있었는데 올라가지 못하게 줄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아직 완공되지 않았나 봐?”
“응. 위층은 조금 더 손볼 예정이라서. 사실…….”
민망하다는 듯 뺨을 붉히는 리브엘이 내게서 시선을 돌려 계단 위쪽을 올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처음부터 이 저택을 세울 때, 이미 마음먹었던 건데…. 이 저택은 네게 주려고 만들었던 거야.”
“…응?”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헛기침을 뱉어내는 리브엘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치즈 네가 나를 거부하는 느낌도 없고. 그래서… 너와 혼인하게 되면 너를 위한 선물로 주려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거대한 선물이라니. 리브엘도 파이만큼 통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든다. 파이야 워낙 어렸을 때부터 내가 원하는 걸 뭐든 퍼다 주었으니까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웠는데. 파이가 아닌 다른 남자가 내게 구혼의 선물을 주는 경우는 처음인지라.
…에이든도 열매를 주긴 했지. 결과적으로 잘된 거지만 날 죽이려고 했던 놈이라.
아무튼,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제쳐두고.
“선물이라기엔 너무… 과하지 않아?”
“육백 년간 홀로 살았던 가주가 혼인을 한다는데, 오히려 방계 쪽에서 더 난리들이던걸? 내가 머리 셋 달린 악마를 데려와도 좋다는 사람들이라.”
혼인을 거론하는 리브엘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확실하게 알았다. 그가 나를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음을.
‘이 죄 많은 여자 같으니.’
난감하다. 파이는 보호자와 연인의 관계 둘 다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아주 또렷하게 드러냈다. 리브엘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고.
오래전 프리센 왕국의 왕세자와 파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살짝 구겼다. 그러자 리브엘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기분 나빴어? 네가 머리 셋 달린 악마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내가 실수했으면 사과할게.”
“아니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좀 기분 나쁜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어떤 기억인지 물어봐도 될까?”
얘기해도 되나 싶어서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야. 이제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보다 아직 식사 전이지? 너를 위해 특별히 저녁 식사를 준비시켜놨어.”
“식사? 안 되는데…….”
배달만 하고 리브엘과 이야기만 조금 나눈 뒤에 돌아가려고 했던 터라 난감해졌다. 리브엘도 파이처럼 평범한 식사를 하지 않는 걸 안다. 그런 그가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했다는데 그냥 간다고 하기도 뭐하고.
“왜? 레이라 영애와 식사 같이하기로 한 거야?”
“…응.”
“내가 알기로는 레이라 영애가 가게 정리하고 그 은발의 남자를 만나서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
“어, 그래?”
대체 그걸 어떻게 알지? 에이든이야 워낙 매일같이 가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방문하기는 했다. 목적은 레이라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는 하는데, 매일 그렇게 자석처럼 붙어 있는 걸 보면 괜히 얄밉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가게를 정리하기 전에 출발해서 에이든이 방문하는 줄도 몰랐…….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까 파이가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혹시 리브엘도 그 감시자들과 한통속인 걸까?
“레이라 영애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을 보낼게. 그러니까 오늘은 나와 식사를 함께 해줬으면 해. 아마 마음에 들 거야.”
“그, 그래.”
어쩐지 찝찝하긴 했지만 준비한 식사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확실한 근거 없이 무작정 의심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니까. 식사만 하고 돌아가면 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식은땀이 배인 손을 꼭 쥐고 리브엘을 따랐다.
햇빛을 좋아하지 않는 리브엘 때문인지 창문이 있기는 하나 전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채다. 어두운 복도를 밝히는 촛대가 있기는 하지만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 애매한 밝기를 자랑했다.
“치즈.”
“응?”
나보다 한 발 앞서서 걷던 리브엘이 나와 나란히 걸으며 보폭을 맞춘다.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들뜨는 것 같아서 심장이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지난번의 그 일, 우리 아직 제대로 얘기를 끝내지 못했던 거 말인데.”
그 일이라면 갑자기 파이가 난입해서 중간에 끊긴 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치즈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해.”
“결정?”
“아니, 정확히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러게. 나도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저… 혼란스러워서.”
혼자일 땐 그저 혼자였는데. 그 외로움을 애벌레가 나뭇잎 갉아 먹듯 조금씩 지워주던 사람이 리브엘이었다. 그랬건만…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난 파이는 엄청난 파도처럼 내게 밀려 들어와 한순간에 나를 흠뻑 적셔버렸지. 파이의 영향력이 제법 크다는 것도 느꼈다. 이십 년을 함께했던 상대라서 더 그럴 수도 있겠고.
“그럼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리브엘이 다시 걸음을 멈춰 서서 나도 덩달아 그 자리에 섰다.
“제안?”
“나도 너의 그분만큼이나 치즈 너를 애정하고 있어. 그 크기를 따지자면 누가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에서 옅은 진동이 전해져온다. 여전히 뺨을 붉힌 채로 떨리는 시선을 내게 고정하는 그가 마른 침을 삼키며 소리 없이 긴 숨을 가늘게 뱉어낸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안다. 늘 내게는 조심스러웠던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말실수할까 봐 수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곤 했던 것도 알고 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나는 너를 아카데미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어. 신이 나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킨 이유가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이 시련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신의 장난이라는 것도.”
잠시 숙연하게 눈을 내리깔던 그가 다시 초콜릿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마주 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 왼손을 잡더니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춰왔다.
“리브엘?”
“내게 딱 세 번의 기회를 줘. 세 번만 나와 만나주었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