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곧 레이라가 작게 웃으면서 대꾸한 말에 여자 둘이 아쉬움을 한가득 담아내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레이라가 돌아오자마자 진열대를 정리하는 척 연기하며 작게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
“으응. 혹시 새로 온 직원이 폐하와 친구 사이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그냥 맞다고 했어. 혼인할 상대도 있어서 곧 품절남이 될 거라고도 했지.”
혼인할 상대라는 말에 또 가슴이 힘차게 뛰었다.
“저 사람들이 에, 에이든을 알아?”
“폐하께서 가끔 일을 도우러 왔을 때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저 중 한 명이 폐하께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곧 나와 혼인할 사람이라고 소개해서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몰라.”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레이라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봐서 또 움찔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레이라가 가끔 나를 떠볼 때 보이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나는 다 네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득 담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기분이 저조했구나, 우리 치즈? 저 영애들이 네 그분을 눈독 들이고 있어서.”
“…….”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정곡이 찔렸나 보네? 아예 정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관심이 전부 사라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두 사람,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저, 점심 식사하러 다녀올게. 먹고 와서 바로 주문량 채워야지.”
레이라한테 또 한 소리 듣기 전에 도망쳐야겠다,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벗어 던지고 허둥지둥 가게를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따라와 고개를 돌렸다. 나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뚝 선 파이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따라와요?”
“식사한다며.”
방금 그는 레이라의 말대로 정말 대형견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가진 순한 대형견. 눈빛은 야생 늑대에 가까웠지만.
따라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갔다.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을 하면서 식당 근처를 둘러보다가 핫도그 가게로 향했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대충 끼지만 때우자고 생각한 건데, 갑자기 파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다른 곳으로 가지.”
“응……?”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는 어디론가 방향을 틀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제멋대로 구느냐고 또 한소리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파이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아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에게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야 했다.
갑자기 또 왜 무게감을 주고 난리람? 무섭게.
순간 뒷목이 서늘해져서 소름이 일었다. 파이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휙 돌려 뒤를 빠르게 훑어봤다.
‘…뭐지? 내가 잘못 느꼈나?’
괜히 뒤통수가 서늘해지던 그 기분이 너무 낯설었다. 치치르자 왕국은 겨울에도 거의 추운 날이 없어서 가을 같은 느낌의 겨울인데.
“파이, 어디 가요?”
“고민 중이다.”
“다른 곳에 가자면서. 그럼 어디 봐놓은 곳이 있는 거 아니에요?”
“마음 같아서는 이 왕국을 뜨고 싶어.”
이를 악물고 시근덕거리는 그가 왜인지 모르게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어서 대체 왜 저러나 궁금해진다.
보통 이런 상황은 간접적으로 내게 무슨 일이 생길 때나 넘어져서 다쳤을 때 벌어지곤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위협을 받을만한 무언가를 느껴서 저러는 것 같다.
‘왜지? 저 핫도그 가게가 맛이 없을 것 같았나?’
정처 없이 그의 손에 붙들려 수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곧 우리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고, 파이는 바로 가게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응? 벌써 왔어?”
계산대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레이라가 내게 물었고,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방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러더니 파이가 주방을 가로질러 뒷문을 연다. 그 문 너머에는 레어의 식당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로 올 거면 그렇게 오래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잖아요.”
괜히 투덜거리면서 그가 빼내 주는 식탁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와 다르게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의 파이가 내 옆에 앉으면서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비어있던 식탁이 고급스러운 음식들로 가득 찬다.
“치치르자 왕국에서 너를 감시하는 놈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피하려면 여기가 가장 안전하지.”
“…감시?”
“내가 처음 오던 날부터 있던데. 전혀 느끼지 못했나?”
평소에도 많은 사람의 시선을 느끼곤 했었다. 이 치치르자 왕국의 수도를 돌아다니면 적어도 하루 한두 명씩 아는 사람을 만나곤 했으니까. 그게 다 아카데미의 인맥이지만.
설마 아까 그 소름 돋던 느낌이 그거였나? 그럼 누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누구인지는 알아요?”
“짐작은 가는데 물증은 없어서. 혹시 네게서 나를 떨어뜨려 놓을 수작일지도 모르니까 쉽게 움직일 수도 없고. 자칫 마력을 사용하다가는 왕궁이 쑥대밭으로 될까 봐…….”
“어허! 안전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드래곤으로 변하는 흉측한 짓 따위는 하지 말아요. 행여 그랬다가는 두 번 다시 안 볼 겁니다.”
나는 포크를 손에 쥐고 그를 향해 겨누어 경고하듯 흔들었다. 그러다가 허기짐을 느끼고 닭고기로 보이는 고기를 찍어 입에 넣었다. 파이 역시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냅킨을 집어서 내 허벅지 위에 얹어주었다.
“너는 늘 협박을 입에 달고 사는군.”
“협박이라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협박하고 있는데?”
“적어도 나는 너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거짓말 아니거든요?”
“어쩌다가 이렇게 고집과 거짓말이 늘었을까. 내 교육방식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엄청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줄 알겠다. 나는 한탄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일단 먹는 데 집중했다.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라 배를 채우고 나서야 심란해짐을 느꼈다.
‘감시라…….’
감시를 당할 만큼 잘못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혹시 어제 후작가로 갔던 타르트에 문제가 있었나? 그랬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서 이야기했겠지? 그렇다고 왕궁에서 나를 감시할 이유는 없잖아? 나는 당당하게 치치르자 왕국 시민권을 획득해서… 어라?
“파이. 파이는 시민권 있어요?”
“내 패는 제약 없이 어느 나라든 갈 수 있어.”
“아, 그랬지. 아니 그럼 대체 누가 나를 감시하는 거람?”
“확실한 건 두 놈 중 한 명이 마력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극히 드물다. 그나마 블랑 제국과 루즈 제국 사람이 가장 많다고 했다. 에이든이 나를 감시할 이유는 없는데.
‘혹시 하유르가 나를?’
그럴 이유는 없지 않나. 나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 감시자,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니고 파이를 감시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오전에도 네 뒤만 몰래 따라붙더군.”
왠지 오싹했다. 내가 정말 너무 안일하게 돌아다녔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 사람들이 만약 나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레이라도 위험해지는 거니까.
나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있는 레이라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그리고 진지하게 레이라에게 파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레이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얘기해주셨어. 아직 어느 쪽 사람인지는 모르겠대. 그래서 혹시라도 위험에 처할 것 같으면 이 반지를 이용해서 블랑 제국으로 도망치라고도 했어.”
“블랑 제국 사람은 아니라는 거네?”
“폐하의 말에 따르면 저들이 노리는 게 일단 나는 아니고 치즈 너 같다고 하더라. 만약 나를 노린 거라면 루즈 제국 사람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혹시 언제 그런 얘길 들은 거야?”
“좀 되었는데. 우리가 가게를 차린 뒤에 바로 그랬다고 했거든.”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가게를 차린 지 벌써 두 달. 그 두 달 동안 나는 목숨을 내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는 뜻이니까.
“아니…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지 않았어?!”
“저들의 목적은 일단 감시인 것 같대. 괜히 얘기했다가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너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기도 하고.”
그래서 레이라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파이의 등장을 그렇게 기뻐했나 싶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 인생을 한탄하기만 했었는데.
“그럼 지금 확 잡아들이면?”
“가게 운영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첩자를 보낸 쪽에서 위협을 할지도 모르고.”
“그건 곤란한데…….”
“원래 감시자는 한 명이었는데 두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거 보면 뭔가 계획하던 일을 곧 터트릴 예정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 저들이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는 게 좋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레이라가 대단하다. 귀족이어서일까? 나는 벌써 심장이 조이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혼자 불안한 마음을 안고 리브엘이 주문한 타르트를 만들었다. 일단 다른 생각은 다 접어두고 타르트 제작에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대충 만들어. 대충.”
옆에서 파이가 불쾌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것도 애써 무시했다. 빵을 굽는 거야 그에게 맡겨도 불안하지 않은데 타르트는 모양을 내야 하는 거라서 내가 직접 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 보니 타르트도 파이잖아? 파이가 파이를 만들면 그것도 좀 웃기겠는데?
그 생각에 겨우 굳은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파이는 그 미소조차 불쾌했는지 옆에서 연신 투덜거리기 바빴다.
“시끄럽게 떠들 거면 나가요.”
그제야 파이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유지했다. 덕분에 나도 집중해서 타르트를 만들었다.
워낙 주문량이 많아서 끝이 보이질 않는다. 과일도 부족해서 파이를 시켜 과일을 더 보충했다. 내일은 쉬는 날이라 내일 치 반죽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건 좀 다행이었다.
“다했다!”
영혼을 전부 쏟아부어 타르트 스무 개와 미니 타르트 서른 개를 다 만들고 나니 삭신이 쑤신다. 만드는 족족 파이가 포장 박스에 넣어주어서 포장까지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배달하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거니까 저택에서 봐, 레이라.”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그렇다니까? 더 늦기 전에 어서 다녀오려고.”
아직은 해가 떠 있는 오후였다. 아마 비플라츠 공작가에 배달을 하고 저택에 돌아가면 노을이 지겠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저택에 돌아와서 잔뜩 삐쳐있는 파이와 저녁을 같이 하는 게 내 목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밤에 무슨 심술을 부릴지 모르므로.
나는 짐마차에 타르트 박스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그 위에 올라탔다. 묶어두긴 했지만, 혹시라도 박스가 무너지면 큰일이니까. 마차가 출발해 가게 입구에서 나를 배웅하는 레이라와 파이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 때문에 일부러 더 그랬다.
“…괜히 혼자 가겠다고 오기를 부렸나?”
두 사람이 너무 걱정하니까 이제야 괜히 후회가 밀려온다. 리브엘이 내게 해코지를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지난번에 고백해왔던 일이 파이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그에 대한 리브엘의 말도 들어봐야 하고.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원망스러운 감정을 배제하면 파이가 좋기는 해. 다만 제 뜻만 밀어붙이는 강압적인 성격은 평생을 가도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서 문제다. 성격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고 했거든. 파이랑 같이 있으면 감정소비가 너무 많아서 금방 지치기도 하고. 리브엘은 그냥 편하기만 한데.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짐마차가 굳건히 닫혀있는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자 동시에 철문이 열리면서 하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하인들이 타르트 박스들을 나르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지시했다. 곧 마지막 박스를 가져가는 하인을 지나쳐 어제 주문서를 건네주러 왔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짐마차를 보내고 난 뒤 노신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리브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멈춰 선다.
“어서와, 치즈. 기다리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