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직원이라고요?”
“레이라가 직원을 뽑을 예정이라더군. 마침 할 일도 없고 시간이 남아도니 나도 일이나 해볼까 해서.”
따지고 보면 마법을 쓸 줄 아는 직원만큼 편한 이가 없긴 하다. 어제 경험해봤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대로 괜찮을까 싶은데.
“아직 직원은 아니죠. 수습 기간을 거쳐야 진정한 직원이 될 수 있다고요.”
“수습 기간?”
“파이가 할 줄 아는 건 빵 반죽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배우는 기간이 필요하겠지요? 수습 기간은 3개월. 봄이 되면 직원으로 채용할지 말지 생각해보겠어요.”
어차피 거절해도 어떻게든 눌러 붙어있을 그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지금도 저택을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말 다 했지. 일단 석 달 동안 하는 거 봐서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저 얄미운 콧대를 가볍게 눌러준 뒤에.
“수습 기간이라. 나쁘지 않군. 그럼 앞으로 셰프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셰프님?”
맞는 말이긴 한데 누가 나한테 셰프님이라고 불러주는 건 처음이라서 어쩐지 감회가 새롭다. 뭔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갑자기 의욕이 마구 샘솟아서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좋아요. 셰프님이라고 불러요, 그럼. 자,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따라서 해봐요.”
일단 나는 그에게 머릿수건을 건네주고 손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어제 보관실에 넣어둔 반죽을 꺼내 상태를 확인하고 식빵을 먼저 만들었다.
“이렇게 꾹꾹 눌러서 반죽 안의 기포를 빼야 해요. 따라서 해봐요.”
“꼭 진흙 놀이를 하는 것 같군.”
“이건 먹는 거니까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요. 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걸 굳이 손으로 하나? 마력으로 하면 간단히…….”
또 마력 타령을 하는 파이를 찌릿 노려보자, 그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손으로 열심히 조물조물 주무르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 감흥이 없다. 의외로 금방 터득을 하는 그가 힘으로 반죽을 제압해버린다. 묵사발이 되어버리는 반죽이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던지.
“그만, 됐어요. 다음엔 이렇게 네 등분으로 나눠서 이런 모양으로 접어요. 그리고 빵틀에 식용 기름을 살짝 발라주고 그 안에 담는 거예요.”
그는 나를 따라 반죽을 적당히 잘라서 네모 모양을 만들어 빵틀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반죽 위에도 식용 기름을 꼼꼼히 바르는 것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는 눈썰미도 좋고 이해도 빠른 편이라 금세 배웠다. 또 은근 섬세하기도 하니까.
“오, 맞아요. 잘하는데요? 역시 파이는 뭐든 소질이 넘치나 봐요. 손재주가 제법이네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서 칭찬해줬더니 어째 기고만장해지는 그의 표정이 조금 얄밉기도 하다. 그랬더니 마력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빵틀을 가득 채워버린다.
“내가 마력으로 하지 말라고……!”
“다음은?”
“…2차 발효를 해야 해요. 아까 그 보관실에 2번째 버튼을 누르고 넣어두면 됩니다.”
또 마력을 사용해서 그 많은 빵틀을 한 번에 보관실로 이동시킨다. 정말 좋은 직원 하나를 둬서 일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내가 손가락만 빨고 있게 생겼는데?
그렇게 파이의 도움을 받아서 오전 분량의 첫 식빵을 완성했다. 덕분에 가게를 여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구워져서 가게 문을 일찍 열어버렸다. 빵은 방금 구워서 나온 따끈따끈한 것이 가장 맛있으니까.
“치즈! 식빵 추가분은 아직이야?”
황급히 주방 안으로 들어온 레이라가 묻는 말에 나는 화덕 안을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더 구워져야 해. 왜?”
“내온 식빵이 전부 팔렸어.”
“…벌써?”
“빨리 만들어서 느긋하게 팔릴 줄 알았는데 이러다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다 팔릴 정도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어… 금방 될 것 같아. 잠깐 기다리시라고 해.”
“알았어!”
정말 평소보다 더 빨리 동난 느낌이다. 나는 진열장에 놓을 미니타르트를 만들다가 말고 초조하게 화덕을 기웃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파이가 내 손을 잡아 방금 서 있던 곳으로 복귀시켰다.
“왜요?”
“빵은 정해진 시간 동안 굽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없다고 했잖아. 지켜선다고 빨리 구워지진 않으니까 침착하게 타르트부터 완성해, 셰프님.”
그에게서 저 셰프님 소리가 나올 때마다 왜 이렇게 심장이 간질거리는지. 마치 내 이름처럼 저 호칭을 너무 자연스럽게 부르니까 기분이 묘하다.
초조한 마음을 다독이며 타르트와 미니타르트를 몇 개 완성한 뒤, 다시 화덕 앞에 섰다. 적당히 구워진 식빵이 예쁜 갈색빛을 내며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폴폴 풍겼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빵틀을 꺼내려고 장갑을 끼는데, 그 사이에 파이가 마력으로 빵틀을 전부 꺼내주었다. 그러더니 틀에서 식빵만 쏙 빼내서 유선지가 깔린 커다란 쟁반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는다.
…정말 내가 할 일이 없어지네.
“마력 낭비하면 힘들다면서요. 그렇게 막 사용해도 되는 거예요?”
“나를 걱정해주니 또 기분이 좋군.”
“…걱정 아니거든?”
내가 아니라고 해도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 파이가 실실 웃기만 한다. 그리고 보관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빵들을 몇 개 화덕으로 집어넣고 다 구워진 빵들을 밖으로 날랐다. 다 내가 하던 일인데 파이가 알아서 다 해준다. 이러다가 앉아서 놀고먹는 날이 오겠어.
“셰프님. 오후 분량을 미리 해놓으면 가게 문을 일찍 닫아도 될 것 같은데. 지금 만들어서 그놈 저택에 빨리 보내버리지그래?”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파이가 조금 불쾌한 말투로 재촉한다. 방금 방긋 웃으면서 나가더니 들어올 때는 또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가게 문 닫는 시간에 맞춰 보내 달라고 해서 점심 이후에 만들려고 했는데. 왜요?”
“그놈이 네가 직접 가져다주었으면 한다고 했다며.”
…레이라한테 얘기를 들었나 보다. 나는 손가락으로 콧대를 긁적거리며 모른 척 화덕 쪽으로 향했다.
“파티시에가 직접 배달해주는 경우는 간혹 있었어요. 보통 한번 주문했다가 마음에 들어 재구매를 했을 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분들도 있죠.”
“그놈은 네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파이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놈이 아니라 내 손님이에요. 일단 거래를 하는 손님께는 최대한의 예를 갖추자는 게 내 신념이고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상대를 폄하하지 말아요.”
그러자 파이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래서 나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화덕의 온도만 살폈다. 물론 온 신경이 파이에게 쏠려있긴 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참의 침묵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질 때쯤 세 번째 구운 빵이 완성되었다. 또 장갑을 끼려는데 파이가 더 빠르게 빵을 정리해 밖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에서 냉랭한 기운이 여실히 흘러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그렇게 다섯 번에 걸쳐 모든 식빵을 다 구울 때까지, 주방은 고요했다. 파이는 말 없이 나를 도왔고, 나도 파이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화덕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레이라 역시 냉랭한 주방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치만 슬쩍 보고 다시 나가버렸다.
빵들이 너무 빨리 완성되어버렸다.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르고. 오후 분량을 이제 시작하면 점심시간이 늦어버릴 거다. 점심은 레이라와 번갈아 먹어서, 레이라가 식사할 때에는 내가 계산대를 지켜야 했으니 시간이 어긋날 수도 있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레이라가 주방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고는 우리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치즈. 다 끝났으면 식사 미리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덜 배고파. 힘쓰는 일을 이 남자가 먼저 해버리니까 소화가 덜 되었어.”
“그럼 내가 먼저 먹고 올까?”
“그럴래?”
그렇게 레이라를 먼저 식사하러 보내고 계산대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새 빵이 거의 다 팔려서 비어버린 빵 바구니도 있었다.
나는 판매대를 정리하면서 끊이지 않고 오는 손님들을 상업용 미소로 맞이했다. 파이는 그런 나를 주방 입구 쪽에 기댄 채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손님들께 신경을 돌렸다.
“저 남자 새로 온 직원인가 봐. 처음 보는데?”
“진짜 잘생겼다……. 와 나 방금 심장이 엄청 뛰었어.”
손님이 머물다 간 빈 테이블을 정리하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 둘이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귀에 번개처럼 꽂혔다. 저들이 말하는 잘생긴 우리 가게의 새 직원이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상대는 파이였다.
“우리 왕국 사람은 아닌 것 같지?”
“응. 느낌이 그래. 가서 물어볼까? 아, 그럼 실례이려나?”
“초면에 묻기에는 좀 그래. 내일도 와서 있으면 그때 물어보자.”
그 이후로도 끊이지 않고 파이를 훔쳐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뭔가 예전에 이런 상황을 혼자 상상했던 적이 있었는데. 파이를 가게의 얼굴마담으로 계산대에 세워놓으면 여자 손님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 그렇게 손님이 늘어나면 내게 이익이라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으니 순간 짜증이 울컥 솟아오른다.
‘그만 봐! 그만 보라고! 그러다가 우리 파이 얼굴 다 닳겠네!’
마음 같아서는 파이에게 주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눈짓을 줘도 파이는 모른 척 주방 입구에 조각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다녀왔어.”
때마침 식사하러 갔던 레이라가 돌아왔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자꾸만 파이를 몰래 훔쳐보는 여자들을 흘겨봤다.
레이라는 그런 내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그 두 귀족 여자들을 레이라도 아는 사람인지 서로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를 한다. 레이라도 치치르자 왕국의 귀족이어서 그런지 가끔 귀족 자제분들이 방문하면 서로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뭐 먹고 왔어? 금방 왔네?”
“조만간 건국기념제라 그런지 시장 근처에 길거리 음식 파는 곳이 많이 생겼더라고. 간단하게 이것저것 먹고 구경 좀 하다가 온 거야.”
“아, 정말? 나도 가봐야겠다.”
“지금은 별로 없고 저녁부터 아마 많아질 것 같아. 앞으로 일주일 동안 한다고 하니까 당분간 메뉴 걱정은 없겠어. 그런데 왜 저 영애들을 그렇게 노려보고 있던 거야?”
내 귀 근처에 대고 작게 묻는 레이라의 말에 잠시 눈동자를 허공으로 굴리며 콧등을 구겼다.
“아무것도. 그냥 머리 장식이 예뻐서 쳐다봤어.”
“눈빛이 그게 아니던데? 손님 앞에서는 잘 꾸며진 미소를 보여야 한다는 게 네 철칙이었잖아? 방금 네 눈동자가 화덕의 불꽃만큼이나 불타올랐다고.”
하여간 눈썰미도 좋은 데다가 눈치도 얼마나 빠른지. 나는 대충 얼버무리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레이라 영애.”
그때 아까 파이를 찬양하던 여자 둘이 레이라를 향해 손짓을 보였다. 레이라가 다가가서 친근하게 아는 척을 하자 그중 여자 한 명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계산대하고 테이블이 조금 멀어서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아 답답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보아하니 파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