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아까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던 것은 예열에 지나지 않았다. 축축한 혀끝을 단단하게 세워 꽃잎을 가르고 여성지를 집요하게 탐닉한다. 더 질척한 소리를 내면서 내 혼을 쏙 빼놓은 그가 클리토리스를 입술로 머금어 가볍게 빨아냈다.
그때마다 나는 저릿한 통각과 묘한 쾌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정신없이 정욕에 젖어 들수록, 오랜만에 기쁨이라는 감각을 제대로 느낀 것 같았다.
‘아아, 너무 좋아. 행복해.’
한번 절정에 다다랐던 육체는 그의 혀에 의해 두 번의 절정에 취해버렸다. 신음과 교성이 난무하는 실내가 더운 공기로 가득했다. 애액과 타액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하체에 불길이 일었다. 내벽이 강하게 조여지면서 간질거린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나를 몇 번이나 잠식하려고 드는지. 하마터면 그에게 어서 넣어달라는 말을 뱉어낼 뻔했다.
“아직도 부족해?”
“흑, 아니라고. 충분하다니까?!”
“네 여기는 아직도 더 달라고 오물거려. 원하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 나는 준비가 다 되어있으니까.”
그랬다. 그의 목적이 이거였다. 알면서… 내가 애무로만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나를 시험한 거다. 슬프게도 내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칠 때도 부족해 했으니까.
왜 나는 눈치를 챘음에도 모른 척 그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걸까?
고민된다. 눈 딱 감고 솔직하게 빨리해달라고 하기는 아주 조금 남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예상컨대 이대로 그만둔다고 나를 그냥 재울 파이도 아니고.
…아닌가? 그냥 한번 떠보는 거니까 정색하고 싫다 하면 떨어져 나갈 수도? 분명 내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할 생각은 없다고 했으니까.
“내가 충분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떨어져요.”
일부러 눈을 더 치뜨고 그를 노려보며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파이가 조금 망설이다가 아쉽다는 듯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활짝 열고 있던 내 두 다리를 모아 내려주고 뒤로 물러난다.
조금 놀라긴 했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그만둘 줄이야.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다리를 바짝 모아 붙이고 치맛자락을 아래로 내려 가렸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여성지가 피부에 닿아 찌릿한 자극이 느껴졌다. 하지만 티를 낼 수가 없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왜… 그런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봐요?”
“…아니다.”
내 말에 바로 표정을 풀어 설핏 미소를 그린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서 벗어나 나를 조심스레 침대 밖으로 끌어낸다. 바닥에 닿은 힘이 빠진 다리가 갓 태어난 사슴처럼 떨리긴 했으나 애써 중심을 잡았다. 혹시라도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잔뜩 경계했다.
그러나 파이는 타월을 온수에 적셔와 내 다리 사이를 닦아서 정리해준 뒤에 잠옷과 속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그러더니 침대의 이불을 걷어내고 나를 침대 위로 인도한 뒤에 눕혀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불을 내 목 아래까지 잘 덮어서 정리해주는 그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다.
“뭐 하는 거예요?”
“잘 시간이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아직 잠이 오지 않는다고.
“잠도 졸려야 자는 거죠. 아직 피곤하지도 않은데.”
“슬슬 잠이 올 거다.”
무슨 최면도 아니고, 잠이 뭐 올 거라고 바로 오는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를 올려다 봤다. 나를 향해 빙긋 미소 짓는 그가 커다란 손을 내 눈두덩 위에 조심히 덮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꿈 꿔, 내 사랑.”
그리고 나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도 순식간에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그가 사람을 잠재울 수 있는 마법까지 부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지.
* * *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뒤에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도 침대 시트의 감촉이 달라졌다는 것과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지 않아도 슬슬 깨우려고 했는데. 깼어?”
어제 나를 깨우던 레이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듣기만 해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익숙한 파이의 음성이었다. 그것도 침대 시트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느낌이… 뭔가 이상한데?
침대 시트가 평소 저택에서 사용했던 그것이 아니다. 빳빳한 종이처럼 표면이 조금 껄끄러운 게 아니라 보송보송하고 보드라운 촉감. 이 느낌은 내가 레어에서 사용하던 그것과 똑같았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아서 누워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지. 그런데 그게 왜 지금 느껴지는 걸까?
나는 몸을 뒤척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열심히 들어 올려 시야를 밝혔다.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다. 구조를 보아하니 원래 머물던 저택은 확실한데.
그러다가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파이의 얼굴에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렇게 꾸물대다간 레이라가 찾아올 텐데. 출근 준비해야지?”
“…파이가 왜, 여기 있어요?”
“네가 잠드는 동안 안전하게 보호했지. 그러는 김에 편안하게 자라고 침대도 바꾸고.”
아직 반쯤 뜬 눈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면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원래 쓰던 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푹신한 침대를 확인했다. 이것은 내가 레어에서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침대였다. 익숙하다고 느낀 침대 시트와 이불도. 대체 이렇게 똑같은 건 매번 어디서 구해오는지.
“여기 물.”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파이가 물 잔을 가져다주었다. 아마 내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어서 수분을 공급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을 마시면서 두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 파이를 흘겨봤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여상하게 웃는다.
“그런 의심 어린 눈으로 보지 마라. 정말 하늘에 맹세코 네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네 눈은 내게 묻고 있잖아. 밤새 네게 무슨 짓을 했냐고.”
이젠 아주 내 눈과 대화도 할 줄 알고. 나는 코웃음을 친 뒤에 절반 정도 비운 물 잔을 다시 파이에게 건네고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를 빠져 나왔다.
확실히 비싼 침대라서 그런지 몸이 개운했다. 침대 때문이 아니면… 어제의 일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아, 안 돼! 떠오르지 마라!’
나는 음란으로 물들어가려는 머리를 크게 휘저으며 쏜살같이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파이에게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르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에 얼굴을 정돈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드레스 룸을 나오자마자 파이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어서 잠시 얼음이 되어버렸다.
“…왜요?”
“아침 인사는 해야지.”
언제부터 아침 인사를 포옹으로 했었다고?
내가 얼굴을 굳히고 당황했으나,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내게 다가와서 두 팔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품은 꽤나 안정감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지는 체취도 마음에 쏙 들고.
그래서 낮잠을 핑계로 그의 품에 안겨있을 때가 제일 좋았었다. 예전에는 내가 어떻게든 안기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렇게 먼저 안아주는 그가 낯설다. 그러면서도… 내 심장을 터질 듯 뛰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잔 것 같아서 안심했어.”
“…왜요? 오늘은 안 굴렀나요?”
“구르는 것 같아서 바로 침대를 바꿨지. 잠버릇이 고약한 건 여전해.”
잠들 때의 내가 하는 행동은 스스로가 모르므로 나는 코웃음을 치며 눈동자를 굴렸다.
“늦는다면서요. 나 좀 놓아주시죠?”
사실 이렇게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일부러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었다. 순순히 떨어져 나가는 그가 아쉬운 표정을 보였으나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어? 치즈. 오늘도 늦잠이네?”
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레이라가 홀에서 나를 맞이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빠르게 내려가 어색하게 웃었다.
“늦지 않으려고 빨리 준비한 건데. 지금 가야 하는 거야?”
“아직. 마차가 도착하지 않아서. 오늘도 꽤 잘 잤나 보다. 어제저녁은 어떻게 했어?”
“우리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갔었어. 아, 거기서 귀빈들만 식사하는 방이 따로 있더라?”
나는 어제 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의 특실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레이라는 이미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듯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해주었다.
“다행이네. 네가 맛있는 식사를 했다니 안심이야. 역시 그분께 너를 맡기길 잘했어.”
“너는 어제 식사 어떻게 했어?”
“어제… 조금 늦게 했는데, 블랑 제국에 가서…. 거기는 아침이었거든. 그래서 폐하와 함께 식사하고 돌아왔지.”
어째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뺨을 매만지는 레이라의 행동이 말하지 못할 일들이 잔뜩 있었나 보다. 우리는 서로 비밀이 없는 친구였으나 연인과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나는 말해줘도 상관없는데…. 사실 나도 알고 있거든. 레이라와 에이든이 남들과 조금 다른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레이라의 방에 가죽끈으로 만들어진 채찍과 개목걸이 같은 게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끔 레이라의 손목에 붉은 끈에 묶인 자국들도 보여서 대충 예상이 갔다. 혹시 에이든한테 몹쓸 짓을 당하나 싶어 걱정되어 물어봤었을 때, 레이라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으응. 사실 그거 내가 해달라고 해서……. 폐하는 아주 평범하신 분이야. 그런데 나는, 흠흠, 그게 좋더라고. ]
그 이후로 더는 묻지 않았다. 어쨌든 레이라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니까. 둘이 성적 취향이 맞는다면 굳이 말릴 이유도 없고.
“그랬구나. 아, 마차 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마차를 타고 시장에서 내려 식료품과 과일을 구매했다. 오늘 주문량이 상당히 많아서 걱정이다. 다행히 비플라츠 공작가가 아는 곳이고 배달 시간도 꽤 늦어서 여유는 있을 것 같은데.
주문서에 맞춰 시간별대로 먼저 만들어야 할 디저트 순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가게에 도착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가게 테라스의 테이블에 차려진 간단한 식사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났다. 파이를 떠올리자 어젯밤에 있었던 그 야한 일들이 다시금 내 뒤통수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정말 너의 그분, 참 정성이다. 네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쓰시는 거 보면 내가 다 안쓰러워져. 치즈, 네 덕분에 나도 제대로 된 아침을 먹게 되어 좋아.”
“…흥!”
나는 콧방귀를 뀌면서 일단 차린 음식이니 내 뱃속에 버려주겠다는 마음으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빵과 달걀프라이, 맛있게 구워진 베이컨이었다. 맛은 의심할 것도 없이 좋았다.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정리를 한 뒤에 가게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써 붙여야 할까 봐요?”
“오늘부터 새로 채용된 직원이라고 생각해.”
너무 당당하게 들어와 내 앞에 멈춰 선 파이가 앞치마를 두른 채다. 그 모습이 굉장히 웃겨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나저나 방금 뭐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