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정말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이대로 어영부영 본능에 나를 맡기자니 이 남자의 대단한 집착과 독점욕이 마음에 걸리고. 거절하자니 아쉽고.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갑자기 혼인하겠다고 나타난 걸까?’
애초에 혼인이라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종족이고, 내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도 붙잡지 않던 사람이다. 그렇게 반년이나 보내놓고 이제 와 나를 뒤흔들어놓는다.
드래곤은 심술 맞고 자기애가 너무도 강하며 변덕이 심하고 제멋대로라고 배웠다. 이 남자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드래곤이라는 걸 자꾸 잊어버리는 게 문제다. 그가 이십 년간 나를 키우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뿐이지. 그전에는 대륙 하나를 휩쓸어버릴 정도로 굉장한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오죽하면 재앙이라고 불렸을까.
“왜 나와 혼인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솔직한 답부터 해봐요. 그리고 왜 그런 조건을 내걸 생각을 했는지도요.”
그래도 그가 거짓말을 모른다는 것에 기대해본다.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마음의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는다.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같다. 너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야. 또 너를 다른 놈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 그 조건에 당연하게 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울 거라는 전제가 깔린 것 같았다고요.”
“사실 너보다는 상대방의 유혹이 문제지. 타인의 고백에 쉽게 마음이 들떠버리잖나. 만약 네가 다른 놈을 선택한다면, 나는 그놈의 숨통을 서서히 끊게끔 할 생각도 했다.”
“…그건 범죄 중에서도 악질이잖아!”
“네가 나를 선택하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나. 또 네가 나를 떠난 이유는 혼인문제 때문이었으니 그 문제만 해결하면 서로에게 아쉬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만약 당신이 석 달 안으로 나를 찾아왔다면 그랬겠죠.”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신경질적으로 빼낸 뒤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생각했던 유예기간이라는 건, 딱 백일이었어요. 사실 그 기간도 길게 잡았다고요. 당신이 인간이 아님을 감안해서.”
솔직히 백일이 뭐야? 길어야 하루 이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 매일 그렇게 뒤로 미루고 미루다 보니 백일이 훌쩍 지나버렸었다. 그때쯤엔 이미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려 너덜너덜해졌지. 더 아프기 전에 내 마음을 정리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그와 첫날밤을 보내고 몸을 나눴던 시간이 고작 백일 정도밖에 되진 않았으니까.
정리도 무척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십 년간 쌓인 추억이 쉽게 잊힐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여태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거였는데.
나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설렘과 통증이 공존하는 심장을 열심히 억누르기 바빴다.
“그 기간이 넘어갈 때까지 당신은 내게 소식 한 통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 마음이 바뀌었다고 나를……!”
“이천 년 전에 내게 혼인이라는 덫을 씌워 거짓말을 하고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상대가 있었어.”
분을 이기지 못해 울컥 화를 토해내려던 순간,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게 마력으로 만든 특수 수면제를 복용시키고 내가 잠든 사이 나와 관계를 맺었다고, 그래서 아이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지. 혼인을 빙자하여 나를 잡아들여 내 피로 영생을 얻으려 했다.”
“그 루즈 제국 황제, 말하는 거예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드래곤의 아이를 이용해 블랑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병기를 만들어내려던 놈들의 계략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가끔 들었는데. 그게 정말 있었던 이야기고, 그걸 파이가 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드래곤을 아이와 혼인으로 꾀어내 잡아두고 이용하려던 그 황제가 참 대단하다. 그에 홀랑 넘어간 파이도 순진무구한 어린 양이고. 그래서 혼인이라는 말을 질색하는 거였구나. 크게 화를 당할 뻔했기 때문에.
아니, 그런 거였으면 진작 얘기해줬어야지! 그랬으면 이해해줄 수 있었잖아? 이렇게까지 서로 상처받고 힘들지 않을 수 있던 건데. 꼭 내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쓴 것 같다고!
“그런 일을 왜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어요?”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굳이 네게 알려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걸 말했으면 내가 혼인해줄 때까지 떨어져 지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따지듯 묻는 말에 파이가 조금 어리둥절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나 보다. 가끔 보면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 아둔한 구석이 있다. 이럴 때마다 귀엽게 느껴지긴 하는데… 귀여운 것과 별개로 얄미움이 더 컸다.
“나 배고파요.”
“혼인은?”
…어제도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말했듯 나는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에요. 혼인이라는 게 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특히나 우리는 그 유예기간이 너무 길었어요.”
“그 긴 유예기간을 전부 덮어버릴 만큼 네 감정도 나와 다르지 않은 거로 아는데.”
“가, 감정은 감정이고! 내 말은 내가 아직 당신하고 혼인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요.”
“…그런가.”
방금 그의 생각을 살짝 엿본 것 같다. 당장 나를 확 자빠뜨릴까 하다가, 과거 자신이 혼인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포기하는 것을. 그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나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면서 어깨가 축 처지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한순간 그에게 홀랑 잡아먹힐 뻔했다. 그랬다가는 저에게 이득 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아서 다행이다. 눈치가 빠른 짐승답게 판단력은 아직 제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일단 식사하러 가지. 레이라가 가끔 가는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갈까?”
“그럴까요?”
다시금 여유 있게 미소를 그리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민다. 레이라가 에이든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니 방해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손을 맞잡고 함께 마차에 올라 저택을 빠져 나왔다.
“어류보다는 육류 쪽을 선호하지 않던가?”
“레이라와 함께 지내니까. 서로 입맛과 취향을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우리는 늘 셋이서 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그곳의 주된 식재료는 어류 종으로 문어나 생선이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생선을 비려서 잘 먹지 않는 내 취향을 잘 아는 파이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눈빛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집의 새우와 오징어 튀김, 그리고 타르타르소스를 가장 좋아했다. 아예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호기롭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안내를 받고 자리에 착석했다. 곧 뒤따라 들어온 파이 역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직원에게 받은 메뉴판을 꼼꼼히 살폈다. 아주 눈에다가 새겨버릴 정도로.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도 않는 그가 왜 저렇게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있어요? 나는 시킬 게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것밖에 안 먹거든.”
“무엇을 먹지?”
“모둠 튀김이요.”
“…고작 그걸로 되겠어?”
“생각보다 양이 많은 편이에요. 보면 아마 놀랄걸요? 그걸 나 혼자 다 먹는데.”
잠시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혼자 고민하던 파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한 채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만 쫓았다. 곧 다시 나타난 그가 내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서는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어디 가요?”
“이 레스토랑은 귀빈들이 식사하는 장소가 따로 있다더군. 자리를 옮겨준다고 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레이라가 그런 말을 해주지도 않아서 더 몰랐다. 나와 파이를 본 직원이 아까와는 너무도 다르게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자세를 낮추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긴장한 듯 떨고 있었다. 우리를 레스토랑 제일 안쪽의 어느 커다란 방으로 안내를 해줄 때까지도, 그 직원의 허리는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그럼 분부하신 식사를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우리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직원이 다급히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대체 파이가 자기를 뭐라고 소개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다. 그나저나 이 레스토랑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위층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런 좋은 곳인 줄 알았다면 에이든을 팔아서라도 올 걸 그랬어요.”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레스토랑의 입구는 2층이고, 여기는 계단 하나를 올라와서 3층이었다. 게다가 벽면 한쪽이 전부 유리창이라 아래층보다 환하고 밝았다. 장식장이나 테이블은 전부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으며 천장도 높고 샹들리에도 제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물론 제국 황실의 연회장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보게 되는 화려한 식당의 분위기에 취해 가슴이 설레었다. 얼굴에 미소가 절로 그려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하고 가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물론 나만. 파이는 원탁 의자에 앉아 시선으로 나만 쫓고 있었다.
“파이! 이거 너무 신기해요. 밖에서는 분명 창문 안쪽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안에서는 밖이 다 보이잖아?”
“마력으로 만든 창문이라 가능하다. 네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에 머물렀던 숲속 저택 창문도 똑같았어. 방범도 겸하고 있지.”
“오, 그랬어요? …그거 혹시 벌레도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뭐 그런 건가요?”
“맞아. 벌레라면 질색하잖아, 너.”
어쩐지. 깊숙한 숲이었는데도 저택 내부에는 벌레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었다. 사용인들이 청소를 잘하나 싶었는데, 파이를 떠나 저택에서 살다 보니 알겠더라. 아무리 청소를 한다 해도 거미줄은 생기고 벌레는 시도 때도 없이 난입해서 제멋대로 활보한다는 것을. 정말 마력이라는 거, 여러모로 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어떤 신문물이 들어와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은데.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원탁을 가득 메울 정도의 음식들이 차려졌다.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평소에 이곳에서 볼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 분명 생선요리 전문점인데 고기가 웬 말이냐.
나는 그저 하나둘씩 차려지는 요리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의자에 착석했다. 그리고 직원들이 전부 나가고 나서야 침을 꼴깍 삼키며 파이에게 물었다.
“대체 뭘 주문한 거예요?”
“보통 레스토랑은 일반석과 귀빈석이 나누어져 있지. 나는 그저 이 치치르자 왕국 국왕의 이름을 대고 패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거… 어떤 왕국이든 제국이든 출입할 수 있는 그 패요?”
“응.”
그럼, 말 다 했네. 이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계시는 드래곤이니까.
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려진 요리들을 하나씩 음미했다. 일단 고기부터 한입 먹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나?”
“네! 엄청! 여기 스테이크도 아주 잘하네요?”
“육류는 어류보다 손질도 쉽고 까다롭지 않으니까.”
식탁 위에 두 팔꿈치를 얹어 손깍지를 낀 채로 그 위에 턱을 얹어놓는 파이가 활짝 웃는다. 덩달아 고기를 오물오물 씹던 내 뺨이 발그레 물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