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05화 (105/132)

# 105화

하지만 미칠 듯이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던 그의 혀와 입술이 내게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잔뜩 풀려서 흐릿해진 눈동자로 그를 멍하니 올려다 봤다.

“파이?”

“생각해보니 아직 혼인에 대한 확답을 받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앞섰군.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네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겠지?”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눈웃음을 치는 그가 내게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더니 뻔뻔하게 아까처럼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아직도 방금 키스의 여파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뜨겁게 달궈졌던 머릿속이 천천히 식어 내리면서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저 얄미운 드래곤 같으니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다. 자기가 시작해놓고, 그렇게나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어 나를 현혹한 뒤에 아쉽게 만들려는 속셈.

예전부터 계략을 꾸미는 여우처럼 괘씸하게 굴긴 했으나 이번이 그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내 입에서 혼인하자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릴 생각일지도 모른다. 저러니 저게 순수한 마음인 건지, 아니면 나를 장난감으로 취급해 소유하기 위한 속셈인 건지 헷갈리는 거다. 이럴 때 정말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뾰로통한 기분으로 산책을 마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목욕부터 할까 싶어서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 남자가 내 손을 놓아주질 않는다.

“내 손 좀 놓으시지요.”

“어디 가려고?”

“가긴 어딜 가겠어요? 내 방에 가야죠.”

“같이 가.”

은근슬쩍 내 방에 따라 들어오려는 저 흑심이 눈에 다 보인다. 오늘도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고 했지. 주인을 지키려는 개처럼 굉장한 충성심을 보이는 건 좋지만. 자칫 또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에게 홀랑 넘어갈까 봐 걱정이 된다. 그가 은근슬쩍 유혹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본능에 충실한 육체와 감각을 지닌 내가 더 위험했다.

“그럼 방문 밖에서 기다려요. 멋대로 들어오는 건 용납하지 않아요.”

“알았다.”

“마력으로 나한테 이상한 수작 부리면서 은근슬쩍 안에 들어오거나 하면 정말 화낼 겁니다.”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할까 싶어 한 말인데 그가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마치 그럴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는 모습이다. 하여간 정말, 세상 어느 누가 드래곤이 인간 여자한테 이렇게 철없이 군다고 하면 믿기나 할지.

나는 그를 흘겨보면서 콧방귀를 뀌고 계단을 올라 방으로 갔다. 그리고 손깍지를 놓지 못하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방문 너머가 조용하다. 문에 등을 기댄 그대로 한참을 가만히 서서 밖에 귀를 기울였으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나를 기다리겠다는 건지. 레이라의 말대로 대형견이 따로 없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벗고 물을 받아 목욕을 시작했다. 따뜻한 물을 담은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뺨을 기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심장의 떨림이 가라앉질 않는다. 방금 밖에서 그와 격렬한 키스를 나누던 그 감촉이 아직도 내 입술에 남아있었다. 녹아내릴 듯 뜨거웠던 그의 눈빛에 현혹되어 입술을 허락하고 말았다.

전신을 크게 뒤흔드는 짜릿한 쾌감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질척한 키스와 더불어 그의 몸에 밀착된 채 내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던 그의 단단한 남성의 느낌도. 그 때문에 이미 내 속옷이 흥건하게 젖어버려 혹시라도 그에게 들킬까 봐 절대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거다.

사실 그가 해주는 마사지를 받고 싶었다. 그의 섬세한 손길에 나를 전부 맡겨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 덮쳐주면 그대로 모른 척 그에게 범해질 생각도 했다. 그만큼 지금까지 그를 애타게 기다렸으니까. 그깟 알량한 자존심을 세워봐야 다 무슨 소용 있나 싶은 마음에.

하지만 내 입은 내 마음과 다른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내 심장은 좋다고 하는데 내 입은 싫다는 말을 뱉어낸다. 그가 손깍지를 끼워서 집요한 집착을 보여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는데 내 입은 까칠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러다가도 그가 내 말에 순응해주면 그건 그거대로 서운했다.

“정말… 질 나쁜 인간이었구나. 치즈 너는…….”

자신을 자책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방금 그와 진하게 키스를 나누던 기억이 재차 떠올랐다. 순간 뱃속이 따끔거리면서 뜨거운 열기가 턱 아래까지 솟구쳐 올랐다. 몇 달간 그에게 길든 육체는 애타게 그를 원하고 있었다. 밤낮없이 서로를 탐하며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탓에 매일 밤 그의 애무가 그리웠다. 그가… 한없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닿고 싶었다.

“변태는 파이가 아니라 나였나 보네. 물러가라, 이 음란마귀!”

뺨이 전부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져서 또 볼을 잔뜩 부풀린 채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의 단단한 근육들과 또 대단한 하체의 그 거대한 살덩이를 멀리 보내기 위해 고개도 크게 흔들었다. 그런다고 사라질 생각들이 아니지만.

결국, 나는 손가락 피부가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오늘 너무 목욕을 오래 했어.’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아서 목욕을 마무리했다. 레이라가 나를 기다리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가운을 둘러 입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린 뒤에 드레스를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늘 텅 비어있던 방문 너머에는 파이가 있었다. 그것도 환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은 채로.

“또 머리카락이 덜 마른 채로 돌아다니는군. 날도 추운데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

이렇게 또 걱정을 해주니까 어쩐지 마음이 또 싱숭생숭해진다. 걱정해달라는 뜻으로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은 건 아닌데.

“레이라가 기다릴 거예요. 어서 내려가야…….”

“레이라는 바쁜 것 같다. 지금 에이든과 함께 있어. 괜히 방해 마라.”

“방해라뇨?”

파이가 없을 때도 늘 셋이서 같이 저녁을 했다. 매번 내가 씻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두 사람이 나를 식당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오히려 파이가 나타난 지금이 방해 아닌가? 셋이 지낸 시간에 익숙해진 상태인데.

그랬더니 이 남자가 갑자기 내게 한 발짝 성큼 다가와서는 또 내 허리에 팔을 감싸 당긴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기도 전에 그가 엄지로 내 입술을 가볍게 훑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둘만의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지. 그 좋은 시간이 뭐냐고 묻는다면…….”

천천히 고개를 숙여오는 파이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허리가 파드득 경련했다.

“읏!”

“너와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것과 다르지 않아.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 두 사람의 성적 취향은 좀 유별난 것 같더군.”

귓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져 어깨가 절로 오므라들었다. 목덜미를 타고 내달리는 소름에 전신의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졌다.

“남의 사생활은, 존중해주는 거라고요!”

“안다. 사실 다른 놈의 연애 따위에 관심도 없어. 우리 귀여운 치즈를 생각하기만도 벅차.”

귀를 간질이더니 이번에는 입술을 목덜미에 가볍게 얹는다. 그 말랑한 촉감과 뜨거운 호흡이 피부 안으로 녹아내리듯 스며들어 간질거렸다. 설마 이러다가, 일이라도 치게 되는 걸까 걱정 반 기대 반.

그러나 그가 목덜미에 코를 파묻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외식해야겠군. 일단 머리부터 제대로 말리고 나가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떨리는 숨을 고르는 사이에 그가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나를 테이블 의자에 앉혀놓고는 드레스 룸에서 새 수건을 꺼내와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파이.”

“응?”

“어제 새벽, 내 잠옷 갈아입힌 사람 파이죠?”

너무 익숙하게 내 방을 누비는 그를 향해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쏴붙였다. 그런데도 대수롭지 않게 머리카락을 말리는데 집중하는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몸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더 있던가? 드레스를 입은 채라 불편해할까 봐 그랬다. 그 외에는 아무 짓도 않았으니 걱정 마라.”

잠귀가 아주 밝은 편인데 어제는 정말 기절이라도 했던 건지. 옷을 갈아입혀 줬는데도 깨지 않았던 거면, 혹시 또 내게 딴짓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심란해졌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니 조금 안심은 되지만.

마른 수건이 축축해질 정도로 열심히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제거해주었다. 그리고 바람을 이용해 두피를 말려주고 브러시로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져줄 때마다 졸음이 쏟아지는 건 여전하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더 나른해지는 느낌이고.

“졸려?”

“조금 피곤한가 봐요.”

“그럼 잠시 눈을 붙이도록 해. 재워주마.”

그럴까? 싶다가도 그가 은근슬쩍 내 방에 침입해온 이유가 따로 있나 싶어 그를 흘겨봤다.

“나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요.”

“안아주는 것도 안 되나?”

그건 조금 고민된다. 그의 넓고 따뜻한 품속이 얼마나 아늑한지 누구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딴 맘 품은 거 아니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도 너를 당장…….”

“나가요. 당장.”

나는 봤다. 저 드래곤의 선홍빛 눈동자에 선명한 빛 하나가 번쩍거리는 것을. 그건 그가 나와 격렬한 몸의 대화를 나눌 때 가끔 보이던 광기와도 닮아있었다. 아주 위험하다는 뜻이다. 언제 저 남자의 이성이 깨어져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그래서 방문을 가리키며 아주 진지한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얼굴이 빨개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나 파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내가 앉아있는 의자의 옆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어제 내게 청혼을 하던 그 자세라 심장이 크게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너로 가득 차 있어. 어떻게 하면 네 안에 나를 파묻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쉴 새 없이 하고 있지.”

“그런 얘길 끝까지 들으라는 거라면 필요 없어요.”

심장이 벌렁벌렁. 혹시 모를 위기에 그를 경계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그가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 쥐며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하지만 네가 내 청혼을 받아주겠다고 할 때까지는 내 안의 짐승을 전부 묶어둘 생각이다. 너와 첫날밤을 보내기 전처럼, 보호자로서 너를 지켜주려고. 이런 걸… 유예기간이라고 한다지?”

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새까만 속눈썹이 다시금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히 위로 올라온다. 그 아래에 숨겨있던 선홍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그것은 맑은 유리구슬처럼 유려하게 반짝거렸다.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 맹세하지. 나는 네가 내 품에서 잠들기를 바란다. 너를 안을 수 있도록 내게 허락해다오.”

정말 이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니면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걸까? 그의 품에 안긴 채면 잠이 들기는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해질 것 같은데. 성인이 되기 전의 나였다면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달려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가 이렇게 내 손만 만져도 숨이 거칠어지고 몸이 달아올라서… 괴로운 건 내 쪽이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