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흠, 그럼 이거 반죽 좀 해요. 섬세하게. 아기 다루듯. 알았죠?”
나는 밀가루 강력분을 담은 볼에 이스트와 산양유, 그리고 소금과 설탕을 넣고 파이에게 내밀었다. 곧 손을 깨끗이 닦고 다가온 파이가 머릿수건을 찾아 이마에 두르고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싱긋 웃어 보인다.
하얀 머릿수건이 그에게 꽤 잘 어울린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미소에 또 내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덕분에 손에 쥐고 있던 다른 볼을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그 안에 밀가루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날뛰는 감정을 겨우 다스린 뒤에야 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볼에 계량을 정확히 하고 반죽을 하려고 팔을 걷어붙이는데 파이가 마력으로 내 볼을 뺏어가 버린다.
“반죽은 다 내가 할 테니 너는 계량이나 해둬.”
“…파이도 손이 두 개잖아요.”
그러자 파이가 또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덕분에 나는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마르지 않는 샘을 두고 밑 빠진 독을 채워봐야 체력을 소모하는 행동일 뿐이지.”
마력을 이용하겠다는 말인가 보다. 내 생각을 확인시켜주듯 다른 볼에 담긴 밀가루들이 저절로 휘저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근육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반죽을 끝낼 수 있었다. 기왕 시킬 거 있을 때 다 시켜버리자는 마음으로 타르트 반죽까지 몽땅 만들어서 천천히 발효될 수 있게 보관실에 넣어두었다.
“수고했어요. 덕분에 편하게 끝냈네요.”
“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다. 앞으로 반죽은 내게 맡기도록 해.”
…매일 도와주겠다는 건가? 나쁠 건 없지만 의도가 수상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죽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가게 문을 닫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도 하늘은 푸르렀다. 보통 노을이 질 때쯤 돌아왔었는데 말이다.
“치즈. 잠시 나와 산책을 좀 하지.”
파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을 때, 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내게 산책을 권한다. 그래서 잠시 망설였으나 레이라가 먼저 쏙 들어가 버려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해가 지면 추워질 텐데요?”
나는 애써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었다.
“그래서 보온기능이 있는 담요를 챙겼다.”
하지만 그는 철두철미했다. 언제 가져온 건지 그의 반대쪽 팔에 두툼한 담요가 걸쳐져 있었다. 모든 거절의 가능성을 대비하고 온 사람 같았다.
“……그럼 가요.”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매번 내가 산책하던 길을 그에게 안내했다. 그가 손을 놓아주지 않아서 서로 손을 맞잡은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뭔가 어색하다. 왜 이렇게 긴장되고 불편한지. 맞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찝찝해서 손을 뺄까 고민했다. 그러나 파이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갑자기 손을 움직여 손깍지를 낀다. 단단한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와 움찔거렸다.
“아파?”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살이 벌어지는 아릿함에 왜 몹쓸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육중한 몸 아래에 깔려 울부짖던 지난날의 기억이 물밀 듯 몰려온다.
‘진짜 에이든 말대로 욕구불만이었나?’
왜 이럴 때 그런 야한 생각만 솟아오르는지, 나도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괜히 더워서 손부채질을 하며 먼 산을 응시하고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몸에서 이렇게 열이 나는 거지? 손에서 불이 나겠군.”
그랬건만, 이 남자가 도와주질 않는다. 알면서도 날 일부러 괴롭히려고 또 이런 짓을 벌인 건가 싶고.
“소, 손… 이렇게 손잡고 있으면 누구나 열이 나는 법이라고요.”
“그런 거로 치지. 어쨌든 네 손이 따뜻해서 좋구나.”
무슨 말을 못 하겠다. 놀리는 것 같아서 쏴붙이려고 긴장하고 있는데 또 저런 말을 하니까 전투력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
“별것이 다 좋으시네. 그러다가 내 발톱의 때도 좋다고 하겠어요?”
나는 일부러 더 툴툴거렸다. 그러자 파이는 하나로 질끈 모아 묶은 내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잡아 매만지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숲에서 뛰어놀다가 꼬질꼬질해진 너를 깨끗이 씻길 때 가장 희열을 느꼈었지. 지금 네 몸에서 나는 향기도 좋고, 금방 씻어서 매끈한 네 피부도 좋아.”
“…이 변태!”
“오해하지 마라. 네 체취가 좋다고 느낀 건 너와 첫날밤을 보낸 뒤였어. 그전에는 네가 그저 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
“갑자기 왜 혼인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거예요?”
자꾸만 말로 날 현혹하려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굉장히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떨어져 있는 동안 하나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다. 네가 나에게서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네가 없을 삶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없던 과거에도 사천 년이나 살았으면서?”
“너를 데리고 온 이후부터가 내 삶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장애물보다 너를 생각하는 내 진심이 더 커. 그 장애물이 넘을 수 없는 산이라면, 전부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그의 눈빛이 꽤 단호했다. 참 그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브엘 때문이 아니고요?”
나는 그를 떠보기 위해 삐딱하게 물으며 그를 흘겨봤다. 그의 표정을 일일이 확인하려고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가, 순간 어깨가 바짝 굳어버렸다. 그의 눈빛이 어딘가 실망스러운 듯 너무 따가운 눈빛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아직도 내게 나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실망이 컸다는 것도, 네 그 작은 심장의 생채기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
사실 반년간 홀로 외로움을 참아내던 그때의 기분은,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참 많이도 울었다. 가슴이 망가질 정도로 보고 싶고 그립고 아팠으니까. 그 통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한, 네가 나를 완전히 잊지도 않았다는 걸 안다. 나와 닿았던 감촉, 나와 입을 맞추고 혀를 섞으면서 끓어오르던 욕구도. 내가 지금 당장에라도 널 안고 싶은 기분을 너 역시 느끼고 있다는 것도.”
차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가 반대쪽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어 들어 올리는 바람에 잔뜩 빨개진 얼굴로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다르지 않아. 괜한 고집으로 나를 밀어내려고 애쓰지 마라. 그러다가 네 마음이 더 다칠까 봐 걱정된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가 밉다. 그가 내게 나타나 청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작 하루 만에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반년 만에 나를 찾아온 그가 원망스러운 것보다 바보같이 내 마음이 홀랑 그에게 향해버려서 그게 더 싫었다.
“…당신이 미워요.”
“알아.”
“반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고요.”
“안다. 미안해.”
“내가 얼마나… 파이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데…….”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가 마치 내 괴로움을 다 이해한다고 보듬어주니까 괜히 벅차올라서 울컥해버렸다. 어제부터 꾹 참았었지만 내 투정에 일일이 대답해주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서 어쩔 수 없었다. 늘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했던 내 생각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었으니까.
홀로 격양된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다가 결국 눈물로 터져버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린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예전과 똑같이 부드러워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상냥한 태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전과 같은 모습이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치즈. 나도 내가 참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해. 네게 같잖은 억지를 부린 건 평생 사죄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나를 받아주길 바라.”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간 쌓였던 감정을 담아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내리치기만 했다. 그런다고 아파할 그가 아니지만.
한참을 울다가 이를 악물고 짜증을 가득 담아서 주먹질을 몇 번 하다가 후회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 주먹이 너무 아팠다.
“다 때렸어?”
“아직 멀었거든?!”“그럼 다음에 하도록 해. 그러다 네 손이 더 붓겠다. 이 귀한 손이 부어버리면 내일 케이크를 만들지 못하잖나.”
하여간 저 얄미운 주둥이! 말이나 못 하면!
“치즈.”
“왜!”
“사랑한다.”
여전히 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 파이가 굉장히 애정 가득한 눈길로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진중한 고백에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사이에 그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멈췄다.
“다른 놈에게 네 마음을 허락하지 마라. 네 마음도 네 몸도 네 이 고운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전부 다 내 소유다. 또한, 내 모든 것 역시 너의 것이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입술 위로 지그시 내려앉는다. 너무나도 익숙한, 절대 잊히지 않던 달콤한 향기가 나를 한순간 뒤덮었다.
“잊지 마. 너와 나는 이미 한 몸이자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나도 맹세하마. 두 번 다시 너를 상처 입히는 짓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 나를 믿어줘.”
전혀 가볍지 않은 맹세에 가슴이 울린다. 곧 그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가볍게 감싸며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왔다. 아주 천천히, 그의 온기가 내 피부 아래로 스며들 듯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가 입술을 아주 살짝만 가져다 댄다. 그리고 말캉한 혀로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질러왔다.
“아……!”익숙한 촉감에 전율이 돋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자극이 온 신경을 자극하는 바람에 놀라서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 사이에 입술을 맞댄 그가 두툼한 혀를 내 입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온몸이 순식간에 경직되면서 아랫배가 시큰하게 조여들고 하체가 간질거린다. 타액에 흠뻑 젖은 입안을 그가 맹렬하게 휘저으며 반대로 내 혀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갑자기 불어 닥치는 돌풍의 힘에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그러자 파이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서 당겨 안아 제 몸에 밀착시켰다. 워낙 큰 키를 자랑하는 드래곤이라 덕분에 까치발을 해야만 겨우 발이 땅에 닿을 수 있었다.
“응, 흐… 으응…….”
여기가 밖이라는 것도, 저택의 산책로이지만 밖에 훤히 보이는 장소라는 것도 잊은 채 키스에 몰입했다. 작게 신음하면서 오랜만에 느끼는 키스의 열락에 흠뻑 빠져들어 버렸다. 그가 없는 동안 매일 꿈으로나마 그를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가끔이었고, 꿈은 이렇게 현실적인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알았다. 내가 꽤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게다가 내 몸은 이미 그에게 버릇처럼 길들어 버렸다는 것도.
매우 기뻤다. 정신없는 쾌락에 젖어 들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이. 거침없이 나를 전부 집어삼키려는 듯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그 키스가 너무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매달려서 열정적으로 키스를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