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그에 비교해 파이는 성격부터가 이미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짐승이었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재력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그뿐이지. 배려도 모르고 고집도 대단하고… 거기에 쓸데없이 잘생기기까지 했다. 얼굴만 떠올려도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뛸 정도로.
“우리 치즈가 이성 문제로 고민을 다 하네? 예전에는 그렇게 고백을 받았어도 심드렁하더니.”
“그때랑은 상황이 달라.”
“그렇지. 나는 무엇보다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기왕이면 너를 한도 끝도 없이 사랑해주는 상대를 선택했으면 좋겠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겠구나.”
“애초에 파이가 내 말대로만 해줬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고.”
레이라가 내 상황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연신 구시렁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내일 치 주문량을 정리해서 할 일을 분배하고 재고를 확인했다.
“밀가루가 부족하네. 블랑 제국의 산양유도 에이든에게 추가로 부탁해야겠어. 살 게 많아.”
“그럼 지금 가서 살까? 산양유는 내가 폐하께 말씀드릴게. 가게는 일단 정리해도 될 것 같아. 내일 주문량이 너무 많아서 더 받으면 안 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는 일단 가게 문을 닫고 장부터 봐오기로 했다. 그러나 문을 잠그자마자 너무도 익숙한 마차가 가게 앞에 멈춰 서서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저거 치즈, 네 마차 아니야?”
“…맞아.”
내 거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일단 내가 수년을 타고 다녔던 마차니까. 그 마차 안에서 내리는 파이를 또 뚱한 눈으로 쳐다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긴 왜 왔어요?”
너무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린 파이가 싱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새삼 그가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던가 싶어서 기분이 묘하다.
“도와줄 게 있나 싶어서. 바쁜 것 같아 보이던데.”
“파이가 도와줄 건 없는데요.”
“아직 가게 문을 닫기에는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 어딜 가려는 길이지?”
“장 보러 갈 거예요.”
“같이 가지.”
“레이라랑 같이 갈…….”
“아, 그럼 나는 가게 지키고 있을게. 둘이 같이 다녀와.”
뒤로 한발 물러서는 레이라가 나를 버렸다. 그런 레이라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으나 레이라는 어서 다녀오라는 듯 손짓까지. 결국, 나는 파이와 함께 장을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발 조심하고.”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주는 그가 나를 마차에 올려보낸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 손가락 끝에 전류가 찌릿 울려서 소름이 돋는다.
진정해. 반응하지 말자.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걸 거야.
마찬가지로 오랜만인 전용 마차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푹신한 의자쿠션과 앞뒤로 커다란 창문이 매달려 시야가 확 트인 공간. 확실히 일반 마차들보다 승차감도 좋고 실내도 넓어서 마음에 든다.
이런 걸 보면 내가 그동안 정말 편하게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매번 까만색의 상업용 마차를 이용했었는데 좁기도 하고 의자도 딱딱해서 탈 때마다 엉덩이가 얼얼했었다. 이래서 사람은 돈을 벌어서 자기 집과 자기 마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삶이 녹록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힘들어 보인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달리는 마차 안, 내 맞은편에 앉은 파이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부담스러운 눈을 마주하는데 왠지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왜 죄를 지은 기분이지?
“이만큼 힘든 것도 모르고 파티시에가 되겠다고 덤빈 건 아니었어요.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없었을까 봐?”
“나는 네가 충분히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의지가 있었으니까. 절대 너를 과소평가했던 적은 없었어. 오해하지 마라.”
진지하게 저런 이야기를 하니까 또 어깨에 힘이 빠져버린다. 과거에 그랬었지. 내가 파티시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또 나를 많이 돕겠다고. 그래서 꽤 기뻤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러면서도 나를 감금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다니. 괜히 또 얄미워져서 콧방귀를 뀌며 그에게서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곧 시장 입구에 다다라서 마차가 멈췄고, 나는 파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그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가장 먼저 자주 거래하는 식료품점에 찾아갔다. 일단 오늘 당장 내일 치 반죽을 해놔야 해서 이것저것 구매하다 보니 꽤 묵직하다. 배달시키기엔 양이 적고 들고 가자니 무겁고.
“그걸 치즈 네가 들겠다고?”
“이 정도는 끄떡없……!”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커다란 짐 뭉치를 들자마자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이걸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중력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기분에 움찔했다.
‘응?’
온몸이 땅 아래로 파고 들어갈 만큼 무거웠던 짐이 마치 솜사탕처럼 가벼워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파이의 마력 때문이라는 걸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혼자 가능하겠군. 또 사야 할 건?”
“…오렌지? 오렌지 타르트하고 레몬 타르트를 한번 도전해보려고요.”
“그럼 과일가게로 가야겠군.”
밀가루며 버터에 설탕까지 잔뜩 들어있는 짐 뭉치를 한 손으로 들고 그와 함께 과일가게로 향했다. 노란빛을 띠는 오렌지와 레몬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다섯 개씩만 골라서 종이봉투에 담았다. 그 종이봉투 역시 오렌지의 무게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충동구매를 하긴 했는데 짐이 조금도 무겁지 않아서 후회되지 않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짐을 실은 뒤에 다시 마차에 올라 가게로 출발했다.
“비플라츠 공작가에서 주문량이 상당하던데.”
심드렁하게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들려오는 파이의 목소리에 잠시 경직되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여전히 창문을 향한 채로 떨리는 눈동자를 힘겹게 굴렸다.
“그건… 가게 비밀인데 파이가 어떻게 알아요?”
“네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나. 또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는 건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가게의 주문서에 손댔어요?”
“비플라츠 공작가의 집사가 찾아온 걸 봤다.”
그 노신사가 집사였어?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리브엘의 저택에 가본 적 있어요?”
“어제.”
“…어, 어, 어제?!”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인데 대체 왜? 그가 리브엘의 저택에 왜 가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람?!
그가 행여 리브엘에게 해를 끼쳤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 마세티앙 황궁의 휴게실에서 벌어졌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리브엘에게 못된 짓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요?”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대화요? 몸의 대화 말고?”
“몸의 대화, 라…….”
심드렁하던 그의 눈빛이 조금 그윽하게 변한다. 순간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요망한 드래곤의 입에서 다음으로 나올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게다가 한층 뜨거워진 그 야릇한 눈빛 하나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관능적인 시선에 전신의 솜털이 전부 곤두세워졌다.
“허, 허튼 생각하지 말고! 리브엘을 다치게 한 거 아니냐고 묻는 거라고요.”
“내가 위험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냐?”
“파이가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파이가 자신의 팔을 내 쪽으로 내밀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 힘줄이 툭툭 불거져 섹시해 보이는 매끈한 팔뚝 위로 마치 날카로운 돌덩이에 긁힌 것처럼 굵고 긴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막 피가 멈춘 날것의 상처는 길어야 어제 생긴 것 같았다.
“이거… 어디서 다쳤어요?”
“그놈이 마력은 없지만 힘과 속도는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어. 네게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겠지만.”
“그럼 리브엘이 이랬다는 거예요?”
“여기뿐만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지. 지금도 아프다. 이러다가 상처가 덧날까 봐 걱정이다.”
내가 아는 리브엘은 누구를 쉽게 해칠 사람이 아니다. 그가 흡혈귀이긴 하지만 제 입으로도 누구에게 가해한 적이 없다고 장담했던 이다. 하지만 파이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여간, 상처는 그때그때 치료해야 덧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거 덧나면 꽤 오래가는데. 딱지도 생기고! 암만 죽지 않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나는 네게 걱정 받는 것이 참 좋다.”
뜬금없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꺼내는 그를 찌릿 노려봤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혼인에 대한 조건을 철회한다면 나와 혼인해주겠나?”
연달아 내 심장을 강타하는 그가 또 내 머릿속을 강하게 휘저어댔다. 뭔가 굉장히 대단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 도착했네요.”
마침 그 순간 마차가 멈추면서 창문 밖으로 가게가 보였다. 그 가게 의자에 앉아있는 레이라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망설임 없이 마차 문을 활짝 열어 내렸다. 그리고 구름처럼 가벼운 짐들을 양손으로 거뜬히 들고 레이라를 향해 테라스 계단을 올랐다.
“많이 기다렸지? 과일도 좀 샀어. 전에 말했던 오렌지랑 레몬도 시도해보려고.”
“너 그거 안 무겁니?”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짐을 살펴보는 레이라에게 짐 뭉치를 내밀었다. 그걸 조심스레 받는 레이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받아들더니 곧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활짝 웃는다.
“마력이구나? 이렇게 쓰면 앞으로 엄청 편하겠는데?”
“이럴 때만 좋아. 평소 때는 잘 모르겠지만.”
내 뒤를 쫓아 올라오는 파이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대꾸하며 재빨리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뒤에서 다가오는데 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방금 그가 했던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두둥실 떠다니기 바빴다.
[내가 혼인에 대한 조건을 철회한다면 나와 혼인해주겠나?]
사실 리브엘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설레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직도 파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조건을 철회해준다면 그의 청혼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다. 다만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행동에 많이 지쳤을 뿐.
이,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일해야 해. 빨리 일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어.
나는 고개를 붕붕 휘저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머릿수건을 둘렀다. 그리고 내일 치 빵 반죽을 위해 호흡을 고르면서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좋아, 됐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에 저울에 커다란 볼 하나를 놓고 그 안에 남은 밀가루를 채로 걸렀다.
“도와줄까?”
계량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뒤에서 파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랐다. 순간 볼을 엎을 뻔.
“노, 노, 놀랬잖아! 기척은 하고 들어와야… 아니, 파이가 주방엔 왜 들어와요? 여기 외부인 출입금지인 거 몰라요?”
“레이라는 들어가도 된다던데.”
확실히 레이라는 파이에게 너무 살가워서 문제다. 잠시 바깥을 찌릿 노려보다가 고민했다.
반죽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다. 이미 내 팔에는 근육이 생겨버린 뒤다. 게다가 요즘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서 뭔가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다고나 할까? 굳이 도와주겠다는데 그의 힘과 마력을 좀 이용하면 편하기는 하겠다는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