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그 생각에 다다르자 뒤통수가 조금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파이는 항상…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과 말에 상처를 입고, 혹시나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했을 거다. 그래서 그렇게 나를 레어에 가둬놓고 자신의 품에서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를 썼던 걸까? 내가 매번 혼인을 받아주지 않으면 떠날 거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그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을 테고.
당시 그의 마음을 짐작하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이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일단 뭐든지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도 문제다. 또 대화가 아닌 감금으로 나를 잡아두려고 하는 그 못된 생각부터 없애지 않으면 절대, 그를 받아주지 않을 거다.
“치즈. 오늘따라 반죽이 아주 찰진데?”
“…반죽을 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
진지한 얼굴로 밀가루 반죽을 패대기치자, 레이라가 반죽을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릿속을 최대한 비우고 내 손맛을 기다리고 있는 반죽 재료들을 치대는데 열을 올렸다. 레이라의 도움을 받아서 주문량을 모두 채우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그만 좀 쉬었다가 해. 과일만 올리면 되잖아. 가게 뒤편에 식사 준비해놨으니까 어서 가서 먹고 와.”
“기왕 하는 거 다 끝내고 먹을래.”
“안 돼. 음식 식어. 어서 나가! 어서!”
결국, 레이라에게 등 떠밀려서 주방 뒷문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식사에 열을 올리는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우리 가게 뒷문이 레어하고 연결되어 있던 거죠?”
주방 뒷문은 가게의 뒤편 야외 공터로,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햇빛이 아닌 인위적인 조명과 함께 낯익은 실내가 눈앞에 펼쳐져 당황함도 잠시.
너무 자연스럽게 레어 식탁의 의자에 앉아있던 파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허리에 한쪽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순간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파티시에가 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만한 체력을 감당하려면 잘 먹어둬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양고기를 준비했어. 늘 네가 먹던 소스도 함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침이 고인다. 항상 저택에서 식사할 때마다 레어에서 먹던 음식들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래서 버릇이라는 게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지. 미각과 후각이 워낙 발달해 있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허리를 잡힌 채로 반쯤 끌려가다시피 식탁으로 향했다. 코끝에 스치는 향긋한 소스에 벌써 배꼽시계가 반응을 보였다. 다시는 먹을 수 없겠구나 싶었던 음식들이 눈앞에 펼쳐져있어서 감회가 남다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맛깔스럽게 구워진 양고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가져다주마. 자, 어서.”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기를 보다가 눈동자를 굴려 내 옆에 앉는 파이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면서 수줍은 눈웃음을 쳐댄다. 덕분에 심장이 눈치 없이 뛰는 바람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다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고기는 식으면 그 맛이 덜하다고 했잖아. 일단 먹고 얘기하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그가 내 손에 포크를 쥐여줬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나는 다시 양고기에 시선을 돌렸다. 곧 파이가 미리 잘게 잘라놓은 고기에 고동색의 걸쭉한 소스를 잔뜩 뿌려주었다. 그 영롱한 고기가 소스에 폭 감싸인 채로 어서 먹어달라고 나를 유혹하고 있다. 나는 망설임 하나 없이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에 바로 직행했다.
‘하아. 녹는다, 녹아.’
반년 만에 처음으로 내 미각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기와 소스가 환상적인 왈츠를 추는 느낌.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의 질도 최상급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십 년간 파이가 내게 먹인 고기는 단 한 번도 질기거나 맛없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천천히. 그러다가 체한다.”
고기만 먹는 내 입에 파이가 샐러드도 넣어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목이 막힐 때쯤 알아서 물 잔도 건네주어서 조금 심술이 났다.
“나도 손이 있어요.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좀 놔둘래요?”
“그러기엔 네 반응이 너무 느려. 예전에 그런 말 했었던 거 기억나지 않나? 이미 목이 막힌 상태에서 물을 찾으면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슬퍼했잖아.”
“내가요? 언제?”
“네 살 때였다.”
“…일곱 살 기억도 희미한데 네 살 기억을 어떻게 다 해요?!”
하여간 저 망각과는 거리가 먼 짐승 같으니. 나는 괘씸한 그를 찌릿 노려봐준 뒤에 다시 고기를 열심히 흡입했다. 슬프게도 내가 물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손을 뻗는 것보다 그가 물 잔을 건네주는 게 더 빨랐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그가 아기처럼 챙겨주니까 기분이 나쁘면서도 좋았다. 이 상반된 감정과 함께 다가오는 혼란을 애써 감춘 채 나는 말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잘 먹었어요.”
그릇을 싹 비우고 나서야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그래도 맛있는 걸 먹게 해주었으니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그가 꽤 만족스럽게 웃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하던데 내가 도와줄 이를 보내줄까?”
“혼자도 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문을 힐끔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저 문을 열면 가게 주방이 아니라 동굴이 나오는 거 아니야? 설마 이대로 나를 레어에 가둬두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아. 무사히 돌아갔으면 좋겠네. 밀린 작업이 아직 한참인데 시간 내에 완성하지 못하면 후작가에서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려야겠어.”
파이라면 충분히 나를 가둬놓을 사람이라서 일부러 더 혼잣말인 척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문을 열었을 때 동굴이 나타난다 해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리고 식당 문으로 향해 아주 당당하게 걸어가 망설임 없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의외로 너무 정직하게 가게 주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양심은 남아있나 보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주방으로 넘어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배도 채웠으니 어디 힘내서 작업해볼까?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서 방금 맛있는 음식을 먹은 힘을 타르트 장식에 쏟아부었다. 열다섯 개의 작은 타르트와 세 개의 케이크에 열정을 한껏 담아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를 완성하고 나서 환호했다. 지금껏 내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때, 레이라? 맛있어 보이지?!”
“오호. 효과가 꽤 좋네. 역시 치즈에게는 ‘파이’가 약이었어.”
“…무슨 뜻이야, 그거?”
내 완성작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포장할 박스를 꺼내왔다. 그런 레이라를 둥그렇게 뜬 눈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레이라는 조심조심 박스에 완성작품들을 하나씩 넣어 포장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좀 내가 아는 너다워서.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온 느낌이야. 나는 지금의 네가 참 좋네.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밝은 치즈만 봤으면 좋겠어.”
나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레이라의 말을 이해했으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말없이 개별포장을 함께 한 뒤에 마차를 불러서 하나씩 조심히 실었다. 배달은 레이라가 다녀오기로 했고, 나는 레이라가 돌아올 때까지 가게를 지키기로 했다.
“후우, 역시 대량주문은 좀 힘드네. 정말 직원을 구해야 하나?”
오전에 이미 만들어 놓은 빵이 다 팔려서 가게는 한적했다. 나는 계산대 앞 테이블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확실히 느낌이 평소와 다르긴 하다. 매번 하늘을 보긴 했어도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꽤 예쁘게 보였다. 잠시 잃어버렸던 미각을 되찾아서 기분이 좋아진 걸까?
“실례합니다.”
한창 맑은 하늘에 취해서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떤 노신사가 가게로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를 해온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했다.
“네. 어서 오세요. 오늘치 빵은 이미 다 팔려서 내일 주문만 가능합니다!”
“미리 주문하려고 합니다만. 여기 목록이 있습니다.”
말하며 내게 곱게 접은 종이를 건네준다. 또 대량주문이겠구나 싶어서 진지하게 직원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접은 종이를 펼쳤다.
“…응?”
내용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내가 예상한 대량주문은 맞는데, 그 주문서에 적힌 가문의 이름에 ‘비플라츠’ 공작가가 적혀있어서. 또 배달을 파티시에가 직접 해주길 원한다는 글을 보아하니 리브엘이 나를 따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마음이 착잡해진다. 리브엘이 나한테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파이 때문에 다치고 상처 입는 것 같아서. 파이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복잡한 심경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주문량이 꽤 많네요. 알겠습니다. 혹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는지요?”
“건강이 우선이니 식사는 꼭 때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가게 마감 시간에 맞춰서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다시 예를 갖춰서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노신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종이를 다시 들여다 봤다.
대체 이 많은 디저트를 어디에 쓰려는 걸까? 아직 혼인하지 않아서 공작부인의 자리는 비어있다고 했다. 가문의 안주인이 없어서 티파티는 열지 못할 텐데. 본인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나.
“문제네. 문제야.”
내일 리브엘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다. 어제도 그냥 보내버려서 미안했는데.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친구로서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표현하면, 그건 더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봐.]
오전에 레이라가 했던 말이 귀에 아른거린다. 파이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리브엘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겠지.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파이가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아서 혼란스럽다. 이대로 리브엘과 다시 친구로 지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자신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나 좋아했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주문서를 손에 쥔 채로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배달을 갔던 레이라가 돌아왔다. 나는 레이라를 향해 난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고 종이를 건네주었다.
“내일 치 주문이 들어왔는데… 조금 문제가 있네.”
“문제?”
종이를 건네받은 레이라가 가볍게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가장 중요한 건 네 마음의 결정이라고 생각해. 누가 강요한다고 해결될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구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사실 아직, 모르겠어.”
리브엘은 누가 봐도 연인이나 신랑감으로서 적격이었다. 다정다감한 성격부터 시작해 귀족으로서 완벽한 매너를 갖췄고 부와 명예까지. 그가 인외 종족이라는 것만 빼고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