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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01화 (101/132)

# 101화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마차에 올라타 창밖을 힐끔 쳐다봤다. 파이가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현관 쪽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레이라. 나 뭐 좀 물어볼…….”

말이 끝나기도 전, 레이라가 파이의 행방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제 종일 네 방문 앞에 서서 기다리시더라. 피곤했는지 일찍 자러 들어갔다고. 그래서 아침에 다시 가봤는데 네가 아직도 자고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어.”

“…파이가 문 앞에 계속 있었다고?”

“응. 진짜, 언제 봐도 참 대형견 같다니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알아서 설명해주는 레이라의 광대가 승천하도록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밤새 문 앞에서 기다렸나 봐. 다들 두 사람 이야기를 궁금해하더라. 대체 무슨 사이였고 저분은 누군데 네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냐고.”

레이라는 다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마차 끝에 걸터앉아 내게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어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그래서 나는 다시 창문 밖을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나 식사 마치고 바로 올라가서 잤어. 별로 대화 나눌 기분도 아니었고.”

“…바로 올라가서 잤다고?”

“응. 그리고 지금까지 깨지 않고 쭉 잔 거야.”

한참 신나게 웃던 레이라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꽤 놀라워했다. 아마 자면서 한 번도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듯했다.

우리의 하루는 늘 내가 먼저 해도 뜨지 않는 새벽에 깨어나 혼자 차를 마시는 거로 시작했다. 날이 밝기 전까지 새로운 레시피를 구상하고 그날 주문받은 것과 판매할 양을 체크했다. 그리고 출근 시간 전에 레이라를 깨우는 건 내 몫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그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까지 긴 잠을 잔 것도 생애 처음이었다.

“정말 많이 피곤했었나보다, 너. 그래도 푹 잤으니까 다행이야. 네 그분도 돌아와서 이제 마음이 좀 놓인다. 정말 불안했었거든. 아! 마음에 안정이 와서 그렇게 푹 자게 된 걸 수도 있겠네.”

손뼉을 짝 마주치는 레이라가 기쁘게 하는 말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차마 지금 내 상황이 이렇다고 털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시장에 도착해서 우리와 거래를 하는 식료품점에 주문한 뒤에 배달을 부탁했다. 아침부터 활기가 넘치는 시장을 구경하다가 초콜릿을 파는 매장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달달한 향이 코끝에 스치자 배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즈. 배고파?”

“응.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런가 봐.”

“그럴만하겠네. 아침이라 문 여는 식당이 있을까 모르겠다. 보통 다 점심시간에 여니까.”

“가게 가서 뭐라도 해 먹어야겠어. 어서 가자.”

오랜만에 달걀프라이를 해서 빵에다가 얹어 간단하게 먹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야채는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레이라의 충고에 고민을 했다. 그 결과 햄과 야채까지 집어넣은 샌드위치를 먹자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가게에 도착했을 때, 휑한 테이블 중 하나에 잘 차려진 음식이 펼쳐져 있어서 당황했다. 마치 방금 만든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옥수수 수프. 달걀과 감자를 으깨서 갖가지 채소를 다져 넣어 만든 샌드위치. 그리고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딸기 주스까지.

“…뭐야, 이거?”

주위에 누가 있나 싶어 두리번거렸으나 행인들이 전부였다.

“레이라. 에이든이 왔다 간다고 했어?”

“아닌데…….”

“그럼 누가…….”

의심 가는 사람은 단 한 명. 이 차려진 음식들이 전부 내 취향에 부합되어 있다는 것만 봐도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파이뿐이다. 그 의심을 가득 담아 딸기 주스 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아봤다. 역시, 달다. 꿀을 한가득 부어 넣어서 단내가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흥. 이런다고 내가 용서할 줄 알았나?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배고팠는데 어서 먹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 앉아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적거렸다. 그러나 레이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치즈. 그게 뭔 줄 알고 먹으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먹어도 돼. 안 죽어.”

옥수수 수프 한 수저를 떠서 냄새를 맡아보니 꽤 익숙한 그것이다. 내가 레어에서 자주 먹던 그 맛의 향기. 그래서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수프를 호로록 마셨다. 먹어보니 더 확실해졌다. 내가 아는 레어의 주방장이 만든 음식들이라는 것을.

“이거 파이가 준비한 거 맞아. 그러니까 먹어도 괜찮아, 레이라. 어서 앉아.”

“그분이?”

“응.”

그제야 레이라가 안도하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맛있게 수프를 먹는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수프를 한 모금 떠 마신다. 레이라의 입에도 맞는지 우리는 수프를 전부 비울 때까지 허겁지겁 떠먹기 바빴다.

“이거 정말 맛있다. 나 옥수수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뭔가 좀 느끼한 향 때문에 거부감이 생겼었거든.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없네. 정말 고소해.”

“옥수수도 달달한 옥수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걸 이용하면 옥수수빵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밀빵보다 더 고소할 것 같아.”

“그럼 옥수수에 대해서 좀 정보를 모아볼게. 우리 파티시에를 위해서!”

그냥 툭 던진 말인데 레이라는 늘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빵 반죽에다가 산양유와 견과류를 넣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했더니 바로 재료들을 사들여 오기도 했었다.

그 시도는 꽤 호평을 받았고 일반 밀빵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과 고소함이 일품이라고 극찬을 하더라. 덕분에 디저트 가게인데도 곡물 식빵과 바게트의 판매량이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오전에 구워놓으면 점심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전부 팔려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럼 어제 그 오리고기 다 먹고 그냥 잔 거야? 따로 얘기는 해보지 않았고?”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던 레이라가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만 휙 들었다가 내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얘기할 거리도 없어. 나는 아쉬울 거 하나 없거든.”

“뭐라고 하셨는데? 설마 아직도 혼인 안 해주시겠대?”

“차라리 그거라면 진작 내쳐버렸지. 웃기게도 혼인은 하되 조건을 걸지 뭐야?”

“조건……?”

나는 분명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있는 파이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바람을 피우거나 파이가 오해할만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는 나를 감금시켜버리겠다는 뜻을 당당하게 말하더라고.”

“그게 정말이야?”

“응. 혼인이 장난이야? 혼인은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가 바람을 피울 거라고 아주 대놓고 확정을 지어버리더라고?”

“아…….”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한탄을 뱉어내는 레이라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린다. 그러더니 혼자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딸기 주스 잔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치즈.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 생각에는… 뭔가 그분에게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던 것 같아. 남녀 사이를 맹신할 수 없는 그런 과거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가? 뭐 과거에 무슨 일을 당한 기억이 있다고는 들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벌써 이천 년 전의 일이라고 했단 말이야.”

지난번에 루즈 제국의 황제라던 하유르가 와서 그랬었다. 이천 년 전에 그녀의 조상인 당시 황제가 파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나쁜 짓을 하려 했었다고. 단지 그거 때문에 여자를 믿지 못하는 거라면 애초에 나와 혼인할 생각도 없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내가 폐하께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께서는 혼인 자체에 불신이 있는 것 같대. 아마 과거에 커다란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게 아닐까 싶다고 하더라. 드래곤은 인간과 다르게 망각이라는 걸 모르는 안타까운 존재라고.”

파이의 기억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저가 불리하다 싶을 때는 모른 척하지만.

그나저나 불신이라. 그 이천 년 전의 사건에 내가 듣지 못한 뒷이야기가 있던 걸까?

“아무튼, 나는 상대를 믿지 못하는 남자하고 혼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런 어이없는 조건이라니. 나를 믿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혼인을 하겠다는 거냐고!”

“그건 그렇다. 치즈 네가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는 사람도 아니고, 최근 반년간 떨어져 있으면서 더 애틋해지긴 했지.”

“누… 누가, 누가 애틋해져? 내가?!”

굉장히 당황스러운 말에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묻자, 레이라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자기 자신은 모르는 법이야. 스스로 깨닫기는 어렵지. 아무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레이라가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오물오물 씹으면서 딸기 주스를 마시는 레이라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라가 숨죽여 웃더니 입가를 정리하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었다.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너무 안타까워. 보는 사람 속 터지게 서로 진심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나 싶기도 하고. 만약 너의 그분이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둘 다야. 두 사람 다 고집도 세고 자기주장도 강하고 자기 생각밖에 안 하고. 서로 양보도 해주고 배려를 해주면 참 좋을 텐데.”

픽 코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라가 빈 그릇을 한곳에 모아 정리를 했다. 그래서 나도 남은 샌드위치를 입속으로 밀어 넣은 뒤에 정리를 도왔다.

“양보나 배려나 서로 할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파이는 저 혼자 잘나고 위대한 종족이시라 그런 건 하찮은 인간들이나 하는 거로 생각할걸?”

“그래? 내가 볼 때는 그분도 인간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딜 봐서?!”

“만약에 그분께 오래된 이성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봐? 그 상대가 너의 그분에게 자기와 연애하자고 유혹을 한다면? 과연 네가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고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까?”

그 말에 지난번 하유르가 레어에 와서 파이를 현혹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파이의 곁에 들러붙어 밀착하고 파이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던 그때. 생각만 해도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생성된 뜨거운 열기가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무척이나 화가 나지. 그런다고 파이가 넘어갈 남자는 아니지만…, 그건 보기만 해도 속이 홀랑 타버리는 기분이었다고.”

“그렇지? 네가 지난 황궁 무도회 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너의 연인보다 친구인 공작 각하에게 더 마음을 쏟았으니 충분히 오해할 상황이었지.”

“하지만 리브엘은 정말 친구…….”

“치즈.”

꽤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레이라가 내 말을 가로채 갔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굉장히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레이라를 빤히 쳐다봤다.

“왜?”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친구로서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표현하면, 그건 더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봐. 너는 그분께서 너를 믿어주지 못해 서운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상대는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봤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리브엘이 아카데미 시절부터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드러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나다. 처음으로 생긴 이성 친구였고, 언제나 나를 편하게 해주는 리브엘과 멀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다. 파이는 리브엘을 처음 봤을 때부터 경계했지. 그건 내가 하유르를 신경 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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