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내 사랑.”
「아이, 정말 자꾸 남들 있는 데서 그러면 부끄럽다니까요?」
“적응해야지. 이따 많이 예뻐해 줄 테니까 기다려?”
「…응.」
얼굴이 전부 발갛게 달아오른 레이라가 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는 동시에 영상이 종료되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다. 그놈이, 치즈를 노리는 그 흡혈귀 녀석이 오늘 치즈와 담판을 지으려고 한다. 당장 그곳에 가서 감히 내 아이에게 손을 대려는 놈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치즈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받아야겠지. 평생 나를 보기도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친구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내게 화를 냈던 그 날, 그때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으니까.
선뜻… 치즈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나를 보면 여기 왜 왔냐고,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지 말라고 내칠 것 같아서. 그 차디차게 식어버린 눈빛을 보면, 나를 떠나던 그 날처럼 붙잡지도 못하고 얼어 버릴까 봐.
“카르디옌. 들었지? 가서 말려야 하지 않을까?”
말린다, 라. 어떻게? 무슨 수로? 자신은 독립된 인격이라며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외치던 치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혼자서도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걸 지난 반년간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녀의 이성문제에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건가?
“야, 카르디옌!”
“치즈는 거절할 거다. 이제 겨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으니 혼인이 문제는 아닐 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 생각은 다른데? 그 녀석을 만난 이틀 전의 치즈는 온종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해. ‘리브엘이라면 파이와 다르게 자기가 뭘 하든 못하게 막아서지 않고 응원해주지 않을까?’라고 했다더라.”
“…치즈가?”단지 혼인만 회피했던 거다. 치즈가 하고 싶다는 걸 막아선 적은 없었는데. 다만 다른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게 싫었을 뿐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먼저 익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치즈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니. 그것도 긍정적으로?
“너 진짜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 뺏긴다. 아무리 삶이 길다 한들 그런 운명적인 만남이 또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너를 지금의 카르디옌으로 만든 사람이 치즈다. 치즈가 아니었으면 너는 그저 학살자에 불과해.”
지난번 마세티앙 제국의 황제도 그런 말을 했다.
[최근 이십 년 간 블랙 드래곤이 눈에 띄질 않아서 수명을 달리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 숙녀분의 은공이었군요. 참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 평화가 이십 년간 지속되어 나라에 안정이 찾아와서 치세에 어려움이 없었음을 고백했다. 부디 그 평화가 무난히 이어지길 바란다고.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치즈가 이 세계에, 그것도 내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하지만 내가 필요한 만큼, 과연 치즈도 나를 원할까?
[우리, 잠시만… 헤어져요. 그게 좋을 것 같아. 파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때의 치즈는 이미 내게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혼인으로 맺어지는 사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는 의미가 없다고 했으니까.
대체 왜 혼인을 그렇게 원하는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도 치즈 같은 경우는 나와의 관계만으로 만족하는 아이가 아니라서. 다른 이와의 친분이 나와의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아이라 늘 그게 불안했다. 혼인을 허락하면, 치즈도 다른 귀족들처럼 또 다른 연인을 만들어 은밀한 관계를 주고받을까봐. 내게 마음이 식었다면서 나 몰래 연인을 만들까봐.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 틈에 섞이지 않도록 했던 건데. 친화력이 뛰어난 치즈에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 반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아, 답답하네. 카르디옌. 그래서 저대로 내버려 둘 참이야? 그래?”“…시끄러워.”
“이제 보니 멍청한 드래곤이었군 그래? 제 연인의 마음 하나를 잡지 못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들다니. 글러 먹었어. 치즈 말대로 차라리 저 흡혈귀가 치즈의 반려로 딱 맞겠다고!”
반려라는 말에 순간 뱃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하지만 곧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버렸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나는 그저… 내 소중한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었을 뿐인데. 인간의 더러운 혼인문화 따위로 우리 사이를 물들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인데. 왜 얻어지는 것 하나 없는 그 서약서 하나에 목을 매는 거냐. 대체 왜.
「생각은 해봤어?」
마음이 갈팡질팡하던 찰나, 리브엘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움찔거렸다. 고개를 들자 다시 재생되는 영상 속에 치즈와 재수 없는 흡혈귀 자식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본 채 앉아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치즈가 밀빛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치즈가 부끄럽고 민망할 때 보이는 그 얼굴이다. 마음이 굉장히 들떠있다는 증거.
순간 속에서 울컥, 뜨거운 감각이 치솟는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나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 파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그런 긴밀한 관계를, 상상해본 적도 없고.」
「그건 지난 과거일 뿐이야. 내 예상에 지금의 너와 미래의 너는, 과거의 너와는 다를 거라고 확신해.」
「…내가 파이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는 거야?」
「물론이야. 네가 그 대단한 사랑을 한 만큼 상처 또한 클 테니까. 결국, 훗날 기억에 남는 건 상처뿐이거든. 나는 그 상처를 최대한 보듬어주고 싶어. 그리고 그 상처를 내 진심으로 덮어주었으면 해.」
어쩐지 화가 난다. 내가 지금껏 공들여 키워놓은 내 귀한 아이의 추억을, 고작 상처라는 말로 짓뭉개버리다니.
그러나 치즈는 나와 다르게 수줍게 웃으며 볼을 붉힐 뿐이다. 그래서 더, 내 감정이 고장 난 것처럼 마구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치즈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질 수도 있어.」
「전부 다 감당할 자신 있어. 그만큼 널 사랑해.」
그리고 잠시간 이어진 침묵 뒤, 해맑게 웃는 치즈의 대답에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나도 좋아.」
* * *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나도 좋아.”
꽤 큰 결심을 했다. 어제 레이라와 긴 시간 이야기를 하고 결정한 거다. 레이라는 내게 처한 상황들을 전부 아는 유일한 친구였고, 여전히 리브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레이라는 오히려 나와 리브엘의 관계를 독려했다.
[이미 반년이 지났어. 아직도 그분이 널 찾아오지 않는다는 건,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뜻 아닐까? 기다리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야. 나는 치즈 네가 나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일부러 손님들 앞에서만 밝은 척하잖아. 휴식시간이나 집에 들어와서는 종일 창밖만 쳐다보고 있는 거 모를 줄 알고? 그거 꼭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고.]
[그런 거 아닌데…….]
[아무튼,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느니 새로운 관계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적어도 비플라츠 공작 각하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딱히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대라면 연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연애?]
[그렇게 혼자 애타지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고 좀 그러라고. 일만 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어딘지 공허해 보여, 너.]
레이라는 에이든과의 관계를 비밀로 한 채 가문에다가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에이든이 따로 사준 저택에서 나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서로 깨어있고 잠드는 시간이 다른 장거리 연애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는 나날이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걸 보며 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한 달 정도 지나면 파이가 나를 데리러 올 줄 알았다. 레이라와 함께 디저트 연구에 집중하면서도 저녁에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매일 기대를 했다. 하지만 밤하늘에 별이 뜨고 달이 지는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파이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한 달,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지 어언 반년. 그러다 보니 서서히 지쳐갔다. 버릇처럼 그를 기다리긴 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몇 달간은 눈물이 마르지 않더니 이제는 덤덤하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정말인가보다. 아직은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나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완전히 추억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브엘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라처럼 다른 누군가의 대단한 사랑으로 그 가슴 아팠던 첫사랑을 덮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럼… 나 역시 파이를 조금 더 빨리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리브엘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잔뜩 긴장했었는지 굳혔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떨리는 숨을 뱉어내는 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실, 네가 거절할 줄 알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 내게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여서 기뻐. 굉장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리브엘을 보면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파이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던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지. 그래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저 얼굴에 늘 웃음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럼, 내 심장의 상처도 서서히 치유되지 않을까?
“일단 내가 아직 일을 다 끝내지 않아서 들어가 봐야 해.”
“아, 물론 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저녁에 일 끝날 때 데리러 올게.”
“그럴 필요 없다.”
그때 갑자기 귀에 익숙한 낮은 음성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다. 동시에 내가 앉아있는 기다란 의자의 옆에 까만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워하던 파이의 목소리였으니까.
나는 굳어버린 목을 겨우 움직여서 옆을 쳐다봤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리브엘일 죽일 듯 노려보는 선홍색의 눈동자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게로 향한다. 짧아진 검은 머리카락이 그새 조금 자라서 눈을 가릴 정도로 길어진 상태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보이는 눈빛 또한 변하지 않은 그대로다.
순간 꿈인가 싶었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 환청과 함께 환상을 보이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굳어버린 내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잡힐 때,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서 알았다.
환상이, 아니었어……?
“파이?”
“아직 우리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그새 다른 놈을 만나고 있었나? 정말 실망스럽군.”
눈동자를 굴려 리브엘을 강렬하게 노려보는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런데도 확 와 닿지는 않았다. 늘 꿈에서만 보고 느끼던 그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비플라츠 공작이라고 했던가? 이런 식으로 남의 연인을 가로채 가는 비열한 수법을 사용하다니. 정말 우스워. 고위 귀족 체면이 말이 아니야.”
한쪽 입꼬리만 삐딱하게 올리면서 비아냥거리는 파이가 내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는 아직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일어났다.
“한 번 더 경고하는데, 이 이상 내 여자에게 접근하지 마라. 다시 한번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는 네 놈을 적으로 간주하겠다. 지난번처럼 봐주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