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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6화 (96/132)

# 96화

치즈가 간혹 레이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택의 집사라던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했다. 꽤 오래 좋아했다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지. 결혼은 에이든 저놈이랑 하되, 몰래 그 집사라는 상대와 연애를 할지도. 그러니 결혼식을 올리는 게 그리 성급하진 않은 걸지도 모른다.

“레이라에게 연인이 따로 있다면 굳이 너와의 혼인을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여자를 모독하지 마라! 이 못된 드래곤 따위가!”

“혼인 자체는 신뢰할 수 없어. 대외적인 것일 뿐, 그 뚜껑을 열어보면 속은 더럽고 추잡할 뿐이야. 어차피 서로에게 흥미가 식으면 또 다른 상대를 찾는 것이 인간이니 말이다.”

인간이라는 게 다 그렇더라. 일단 삶에 안정이 찾아오면 그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그 목표는 재물이거나 권력이거나 이성이거나.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했다 한들 그 애틋했던 감정은 식어버린다. 언젠가는 다른 새로운 감정을 채워주는 상대에게 호감이 가기 마련이다.

이천 년 전, 루즈 제국의 황제도 그랬다. 이미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도 열 손가락이 넘는 연인을 두고도 모자라 내게 괘씸한 짓을 저질렀지.

그녀는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레어의 결계를 가볍게 통과해 제멋대로 들어온 인간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레어로 나를 찾아와 연인이 되어달라고 몇 번이나 유혹했었다. 타인과 엮이는 게 싫어서 레어에 처박혀 있을 때라 당시 세상 물정에 대해 전혀 모르기도 했다. 무식이 얼마나 큰 죄인지 그 일을 겪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이거 마셔볼래? 우리 루즈 제국에서 새로 제조한 꽃잎 차인데 이 ‘히아루르’ 꽃이 우리 제국에서만 피어나는 거거든.]

그 차 안에 드래곤도 잠재우는 특수 수면제가 들어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입에 대지도 않았을 거다. 겨우 수면제 따위에 취해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 보인 장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옆에 알몸인 채로 누워있던 그녀가 나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흥건하게 묻어있던 밤꽃향의 희뿌연 액체를 닦아내어 내게 보여주던 그 장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은 정말 대단했어. 네가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덮치는 바람에 놀라기는 했지만,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후회하지 않아.]

기억에도 없는 엄청난 사건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배가 부푼 상태로 다시 나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결혼식을 치러야 할 것 같아. 아이에게 아버지가 필요해. 나 역시 네가 필요하고.]

[…드래곤은 너희 인간들처럼 아이를 잉태할 수 없다.]

[네가 마신 그 차, 히아루르 꽃에 맺히는 열매는 짐승의 아이도 밸 수 있는 대단한 열매거든.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드래곤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고만 알고 있던 내게 그 사실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룻밤을 보냈고 아이까지 생겼으니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녀의 강압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인식 준비를 마쳤다는 그녀를 따라 루즈 제국으로 향했고, 나는 그녀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많은 마법사였다. 미리 준비해놓은 예복을 입혀주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 표정에서 기이한 분위기를 읽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로 마법사들이 진을 쳐놓은 상태였고, 내 발밑에 결계가 생성되어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내가 방심하고 있는 차에 목과 팔다리에 마력으로 만든 구속구를 채웠다. 그러더니 강철로 만든 커다란 쇠사슬로 내 온몸을 묶어두어 결박했다.

[꽤 순진하네, 카르디옌? 고작 아이 하나 생겼다고 혼인을 수락할 줄은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목적은 드래곤을 생포하는 데 있었다. 그 전에 드래곤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히아루르 열매를 먹고도 혹시 몰라 내게 열매즙으로 만든 차를 마시게 했다고. 하지만 수면제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내 하체가 도무지 발기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교합에 성공하진 못했다고 했다.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사내의 아이였고, 일단 나를 생포해 가둬놓아 이용할 생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혼인과 아이를 빌미로 겨우 인간 따위에게 농락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코웃음을 치며 저들이 나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들이 채워놓은 구속구를 휴짓조각처럼 부서트리고 제국을 통째로 날려버릴까 하다가 관뒀다. 멍청이처럼 속은 내 잘못도 있었으니 그저 나를 이용한 그들의 몸속에 저주를 새겨두는 거로 마무리를 지었었다.

그때 한낱 인간에게 속아 넘어간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다.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사랑이니 혼인이니 그딴 한심한 수작에 또 놀아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뿐인가. 그녀뿐 아니라 수많은 인간의 더러운 행태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 소중한 아이가 그런 인간들 무리에 섞여 추잡한 오물이 묻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런 쓸모 하나 없는 인간들의 제도 따위에 휩쓸리는 건 원치 않았건만.

“쯧쯧. 저렇게 상대를 믿지 못해서야. 그런 불신을 가지고는 누구와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카르디옌. 그런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있다니, 오죽했으면 치즈가 널 떠났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놈을 죽일 듯 노려봤으나 에이든은 나를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아예 내게 등을 돌린 상태로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네놈에겐 치즈가 아깝다. 차라리 치즈가 완전히 마음을 정리하고 그 리브엘인지 뭔지 하는 말라깽이 놈에게 가는 게 더 빠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지?”

갑자기 듣기도 싫은 놈의 이름이 나와서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진다. 드러눕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든에게 설명을 재촉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녀석의 눈을 후벼 파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말해. 리브엘 그놈이 왜 치즈와 엮이고 있는 거냐.”

“리브엘이 치치르자 왕국의 공작이잖아? 이미 마세티앙 아카데미의 사람들을 통해 치즈가 디저트 가게를 차렸다는 소문이 전부 퍼졌어. 그놈이 모를 리가 없지. 치즈의 일이라면 열 일 제쳐두고 달려가는 놈이니.”

“언제부터?”

“꽤 됐어. 가끔 찾아오더니 점점 오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지금은 거의 매일? 아주 정성이더군.”

에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분명 내가 까마귀를 보내 염탐했을 때에는 그놈 머리털 한 가닥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엊그제인가? 나 정말 충격적이었어. 치즈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 줄은 몰랐다고.”

손으로 이마를 짚는 에이든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어 심장이 철렁거렸다.

“쉽게, 마음을 열 다니?”

“궁금해? 그렇지 않아도 이 말을 하면 카르디옌 네가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내가 또 영상을 준비했지.”

턱을 치켜들며 보란 듯이 대단한 걸 준비했다는 듯 손바닥에 마력을 담아 허공에 큰 원을 그린다. 공중에 한쪽 팔 길이만큼의 동그란 원이 그려지고, 조금 옆으로 비켜선 에이든이 턱짓으로 그 원을 가리켰다.

“마침 내가 그 날 거기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치즈가 얘길 안 하더라고.”

“닥치고 영상이나 돌려.”

“급하기는. 기다려봐.”

마음이 초조해진다. 이가 부서질 만큼 턱에 힘이 들어가고 두 주먹을 꽉 쥐어도 손 떨림이 멈춰지지 않았다. 제발, 내가 상상했던 그 일만큼은 아니길.

곧 원 전체가 하얀빛으로 뒤덮이고 그 위로 흐릿하게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보자마자 치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영상 속에서 수줍게 볼을 밝히는 여성은 치즈의 친구 레이라였다.

「아이, 정말. 자꾸 왜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는 거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곧 영상은 다시 사라졌고, 뒷목을 긁적거리는 에이든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내가 어제 재생하던 구간이네. 보, 보다시피 우리 사이는 이렇게 뜨겁다고. 서로 믿음과 사랑이 충족되면 배신을 할 이유가 없지. 이렇게나 좋은 게 사랑이건만.”

감히 내게 훈계를 하려는 건방진 녀석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자 뒤로 반걸음 물러난 에이든이 재빨리 영상을 가동했다.

이윽고 화면에 두 남녀가 포착되었고, 서로 마주 본 채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익숙한 밀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머릿수건으로 감싼 채인 걸 보니 근무 중이었나 보다.

「할 말이, 뭔데?」

녹색 머리카락의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린 치즈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옭조인다. 저릿한 통증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부끄러워하는 치즈를 마주 보고 있는 리브엘 그 놈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침착하게 대꾸한다.

「지난번의 내 제안에 관한 결정을 내렸나 해서.」

「아, 그거…….」

「재촉하려는 건 아닌데 치즈 네가 이렇게 혼자 있는 모습을 보니까 점점 안달이 나게 되네. 혹시나 다른 놈들이 눈독 들일까 봐 걱정도 되고. 엄한 놈에게 널 빼앗기고 싶진 않거든.」

치즈는 한참을 대답 없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을 응시하는 그 표정에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린다.

「나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질 않아서. 누구와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것보다 일하는 게 더 편해.」

「알아. 네 마음이 어떤지. 하지만 원래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지울 수 있다고 했어. 혼자 고통스럽게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를 의지해주면 안 될까?」

「하지만 그럼 네가 힘들어질 거야.」

「네가 혼자 힘들어하는 것보다 내가 힘든 게 더 나아. 그리고 나는 치즈 네가 결국 내게 마음을 열거라고 장담해. 그만큼 너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

「…딱 이틀만 진지하게 고민해볼게.」

「응. 알았어. 부디 좋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 기다릴게.」

그 뒤 영상이 사라지고 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는 에이든이 다시 헛기침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절대 카르디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치즈의 안위를 위해서 알려주는 거야. 레이라 영애에게 들었는데 저 리브엘이라는 놈이 흡혈귀라며? 누군가를 흡혈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하는 놈이니 언젠간 치즈에게도 손을 뻗지 않을까?”

그 말에 지난번, 내 공격을 받고 피를 잔뜩 흘린 그놈에게 치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필요하면 내 피라도 줄까?]

치즈는 성격상 친분이 있는 상대에게는 제 피를 순순히 헌납하고도 남을 거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절대 저놈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건데.

“아, 레이라. 지금 거기 상황은 어때?”

머리가 복잡해지는 와중에 영상에 레이라의 심각한 얼굴이 담겼다. 아마 서로 마력을 이용해 영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다. 레이라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대꾸한다.

「지, 지금 막 왔어! 치즈가 지금 일을 하고 있어서 돕겠다고 주방에 들어오는 걸 겨우 막았다니까? 오늘 주문 예약된 케이크도 곧 다 완성되니까 시간이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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