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대체 뭘 이해해야 하는 거죠?”
“네가 그 혼인이라는 것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네게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했고, 조금의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조금의 시간이라는 말에 코웃음이 절로 났다. 누가 영생을 가진 드래곤 아니랄까봐?
“천년이 조금이에요? 파이에겐 조금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요. 파이야말로 나를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나 보네요.”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드레스 끈을 대충 묶고 나서 파이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레이라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봤다.
[그렇다면 당분간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 서로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서로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 지금이 딱 그때가 온 거다.
[둘이 맞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충분히 잘 어울려. 다만 서로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건 서로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야.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해. 너도 그분을 꽤 오래 좋아했잖아?]
그 타협이라는 것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로 끝나면, 아마 오래지 않아 서로 지치게 될지도 모른다. 천년을 꾸역꾸역 버텨 기다린다고 해서 그가 나와 혼인해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조금 혼란스러운 눈빛을 담고 있는 그를 마주 보면서 복잡하게 얽히는 심경에 한숨이 절로 난다. 내가 그를 아직도 대단히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너무도 얄미워서 차라리 빨리 마음이 식어버리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내 진심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저 뜨거운 눈빛에 담긴 맹목적인 사랑을 알기에. 그래서 아프다. 서로의 마음이 같은데 왜 더 가까워질 수 없는 건지. 혼인이라는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빙글빙글 멀리 돌아가기만 하는지.
나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마음의 결정을 확고하게 밝혔다.
“파이. 우리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나는 파이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파이를 좋아했던 내 마음이, 점점 불안하고 초조해지면서 결국은 의심하고 다투게 되니까 너무… 힘들어요.”
사실은 무서웠다. 내가 멋대로 굴수록 그가 나를 미워할까 봐. 그가 나를 감당할 수 없다며 밀어낼까 봐.
“나는 여전히 파이를 사랑해요. 하지만 지금 이렇게 파이와 자꾸 다투게 되고 감정 소비하는 거, 서로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과 연애를 시작할 때는 적절한 시간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서로의 감정이 하나가 될 때, 그 때를 놓치면 두 사람의 관계는 맺어질 수 없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각자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한다. 장난처럼 놀이나 할 시기는 아니니까.
“우리, 잠시만… 헤어져요. 그게 좋을 것 같아. 파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그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리의 사이가 오래된 추억쯤으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자연스럽게 그를 잊을 수 있도록. 내 가슴이 더는 곪아 터진 상처에 시달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 * *
그로부터 반년. 치즈가 자신의 완강한 뜻을 굳혀 내 곁을 떠난 지 겨우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반년이라니. 천년도 더 넘은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데.
오늘도 나는 치즈가 지내던 방의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수록 무기력증이 더 심각해지는 것 같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이 쉬어지고 심장이 뛴다. 이유 없이 가끔 발작처럼 가슴이 옭조여서 불편한 통증을 자아낸다. 이렇게까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요.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나를 찾아오지도 말고 볼 생각도 하지 말아요.]
아예 내 앞에서 대놓고 커다란 가방에 짐을 꾸리던 치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잠시만 떨어져 지내기를 바라던 치즈의 단호함에 나는 말릴 수도, 저지할 수도 없었다. 나와 지내는 게 힘들다고 털어놓는 괴로운 표정은 내 입을 다물게 만들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파이가 찾아왔을 때 내 마음이 완전히 변해서 파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고 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난 거니까 나를 원망하지 마요.]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내게 이별을 고했다. 너무도 확고한 마음을 먹어버린 치즈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머릿속에 발이 묶인 채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더욱더 원망스럽게 흘겨보던 치즈는 급기야 마음을 비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라의 저택에 데려다 줘요.]
[…치즈.]
[마음 바뀐 거 아니면 내 이름 부르지도 마요. 듣기 싫어.]
내게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 행동을 보고, 가슴에 비수가 꽂힌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통증을 느꼈다. 처음 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각인지.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통각에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레이라의 저택에 데려다주자 치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매정한 뒷모습에 사천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참혹한 기분이 전해져왔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공허함. 세상에 혼자 남아버린 외로움. 물밀 듯 밀려오는 미약한 통증들이 내 신경을 서서히 마비시키는 듯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저 울면서 매달리기만 하던 어린 아기였는데. 어느새 성장해버린 아이가 저리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멀어져갔다.
최근 깊은 사이가 되면서 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 보낼 때는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스럽기만 했었다. 그래도 에이든 그놈의 도움을 받아서 매번 보고서를 받았으니 근심이 조금은 덜했는데. 또 주말에는 항상 데리러 갔었고 방학 기간에는 늘 함께 있었으니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치즈가 떠나가고 반년째. 치즈는 내 곁을 떠난 이후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치즈가 출가를 포기하고 은근슬쩍 돌아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달이 넘어가 계절이 바뀌었으나 치즈는 소식조차 보내지 않았다. 혹시나 해 위치추적을 해서 몇 번 치즈가 일하는 곳을 탐색해 봤었다.
그때 본 충격적인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치치르자 왕국에서 새로 차린 디저트 카페, 치즈는 그곳에서 레이라와 함께 동업하고 있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던 디저트 카페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디저트가 꽤 특이하고 매우 맛있기로 유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특히 귀족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초콜릿을 잔뜩 넣은 케이크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치즈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초콜릿 크림으로 케이크를 꾸미면서 집중하는 그 모습은, 좋아하는 동화책을 보던 어린 시절의 그때와 똑같았다.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활발해지고 표정도 밝아지기까지.
[손님! 주문하신 초코케이크예요! 추가로 아몬드를 갈아서 모양을 꾸며봤어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역시,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근사해요. 작품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아, 최근에 왕궁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 네. 운 좋게 주문을 받기는 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분명 국왕 전하께서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여기 카페의 파티시에 실력이 황궁 파티시에보다 더 실력이 좋을지도 모른다고들 하던데요? 곧 왕궁에서 아가씨를 발탁해갈지도 몰라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손님.]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하는 치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빛나 보였다. 내가 없어도, 내 도움 하나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꿈을 이뤄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어린 아기였을 때에는 내 손을 잡지 않으면 걷지도 못했었는데. 내가 없으면 혼자 잠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스테이크를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잘라본 적이 없었건만.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꽤 충격적이었다. 내게 첫날밤을 제시했던 그 날처럼.
“카르디옌.”
“…꺼져, 에이든.”
“결계도 치지 않고,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레어로 들어온 에이든이 익숙하게 치즈의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요 근래에 가끔 레어에 와서는 치즈의 안부를 전해주는 에이든은 곧 레이라와의 약혼식을 치른다고 했다. 당분간 치즈의 카페가 안정될 때까지 돕기로 했으니 혼인은 일 년 뒤에 하는 거로 약속했다고.
혼인 따위…….
“꺼지라고 했다.”
“이 방은 다행히 무사하네. 바깥은 난리도 아니던데. 여기 레어 중에서 여기만 그나마 멀쩡한 것 같은데, 치즈의 방이라서 그런가? 여기 있으면 목숨은 보존되겠는데?”
뻔뻔하게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는 에이든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얄미운 놈의 저 주둥이를 막고 싶다가도 꾹 참았다. 알아서 치즈에 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때문이었다.
“제집처럼 드나드는군. 또 왜 온 거지?”
“은근히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거만하게 나를 흘겨보는 에이든을 노려봤다. 움찔거리며 안색이 창백해진 에이든이 바로 시선을 굴리고는 헛기침을 뱉어낸다. 치즈의 말대로 꼭 매를 버는 행동을 하는 놈이 얄밉기만 하다.
“흠흠, 이번에 치치르자 왕국에 납품한 그 케이크가 꽤 반응이 좋았나 봐. 바로 왕실에서 전속 파티시에로 제안이 들어와서 고민 중이고.”
“…그래서?”
“치즈는 여러 사람을 상대로 더 실력을 쌓고 싶은 생각이라고 하는데. 나는 치즈가 그 가게를 다른 이에게 넘겼으면 하거든. 레이라 영애를 빨리 제국으로 좀 데려가고 싶어서…….”
볼을 붉히면서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리는 에이든의 머릿속에 무슨 상상이 진행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겠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눈을 감았다.
“혼인에 얽매여봐야 결국 후회하게 될 텐데. 혼인에 왜 그리 안달하는지 모르겠군.”
“카르디옌 너는 사상 자체가 너무 부정적이라 문제다. 그러니 치즈가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왔지.”
“치즈가 뭐가 어쨌다고?”
그 마지막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에이든이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는다.
“치즈 방이야, 여기. 진정하고.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대체 카르디옌 너는 왜 그렇게 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상관이 왜 없어. 지금 너 때문에 나와 레이라도 혼인을 못 하고 있는데.”
“레이라에게 다른 남성이 있나 보지. 마음에 품은 다른 상대.”
“뭐… 뭐, 뭐라고?!”
어짜피 인간들, 그중에서도 귀족들의 결혼은 서로의 필요로 인해 이루어지는 계약 따위에 불과했다. 명목상일 뿐, 서로 다른 연인을 따로 두는 게 당연했다. 얼핏 듣기로 레이라에게는 오랜 시간 좋아했던 이가 있었다고 했던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