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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4화 (94/132)

# 94화

더러운 흡혈귀라니……. 리브엘도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닐 텐데.

문득, 파이에게 서운해졌다. 내 손이 자신의 마력에 의해 다쳤는데,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해주지 않고 구박이나 하는 그가 미워진다. 더군다나 내 친구라고 소개했던 이를 기어코 크게 다치게 하더니. 이제는 나를 겁박하기까지.

자꾸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어쩔 수 없다. 머리가 서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차분하게 파이를 올려다 봤다.

“당장, 리브엘을 풀어주고 바닥에 내려놔요.”

“…뭐?”

“내 친구예요.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다고 걱정해주는 내 친구란 말입니다. 당장 내려놓지 못해요?”

내 진지한 표정 때문인지 파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나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파이를 쏘아보았다.

“어서요. 내가 더는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게 해줘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파이가 눈동자를 들어 올려, 말뚝에 박혀 꼼짝도 못 하는 리브엘을 쳐다본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지친 기색으로 숨을 색색 몰아쉬는 리브엘을 보자마자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저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어!’

피를 얼마나 흘리는지 벽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저만큼 피를 흘려서인지 안색도 창백하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파이!”

“저놈이야, 나야?”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지난번에 저 흡혈귀 새끼가 내게서 너를 뺏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더군. 그날 죽였어야 했는데 너와 친분이 있는 사이여서 참았다. 그런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릴 줄은 몰랐어.”

다시 나를 내려다보는 파이의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 어려 있다. 마치 자기가 없는 사이에 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당장 털어놓으라는 압박 같았다. 무조건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전혀, 믿지 못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건… 그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 받았던 상처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오히려 더 머리가 서늘하게 가라앉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감각이 무뎌지면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지기도. 마치 내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온 기분이다.

“파이. 나는 양심적으로 파이에게 용서를 구할 짓을 저지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믿든 안 믿든 그건 파이 마음이고. 일단 리브엘을 공격하는 건 멈춰요. 이건 나와 당신 문제지, 리브엘이 우리 문제에 휘말리는 건 싫어요.”

머릿속이 조금 멍한 것 같은데 의외로 말은 차분하게 나왔다. 내가 평소와 조금 달라진 걸 눈치챘는지 파이의 표정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러더니 곧 리브엘의 어깨를 꿰뚫고 있는 말뚝이 사라졌고, 나는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진 리브엘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리브엘. 괜찮아? 정신이 들어?”

“…만지면, 내 피가… 하아, 네 손이 더러워질 거야.”

“지금 그게 문제야? 일단 치료부터 해야 할 것 같아. 사람을 불러올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리브엘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는다. 저렇게 다쳤는데도 나를 잡는 힘이 제법 셌다.

“리브엘?”

“난, 괜찮아. 일단… 사과부터 할게.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진 것 같아서.”

혹시라도 내 마음이 다쳤을까봐 걱정하는 리브엘의 표정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리브엘의 눈이 잔뜩 붉게 변한 내 손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파르르 떠는 손으로 겉옷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우리, 몽마의 피에는 자연치유력이 있어. 나는 혼혈이라 조금 회복이 더뎌서… 혹시 몰라 몽마의 혈액만 가공해 가지고 다녔거든.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급한 건 너잖아. 이런 게 있으면 지금 네가 먹어야……!”

“나는 어떻게든 회복이 돼. 목이 잘리고 심장이 찔리지 않는 한 살아남아. 하지만 너는 다치면 완전히 회복되진 않으니까… 어서 네 손바닥에 전부 부어.”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어찌 되었든 리브엘이 이만큼 다친 건 나 때문이고, 파이가 리브엘을 공격한 것 역시 나 때문이니까. 정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나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그의 어깨 위에, 붉게 화상 입은 내 손을 가져다 놓았다. 혹시라도 아파할까 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리브엘이 건네준 작은 병의 뚜껑을 이로 물어서 열었다. 그리고 내 손바닥 위에 조심히 부으면서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지도록 유도했다.

“그럼 효과가 절반으로 떨어질 텐데.”

“절반이어도 나만 멀쩡할 수 없잖아. 아무튼… 미안해, 리브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다친 것 같아서 속상해.”

“널 다치게 한 건 나야. 내가 더 나쁘고 내가 더 속상해. 그러니까 자학하지 마, 치즈.”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좀처럼 풀리지는 않았다. 치유약이라더니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금세 액체가 닿은 곳이 다시 원래의 뽀얀 피부로 돌아왔고, 구멍 난 리브엘의 어깨도 서서히 아물어갔다. 욱신거리는 느낌은 남아있지만 일단 겉으로는 멀쩡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응. 고마워. 덕분에 기어서 왕국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아.”

이 상황에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리브엘이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비틀거리면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꾹 감는다.

“필요하면 내 피라도 줄까?”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서 뱉은 말인데 리브엘은 미쳤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동시에 파이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어서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당장 꺼져라, 흡혈귀. 앞으로 볼 일 없길 바란다.”

“치즈.”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파이의 협박도 아랑곳하지 않는 리브엘이 내 이름을 부른다. 그래서 파이의 품에 처박힌 내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파이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꾹 누르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일부러 이러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귀만 쫑긋 세웠다.

“네 대답, 기다릴게. 조만간 다시 만났으면 해. 그때까지 다치지 말고 무사히 살아있길 바라.”

그 목소리가 너무 애틋해서,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간절함을 담고 있어서 괜히 울컥했다. 곧 옅은 바람이 불어오면서 휴게실 내부가 고요해졌다. 문 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가버린 건가? 설마 리브엘도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거야?

“대답을 기다린다는 건, 무슨 뜻이지?”

여전히 까칠하게 느껴지는 파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진다. 그래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에 힘을 완전히 빼고 두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이상하게 매우 피곤해졌다. 언제부터 이 피로감을 느꼈었더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블랑 제국을 방문해서 레이라에게 에이든을 소개해 준 그날부터인 것 같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그와의 관계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지. 그리고 그 무기력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남은 세월 아무 생각 말고 오직 한때의 행복으로도 만족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서 치가 떨린다.

“파이. 일단 레어로 잠시 돌아가요. 나 파이한테 할 말 있어요.”

그러자 파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데리고 레어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야 나를 품에서 떨어트린 그가 갑자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더니 새 드레스 한 벌을 꺼내온다.

“왜요?”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서. 그놈 피가 묻었으니 당장 태워버릴 생각이다.”

고개를 숙여 드레스를 내려다보자, 정말 치맛자락이며 군데군데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다. 비싼 금액을 내고 맞춘 드레스가 삽시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되겠구나. 어쩐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곧 익숙하게 내 드레스를 벗겨낸 파이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욕물을 받아 몸을 씻겨주었다.

예상컨대 내 몸에서 리브엘의 피 냄새가 배서 짜증이 났나 보다. 그의 굳은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걸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 묻은 것을 닦아내는 것처럼 아주 열심히 씻기는 데 집중했다. 내 손이 화상을 입었던 걸 기억도 못 하는 듯 벅벅 씻겨내기 바빴다. 피부 아래에 닿는 따가운 통증에 움찔거렸으나 파이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저러니까 내가 마치 저 드래곤의 소중한 물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마치 감정 없는 인형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진다. 게다가 아까 리브엘이 내게 보여준 행동과 너무 비교가 되다 보니까…….

“파이.”

열심히 내 몸을 씻기는데 집중하던 파이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쳐다본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너무 잘 어울려서인가? 목과 뺨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그를 보면 두근거리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서글퍼진다.

“나 할 말이 있어요.”

“말해.”

“아까 리브엘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받았어요. 나와 혼인하고 싶대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열심히 내 몸을 닦던 손이 우뚝 멈춰진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는 것을. 또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그를 빤히 마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마 파이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파이와 지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연애만 하는 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내 입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혼란스러운가 보다.

“나는 한 사람의 완벽한 반려가 되고 싶고, 그걸 충족해줄 이와 혼인을 전제로 연애를 할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파이에게 물어볼게요. 정말 나와 혼인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예상대로 그는 대답 대신 입을 더 꾹 다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도 나와 혼인해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나는 내 몸을 닦아주던 파이의 손에 들린 타월을 뺏어서 나머지는 내가 직접 씻었다. 그리고 욕조에 잔뜩 받아놓은 미지근한 물로 깨끗이 씻어냈다. 파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고, 나는 그를 지나쳐 마른 수건을 꺼내 물기를 꼼꼼히 거둬냈다. 욕실을 벗어나 그가 꺼내놓은 속옷과 홈드레스를 챙겨 입고 등을 조이는 끈을 매만지는 사이.

“치즈.”

나를 부르는 파이의 목소리에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혹시 생각이 바뀌었을까 싶어서 조금 긴장했지만, 그의 표정은 냉정하게 굳어있었다. 덕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왜요?”

“나를…….”

시선을 내리까는 파이의 검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긴장하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나를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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