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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3화 (93/132)

# 93화

뜬금없이 파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빠르게 깜빡거렸다.

“응. 나는 딱히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어. 모두가 파이를 두려운 눈으로 보는 게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그래서 조금 용기를 얻었어. 네가 드래곤의 손에서 길러진 거라면, 내가 어떤 종족이어도… 네가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리브엘이 인외종족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건 비밀이다. 그가 직접 털어놓을 때까지는.

“왜? 너도 인간이 아니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브엘의 뺨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가끔 보던 표정이긴 한데, 오늘은 어딘지 분위기가 조금 더 묘하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지금까지 육백 년을 살아왔어. 하지만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인간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하지 않았어. 나는 인간과 공존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고, 앞으로도 내 철칙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지 않아.”

“육백 살이면……?”

“내 어머니가 몽마에 의해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게 나래. 불완전한, 종족이지. 햇빛에 닿으면 피가 증발해서 갈증이 일어나.”

그에 대한 사실을 직접 듣게 되니까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조금 긴장한 것을 눈치챈 리브엘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결단코 무고한 생명을 탐한 적이 없어. 낳아줄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태어나서 자라고 나니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왜 나한테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거야?”

“널 좋아하니까. 오해받기는 싫어서.”

너무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진지한 고백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예상하고는 있었는데도 당장은 아닐 거라고 여겼는데, 또 내 생각이 빗나가서 당황해버렸다.

“어… 저, 저기…….”

“알아. 네가 그분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혼인은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며? 그렇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술기운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걸까?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고 얼굴이 다시금 화끈 달아올랐다.

아카데미에서 여러 남학우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다. 지금껏 리브엘이 내게 제 마음을 많이 보여주었는데도 이렇게 직접적인 고백에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떨려온다.

“치즈.”

천천히 상체를 내 쪽으로 숙여오는 리브엘이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다. 이만큼이나 가까운 곳에서 그의 눈을 마주친 적이 없어서 심장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다.

“네가 힘들어하고, 지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아파. 그리고 널 그렇게 아프게 만든 사람이 네가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은 사람이라는 게 더 나를 힘들게 해.”

내 뺨이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입술에 내려앉는 그의 숨결조차 서늘하다. 파이는 옆에만 있어도 그의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는데, 리브엘은 전혀 달랐다. 꼭, 얼음 나무의 옆에 서 있는 것처럼 온기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아 버리는 것 같다. 그 느낌이 너무 낯설어서.

“치즈 널 처음 봤을 때 육백 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기분을 느꼈어. 심장이 뛰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만큼 온몸이 떨려왔거든.”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내 입술 위에 멈춰졌다. 어쩐지 곧 내 입술에 저 말랑하고 낯선 리브엘의 입술이 내려앉을 기세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레 감싼 그가 다시금 저를 쳐다보도록 만든다.

“너와 마주 보고 서 있으면 늘 설레었어. 너를 보지 못하는 그 시간이… 그저 괴롭게 느껴질 정도였고. 그건 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네. 너의 그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나만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나.”

“리브엘…….”

“진지하게, 조금의 거짓 없이 솔직하게 진심으로 치즈 너를… 연모하고 있어.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널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

짝사랑의 애달픔은 나도 겪어봤기에 리브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아예 모르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와 혼인하지 않을래?”

“…혼인?”

“응. 혼인. 사랑하는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의지하고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면서 가장 뜻깊은 일이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되는 일 말이야. 그걸 나와 같이 해주었으면 해.”

사뭇 긴장한 리브엘이 내게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심장이 욱신거린다.

에이든도 나와 혼인하기 위해 십 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리브엘도 지금 내게 간절히 혼인을 원하고 있는데……. 파이는 왜? 정작 파이는 이만큼 나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 걸까? 육백 년을 홀로 살아온 흡혈귀마저 한낱 인간을 사랑해 곁에 두겠다는데. 더군다나 리브엘은 내가 영생의 생명을 얻었다는 걸 모를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나 날 원하고 있건만…….

“나는 널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네가 슬퍼할 겨를도 없도록 만들어 줄 자신이 있어. 내가, 그분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러니 진지하게 고려해줘.”

마음이 번다하다. 왜 사람 마음이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건지. 내가 온 마음을 바쳐 좋아하는 사람은 내게 거리를 두는데, 오히려 다른 남자들이 더 난리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애를 쓰거나 회유를 한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또 한편으로는 솔깃하기도.

어차피 파이를 떠나려고 했으니까, 나와 혼인할 생각이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게다가 리브엘은 인간도 아니니까 더 잘된 걸지도 모른다.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레이라의 말에 의하면 공작가의 가주라고 했으니까. 특히나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인간과 어울려서 지내는 리브엘의 노력이라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처음이야 힘들겠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다른 의미로 아주 솔깃했다. 어차피 인간에 대해서 조금의 이해도 하지 않으려는 드래곤이 얄미워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파이의 생각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을 거다.

이번이 마지막. 리브엘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번 시험을 해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마음은 고마운데… 나,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아아. 강요는 아니야. 강요할 이유는 없잖아?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네게 고백하고 싶었어.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어서 속이 시원해. 한편으로는 네가 날 받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고.”

수줍게 웃는 리브엘의 눈동자가 옅은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딘지 긴장한 듯 표정이 조금 굳어있기도.

그 기분, 내가 잘 알지.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심장이 쫄깃해지고 온 신경이 상대에게 쏠려있는 느낌.

“너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조금 놀랐어.”

“아…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이었어. 조만간 너를 우리 저택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할 때 말하려고 했던 건데…….”

나름의 계획을 짜고 있었긴 했구나.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뭐든.”

“만약에 내가 우리 파이와 혼인한다고 했으면, 마음을 접을 생각이었어?”

“그랬겠지? 우선은 내 마음보다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왠지 감동이다. 누구하고는 전혀 다르네. 내 행복보다 자신의 쾌락이 더 중요하다는 듯 내 말은 싹 무시하는 나쁜 남자 말이다.

갑자기 짜증과 허탈함이 한 번에 밀려들어 오던 그때, 갑자기 내 주위로 돌풍이 불어와 깜짝 놀랐다.

“헉!”

동시에 쾅! 바닥이 크게 울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앉아있던 소파마저 크게 들썩거렸다. 그러더니 익숙하면서도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려 공중에 붕 떴다. 내가 너무 잘 아는 팔 힘과 넓은 가슴팍, 그리고 그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체취.

“파이?”

문 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파이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잔뜩 흥분한 맹수처럼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파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잔뜩 구긴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상태고 목과 턱에 검은 비늘이 돋아난 채다.

당장에라도 이 주변을 전부 날려버릴 생각이라는 듯 경직된 파이의 시선을 쫓자, 그곳에는 리브엘이 있었다. 쩍쩍 갈라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휴게실 벽. 그 벽의 중앙에 매달려있는 리브엘의 왼쪽 어깨에는… 투명한 말뚝이 관통한 채였다. 얼굴과 손을 포함해 온몸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고, 말뚝에 찔린 어깨에서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리브엘……?”

그의 하얀 예복에 붉은 피가 물감처럼 퍼져 서서히 물들어갔다.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는 리브엘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말뚝을 잡았다. 하지만 곧 번쩍, 빛을 뿜어내는 말뚝이 리브엘의 손바닥을 태워서 그의 손바닥이 새까맣게 타들어가 버렸다.

“리브엘! 파이, 파이?! 파이가 저렇게 했어요?”

리브엘을 죽일 듯 노려보는 파이의 마력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리브엘을 공격할 사람은 없다. 나는 다급히 그의 옷깃을 잡아 흔들면서 외쳤으나 파이는 나를 보지도 않고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또 하나의 투명한 말뚝이 형성되었고, 당장에라도 그걸 리브엘의 심장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파이! 안 돼요!”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파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파이의 손에 들린 말뚝을 꽉 잡았다.

“윽!”

그러다가 손바닥이 화끈거리면서 따가운 느낌이 전해져서 재빨리 떼어냈다. 그러던 찰나, 투명한 말뚝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내 행동에 놀란 파이가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내려다 봤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손바닥 전체가 붉게 달아오른 채다. 심각하게 내 손을 내려다본 파이가 커다란 얼음덩어리 하나를 생성해내서 내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따가워…….

“바보같이 왜 거기에 손을 댄 거지? 내가 마력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더니 정말 어이없게 오히려 나를 타박한다.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린 나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사납게 대꾸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저 꼴로 만들어놓고? 당장 리브엘을 풀어주지 못해요?!”

“황족 휴게실에 몰래 침입한 자다.”

“그래도 치치르자 왕국의 공작 지위에 있는 분이라고요. 침입에 대한 처단은 파이가 하는 게 아니고 여기 제국에서…….”

“치즈. 네가 왜 저놈을 감싸주는 거지?”

여전히 목과 뺨에 검은 비늘이 돋아난 채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내게 꽂힌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그의 분위기가 무척 살벌했다. 마치 주변 공기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다.

“내, 내가 언제요?”

“네가 왜 저 더러운 흡혈귀 놈의 생사를 걱정하는 거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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