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나는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내 옆에 앉으려는 파이를 찌릿 노려보며 경계했다.
“엉큼하게 어디서 수작이람? 나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 대면 진짜 미워할 거예요.”
“일단 시원한 물 먼저 마시고.”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게 물 잔을 내게 내민다. 나는 그걸 두 손으로 받으면서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봤다.
“또 여기에 술을 몰래 탄 건 아니죠?”
“산꼭대기의 청정한 물을 떠 온 거니까 의심하지 말고.”
물이 차가워서 그런지 아니면 내 손이 그만큼 뜨거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서늘한 게 닿으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손 온도가 차츰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물 잔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맛을 살짝 보니 정말 밍밍한 물이다. 게다가 어찌나 차가운지 혀끝이 조금 얼얼해질 정도.
나는 물을 천천히 목구멍 뒤로 넘기면서 절반을 한 번에 비웠다.
“하아, 시원해.”
식도가 얼어붙는 감각을 느낄 정도로 차가웠다. 몸이 워낙 뜨겁게 달아오른 터라 열기를 식혀주기에는 딱 좋았다. 남은 물을 아껴서 조금씩 마시는데, 갑자기 내 손에 들린 컵이 사라져버렸다.
“…응?”
그리고 순간 나는 위기를 감지했다. 고개를 돌려 파이를 쳐다보는 순간, 그가 갑자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소파 위로 눕게 되어 또 야릇한 분위기가 생성될지도 모른다. 파이의 행동을 이미 눈치를 챈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그러나 내 손목이 파이의 손에 잡혀서 당겨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몸이 한번 크게 휘청거리니까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빙글빙글 난리도 아니다. 순간 뱃속이 울렁거리면서 방금 마셨던 물이 요동을 치는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추한 꼴을 보일 뻔했다. 나는 역류하려는 속을 꾹꾹 누르며 어지러운 시야의 초점을 겨우 맞췄다.
“정말 취하긴 했나 보군. 신선한 모습이야.”
그러다가 파이의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와 흠칫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반쯤 누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지긴 했지만, 내 얇은 속바지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스며들어와 아랫배가 간질거린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더워졌다.
“아, 아니…….”
“왜 그렇게 겁을 먹어? 나는 네가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눕혀주려고 했는데. 아, 설마… 내가 덮칠까 봐 도망친 거였나?”
속마음이 들켜서 흠칫 어깨를 굳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피식, 코웃음을 치는 파이가 나를 쳐다보며 눈웃음을 살살 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내 뺨을 감싸 쥐고 어딘지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본다. 반대 손으로는 드레스 안쪽을 파고 들어와 허벅지에 가져다 댄다. 얼굴과 다리에 그의 익숙한 체온이 느껴져 몸이 달아올라 버리는 건, 거의 본능이었다.
“으… 나 아직 물 다 안 마셨는데.”
“먹여줄까?”
“나도 손 있거든요?”
“손 말고, 입으로.”
말하면서 제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앞으로 쭉 내밀더니 쪽, 하고 소리를 낸다. 그 요망하고도 아찔한 행동에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고 절로 모였으나, 그의 하체에 꽉 막혀버린다.
“지금 유혹하는 건가?”
“아, 아니거든?! 이런 곳에서 무슨 유혹이야! 파이야말로 아무 데서나 이러지 말아요!”
“아무 데서나, 라니? 여기는 너와 나밖에 없는 곳이고,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아.”
“…물이나 줘요.”
그러자 내게서 뺏어둔 물 잔을 다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아까 내가 절반 이상을 마셨는데 다시 가득 채워진 걸 보니 새 물인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너무 묘해서 물 잔에 입술을 파묻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물을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는 와중에도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질척거린다. 허벅지에 머무는 손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언제 움직일지 몰라서 잔뜩 긴장을 머금었다.
“그만 만져요. 간지러워.”
“사람 얼굴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껴봐. 이렇게 와인 따위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도 처음 보고.”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드래곤도 있고 흡혈귀도 있는 마당에 와인 먹고 취하는 사람이 없을까 봐?”
콧방귀를 뀌면서 투덜거리자 파이가 말이 없다. 그래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파이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서늘하게 굳어버린 그의 딱딱한 표정에 움찔 놀라서 물 잔을 놓쳐버렸다.
“으아! 어, 어떡해.”
다행히 물이긴 한데 드레스가 물에 젖어 축축해진다. 그리고 나와 마주 보고 있는 그의 옷도 전부 젖어버리고 말았다. 슬프게도 가슴골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안쪽까지 젖어버려서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파이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손수건을 꺼내 턱과 가슴에 흐른 물기를 조심스레 닦아내 준다.
“치즈.”
그리고 그가 낮은 저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서 바짝 긴장을 머금었다.
“다른 건 다 좋다. 기분이 좋질 않은 만큼 내게 화풀이를 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우리 대화에 다른 놈을 끌어들이지는 마라. 그건 아무리 나라도…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잔뜩 뿜어내는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올 정도로 살벌해서 심장이 크게 요동을 쳤다.
리브엘의 ‘리’자도 안 꺼냈는데, 흡혈귀라는 말을 꺼내서 화났나 보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인데… 괜히 화내고!
“…네.”
별수 없지. 저렇게 화가 난 드래곤을 건드려봐야 내게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술기운이 바닥으로 쑥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레이라의 말대로다. 왜 이렇게 자꾸 어긋나는지 모르겠다. 분명 파이를 좋아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데, 우리 사이의 기복이 너무 심하다. 내가 에이든에게서 금단의 열매를 먹고 파이의 피를 마셔서 영생을 얻은 이후부터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뭔가 벽이 세워지는 기분.
차라리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덜 다투게 되는 것 같지만. 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이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내 입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었다. 그 며칠간 오기를 부리면서 대화를 거부했을 때도 입이 간질거려 죽을 맛이었는데.
그때, 조용하던 방 안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쉬시는 데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카르디옌.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아까 그 황제 목소리다. 내 상체에 묻은 물기를 거의 제거하고 젖은 손수건과 내 드레스를 마력으로 가볍게 말려주면서 문 쪽을 흘겨봤다.
“들어와.”
달칵,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마세티앙 제국의 황제가 우리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다.
“치치르자 국왕이 카르디옌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잠시 뵙길 청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약간의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만.”
황제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파이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는 여전히 기죽어서 시무룩해 있는 내 정수리를 가볍게 토닥거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라면 안전할 테니까 나가지 말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아마 내게 진정할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고, 파이는 내게 고개를 숙여와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옆자리에 다시 앉혀둔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와 함께 휴게실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그대로 몸에 힘을 쭉 빼서 소파에 늘어져 버렸다.
“하아…….”
무도회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는 벅찬 마음을 안고 왔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한숨이 절로 나오고 기분이 땅굴을 파고 내려가 지하수와 만날 것만 같았다. 기껏 드레스도 예쁘게 맞추었는데. 파이와 왈츠를 추려고 연습도 많이 해왔건만 또 말다툼이나 하고. 기분 다 망치고.
와인을 마셨을 때처럼 속이 홀랑 타버리는 기분이다. 레이라가 했던 말이 자꾸만 되새겨져 최악의 감정만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파이와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이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만이 내 정신을 좀먹었다. 허탈하고 무기력이 찾아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는 것조차 괴로워졌다.
“치즈. 여기 있었네?”
순간 깜짝 놀랐다. 이 휴게실을 드나들 수 있는 건 파이와 황제뿐인데, 그 두 사람이 아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이미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리브엘?”
우아해 보이는 하얀 예복 차림의 리브엘이 언제 들어왔는지 소파 뒤에서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리브엘이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울고 있었어? 얼굴도 빨갛고.”
그 물음에 나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으응. 아니야. 와인을 일곱 잔이나 쉬지 않고 마셔서 그래.”
“아, 그게 치즈 네가 맞았구나. 멀리서 봤는데 얼굴이 달라 보여서 아닌 줄 알았거든.”
“…봤어?”
“드레스 보고 알았어. 처음에는 몰랐지. 계속 찾았는데 안보이더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하는 리브엘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제 손바닥을 내 이마에 얹었다. 서늘한 손이라서 굉장히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 낯설고 찝찝한 더운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열 때문에 어지러웠는데 조금 가시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이 지쳐 보여. 무슨 고민이라도 있던 거야?”
“고민이야 늘 있지.”
“아직도 혼인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았어?”
“…그건 논외야. 이제 그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그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 리브엘의 손이 이마에서 뺨을 내려왔다. 서늘한 그의 손이 내 열을 머금어서 조금 따뜻해지긴 했어도 아직은 나보다 뜨겁지 않았다.
“그냥… 다 내 문제라서 나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 그래서 속상하고… 기분이 영 좋아지질 않아.”
“자기가 결정해놓은 마음을 바꾼다는 건 어렵지.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걸 바꾸려고 노력하는 네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사실 나도, 고민이 있어.”
“너도?”
흡혈귀의 고민이라. 없을 리가 없겠지만 일단 그가 직접 내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러자 리브엘이 조금 긴장한 듯 수줍은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본다.
“처음, 나 졸업하기 전에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네게 말하지 못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드,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보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뭔데?”
“사실…….”
초조해 보이는 리브엘의 짙은 녹색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살짝 내려앉은 눈꺼풀에 가려진 초콜릿색 눈동자도 잘게 흔들려 평소처럼 영롱한 빛을 띠진 않았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기에 나는 침착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내 뺨에서 손을 거둬낸 리브엘이 주먹을 살짝 말아 쥐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너의 그분이 드래곤이라는 걸 알아. 블랙 드래곤 카르디옌. 꽤 유명하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