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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1화 (91/132)

# 91화

“그럼 한 손은 비어있으니까 이쪽 손은 내가 책임질게. 그래도 되지?”

“어, 어……?”

“저 배려 없고 무지막지한 상대에게 너를 온전히 맡기기에는 불안해서 그래. 그러니 내 마음도 헤아려주길 바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절대 나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리브엘이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래서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파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역시나, 무표정이긴 하지만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면서 잔뜩 그늘이 진 붉은 눈동자로 리브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사달이 벌어지겠다.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무도회고 뭐고 연회장에는 발도 들이지 못한 채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오도록 놔둘 수는 없지.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일단, 일단 들어가자. 파이! 파이도 어서 가요, 네? 빨리!”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일단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서 치치르자 왕국의 사람이 많으면 리브엘은 자연스럽게 내게서 떨어져 나갈 테니까. 그 틈을 노려 파이를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다.

그래서 나는 파이의 손을 덥석 잡아끌고, 연회장 입구로 보이는 장소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오늘 드레스 예쁘다, 치즈. 너는 드레스보다 더 아름다워. 새삼 반할 것 같아.”

그런 내 조급한 마음을 모르는 듯, 리브엘이 또 이런 눈치 없는 발언을 꺼내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고, 고마워. 리브엘도 예상대로 멋지네. 하얀 예복이 너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너를 생각하면 순백의 아름다운 여신이 떠올랐거든. 네 머리카락 색에 맞추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워. 네가 참석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 준비했을 거야.”

심장이 타들어 간다. 이런 낯부끄러운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이 대화를 듣고 있을 파이의 눈빛이 예상되어서.

나는 리브엘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면서 더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곧 연회장의 계단에 올라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레이라가 말했던 대로, 아카데미의 졸업 파티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이들의 놀이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눈 앞에 펼쳐진 실내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별세계 같아. 굉장히… 아름다워.”

밖에서 황궁을 봤을 때는 그냥저냥 평범한 성이구나 싶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확실히 달랐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부터 시작해 높다란 창문에 걸려있는 커튼조차 우아했다. 곳곳에 매달린 수백 수천 개의 촛불. 그 작은 불들이 모여 천장에 붙어있는 반사판에 의해서 빛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꼭, 무수히 많은 별이 우수수 하강하는 느낌이었다.

주위를 구경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다가 뒤이어 몰려 들어오는 인파에 휩쓸려 양손에 잡았던 두 남자의 손을 놓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은 파이와 단둘이 연회장 안 구석에 들어선 채다. 사람들의 시선을 거의 받지 않는 깊숙한 안쪽 구석인데도 실내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위치였다.

“마음에 드나? 눈을 떼지도 못하던데.”

그제야 리브엘이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파이의 목소리와 눈빛이 부드러워졌음을 확인했다. 내 등 뒤에서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는 파이가 어깨 위로 고개를 숙여온다. 그러더니 귓가에 대고 간질이듯 속삭였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다닐 걸 그랬어. 사람 많은 곳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매만지며 간질거리는 파이 때문에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간지러움 잘 타는 걸 알면서 이러는 걸 보면 분명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아까 기분 나빴던 걸 갚아주려는 저 못된 심보.

“손 떼요, 파이. 지금 여기 사람 많잖아.”

“아무 짓도 하지 않아. 걱정 말고.”

하지 말라고 해도 안 할 사람이 아닌지라, 나는 그저 마음을 비운 채 다시 주변을 살폈다. 화려한 드레스와 근사한 예복들을 입은 남녀들이 서로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건 마치 꽃과 나비가 만나는 한 장면 같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방문하신다는 말은 들었으나, 갑자기 외모가 변하셔서 몰라뵐 뻔했습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우리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 사내의 머리에 금빛 왕관이 씌워진 것을 보고 누군지 단번에 짐작했다.

이곳 제국의 황제는 또 에이든하고 사뭇 다른 느낌이네. 속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보이는 부분에서 에이든처럼 철없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더 근엄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이 물씬 든다.

그래도 황제인데 예를 갖춰서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 허리에 감긴 파이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연회를 진행했으면 좋겠군. 보다시피 숨어있는 중이라서.”

숨어있다고 말은 하지만 황제가 우리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다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우리를 가려주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연회장에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파이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그 모습 그대로.

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이자, 황제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카르디옌.”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사죄한 황제가 다시 뒤로 돌아 멀어지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곧 다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드느라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심장이 쫄깃했어, 방금. 창피를 당할 뻔했다고.

“당장 이 손 풀어요, 파이.”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뿐이야. 얌전히 있어. 와인이라도 가져다줄까? 허기지면 초콜릿은 어때?”

하여간 이 과보호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그렇게 내가 딴 사람한테 관심을 줄까 봐 무서운 거면 오히려 자기가 더 나한테 혼인해달라고 매달려야 정상 아니야? 정말 이 남자 속을 하나도 모르겠다.

“와인 마실래요.”

그러자 때마침 와인 잔 몇 개를 쟁반에 놓고 지나가는 시종이 우리 앞을 지나쳤다. 파이는 그 쟁반에 놓인 잔 하나를 자연스럽게 건져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약간 연두빛을 띠는 투명한 와인에서 오전에 마셨던 과일주처럼 사과향이 났다.

…설마 얘도 그 과일주하고 똑같이 내 미각을 공격하려나?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지?”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입을 맞추는 파이가 싱긋 웃는다. 저 혼자 달달한 세계에 빠진 듯 내 머리카락과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흘끔 쳐다보는 것도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우리 이런 사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보이려는 것 같기도.

설마 했는데 진짜 그런 목적으로 이러는 걸까?

“이거 맛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파이,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나 사람들 좀 만나고 싶은데.”

“어차피 지금 누구도 널 알아보지 못할 거야.”

“…왜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네가 치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보일 거거든.”

“뭐라고요?!”

이젠 하다 하다 이런 수법까지. 마력을 가진 드래곤의 소유욕이 내 사생활까지 침범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가슴이 홧홧해져서 홧김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물론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그 느낌은 과일주와 똑같았다.

으윽, 써!

“아무리 와인이라도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취해.”

“흥, 내 마음이에요! 한잔 더 마실래요.”

다시 우리 앞을 지나가는 시종에게 빈 잔을 건네고 새 와인 잔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도 한입에 전부 털어 마셨다. 차라리 혀에 닿지 않고 목구멍으로 직행시키니까 그나마 마실 만했다. 물론 주위의 누구도 나처럼 와인을 한 번에 비우는 사람은 없었지만.

“한잔 더?”

“네.”

뱃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파이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파이도 나를 말리지 않았고, 나는 와인을 전부 비우는 족족 새 와인 잔을 받았다. 레이라도 와인은 열 잔까지는 괜찮았다고 했으니까 딱 열 잔만 마시겠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렇게 한잔, 한잔 비우다 보니 어느새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얼굴도 화끈거렸다. 이제 겨우 일곱 잔밖에 되지 않았는데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파이, 파이. 땅이 막 흔들려요오…….”

“이제 그만 마셔. 취했다, 너.”

“이상하다? 레이라는… 열 잔까지 괜찮다고 했는데?”

파이가 내 허리를 붙잡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바닥에 넘어져 추태를 부릴 뻔했다. 이상하게 열이 나는 것처럼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운데 기분이 좋았다. 허공에 둥실둥실 뜨는 느낌. 연회장의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말소리도 거슬리지 않았다.

“곧 무도회가 시작인데. 왈츠는 포기해야겠군.”

“왈츠! 왈츠, 춰야 하는데!”

오늘을 위해 레이라에게 열심히 배운 왈츠를! 꼭 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의 넓은 홀에서 추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외쳤다. 지금 당장 춤을 추고 싶어져서 팔을 흐느적거렸는데, 파이가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 반 바퀴 빙글 돌렸다.

“앗!”

이미 힘이 빠진 다리가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가볍게 감싸 안아 당기는 파이에 의해서 그의 가슴팍에 파묻혀버렸다.

“고작 와인에 취하다니. 면역이 없어서 그런가. 앞으로 천천히 마시게 해야겠군.”

“으, 어지러워…….”

“내 목에 팔 감아.”

겨우 반 바퀴 돌았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 뇌보다 몸과 신경 속도가 더 빠르게 움직여서 그런지 더 어지러운 느낌이다.

일단 파이가 하라는 대로 그의 목에 팔을 감자, 그가 나를 조심히 안아 들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그의 어깨에 축 늘어진 채 뻑뻑하고 무거운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휴게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반짝반짝 화려하던 실내를 벗어나 어두컴컴한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파이와 낯선 사람의 조용한 발소리가 이어졌고, 곧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황족 전용 휴게실입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편히 쉬십시오.”

우리를 안내해준 사람 목소리가 낯설다 했더니 아까 황제로 보이던 그 남자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흐릿한 초점 안으로 번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봤던 그 황제가 맞았다. 파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고 실내로 들어섰고 동시에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속은 괜찮은가?”

나를 기다란 소파 위에 조심히 앉히고는 파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가 괜히 얄미워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지럽잖아. 일부러, 나한테 일부러 먹인 거죠?”

“네가 달라고 했잖아. 먹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이 얄미운 거짓말쟁이가?!

분명 내가 사람들한테 다가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와인을 허락한 게 틀림없다. 평소라면 절대 마시지 못하게 했을 거다. 뭐, 그의 말대로 내가 마시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할 말 없지.

“속이 뜨거워요. 더워.”

“벗을까?”

…뭐라는 거야, 이 변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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