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마 언젠간 네 그분께서 후회할 날이 올 거야. 점점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지는 너를 놓칠까 봐 불안해서 초조해할걸?”
“응 맞아. 그렇다고 했어.”
떨어져 있으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새를 보는 것처럼, 파이는 늘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 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게 좋았었는데. 하지만 역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괴로운 건 나니까.
“그러니까 아예 딱 잘라서 각서라도 쓰자고 해. 천년 이후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혼인서약을 하자고. 증인이 필요하면… 내가 해줄 수 있긴 하지만…….”
말끝을 늘이는 레이라를 향해 나는 미간을 확 구겼다. 나야 열매의 효과로 인해 수명이 늘어났지만 보통 인간인 레이라는 그게 아니니까.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마.”
“알았어. 안 할게. 자, 그만 울어야 해. 오늘 예쁘게 보여야 하는 날이잖아? 여기서 눈 더 부으면 큰일 나.”
“응.”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내고 얼굴을 정리했다. 조금만 울었는데도 눈이며 코가 뻘겋게 부어서 울었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레이라가 얼음주머니를 준비해주고 그걸로 눈두덩을 냉찜질해서 최대한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다행히 부은 게 금방 가라앉아서 안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실에서 준비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도착했다. 정신없이 단장에 열을 올렸고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꾸몄다.
“치즈. 네 드레스가 아슬아슬해.”
“응. 아슬아슬.”
코르셋으로 허리를 잔뜩 졸라맸더니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윗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게다가 드레스 가슴 라인이 정말 많이 파여 있어서 뽀얀 가슴의 절반이 보이는 것 같았다. 머리를 전부 땋아 위로 틀어 올려서 가려줄 것이 없다 보니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내가 봐도 야한 느낌이긴 하다. 뭐, 이런 드레스를 한 번쯤은 입고 싶었어. 파이가 이거 보면 앞으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예뻐. 굉장히 잘 어울린다, 치즈. 졸업 파티 때 입었던 것보다 훨씬 더 어울려.”
“레이라 네 보라색 드레스도 엄청 성숙해 보이는데? 이걸 에이든이 봤으면 아마 널 무도회에 가지 못 하도록 말렸을 것 같아. 아니면 무조건 따라왔을지도?”
나는 진심을 담아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두 손을 맞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콧김까지 불어가면서 열정적으로 반응하자 레이라의 뺨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게 참 보기에 좋았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서. 과거에 자기네 저택 집사를 마음에 품었을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레이라의 행복이 내게도 전해져서 나까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행복이 끝까지 유지되길 빌 뿐이다. 에이든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인데. 한 제국의 황제이긴 하나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단장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져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드레스가 구겨질까 봐 앉지도 못하고 저택 정문 근처의 창가에 달라붙어 서성거리기만 했다.
“아. 파이 왔다.”
곧 익숙한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레이라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향했다. 저택 앞 분수대를 빙 둘러서 우리 앞에 멈추는 마차 안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파, 파이?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던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은, 파이가 관리하기 귀찮아서 쭉 길러온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카락은 에이든 만큼이나 짧고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가 입은 예복도 늘 보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더 화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내게 다가온 파이가 짧아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긴 머리보다 이게 눈에 덜 띌 것 같아서. 치즈 네가 짧은 머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긴 머리카락도 어울렸지만 짧게 자르니까… 쓸데없이 더 멋있어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세상 초연한 표정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 그 눈매를 아주 살짝 가릴 정도의 앞머리가 그의 이마를 덮어서 얼굴이 더 작아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의 느낌이 긴 머리카락일 때와 사뭇 달랐다. 어딘지 더 멋있고 늠름하고. 전보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그의 아름다운 얼굴선이 더 잘 드러나서 더 근사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파이를 본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 눈을 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나 보다. 파이의 달라진 모습에 레이라도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와 파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렇게 잘라버리다니. 그렇게 잘라버리면 파이가 얄미울 때 모른 척 잡아당길 수가 없잖아!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괜히 더 불안해진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내 드레스 차림을 한번 가볍게 훑어본다. 그러더니 내 가슴 부근에 머물고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뺨 근육을 씰룩거린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예상했던 것보다 더, 도드라지는군. 꼭 이래야 했나?”
“파, 파이야 말로 누구 마음대로 머리카락 자르고 오는 거예요!”
“나야 네게 잘 보이기 위함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은 필요 없어. 하지만 넌, 지금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잖은가?”
한숨을 쉬는 파이가 입맛을 다시며 마음에 들지 않음을 그대로 표출했다. 그래서 나 역시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누가 하고 싶은 소리를? 나도 파이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거든요?”
“그런 건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보이면 되는 거다.”
“드레스 구입을 허락한 사람은 파이라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알았다. 우선 마차에 오르도록 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저도 할 말이 없는지 내 말에 쉽게 수긍했다. 그래서 나는 턱을 치켜들고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파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레이라는 뒤따라온 자신의 마차에 탔고, 레이라를 에스코트해준 파이가 우리 마차에 탑승한 뒤 출발했다.
“그 머리 파이가 직접 다듬었어요?”
조금 뾰로통해 있는 파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내 가슴 부근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러더니 미간을 설핏 찌푸린다. 보아하니 드레스를 사들인 자신을 원망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허리를 더욱더 꼿꼿이 세웠다.
“드레스 입고 한껏 꾸미니까 이제 좀 실감이 나요. 재미있겠다. 설마 여기 마세티앙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도 파이의 존재를 알아요?”
“어.”
“양국 축하 무도회장에 드래곤이 난입해서 망치는 거 아닌지 몰라.”
“황제에게는 이미 전언을 보내놨으니 상관없다.”
“아, 그래요? 철저하시네요. 하긴 파이가 워낙 머리 쓰는 건 선수였지.”
일부러 비꼬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는데도 파이는 내 말보다 내 가슴이 더 신경 쓰이나 보다. 어떻게 해야 저 도드라진 가슴골을 더 가릴 수 있게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팔짱을 껴서 가슴을 위로 더 끌어올렸다. 역시나 파이의 좁혀진 미간이 더욱더 구겨져 깊은 주름이 파여 버린다.
“그렇게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자들 다 이런 드레스 입고 올 거고, 나만 이러는 것도 아닌데.”
“그들과 너는 달라.”
“뭐가 다른데요?”
“너는 가만히 있어도 타인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끄는 유형이라 더 문제지.”
“왜요? 나한테 다른 남자가 접근해오면 내가 홀랑 넘어갈까 봐 무서워요?”
돌직구로 한 방 날렸는데 파이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면 답은 하나지. 긍정하기 싫은 못된 심보. 하여간 저 억지에 똥고집은 누구도 못 말린다.
“파이도 나를 믿지 못하나 보네요. 그렇게 불안해할 거면서 연애는 무슨.”
“불안해하지 않아.”
“지금 그 걱정 자체가 불안함을 뜻하는 거랍니다. 대체 그 고장 난 감정이 다시 제 역할을 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감도 오지 않네요.”
괜히 더 심술이 삐죽 솟아나니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나도 모르게 삐딱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아까 레이라와 에이든처럼 서로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달콤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걸까?
어쩐지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저릿해졌다. 서로 몸을 섞을 때는 그저 좋기만 했는데. 막상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밤송이처럼 가시를 세워버렸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기분이 점점 심해 속으로 빠져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창문 밖만 쳐다봤다. 지금 대화를 더 이어가면 서로 감정만 상하고 상처 입힐 말만 할 것 같아서.
어느새 어두워진 수도의 대로변에 길을 밝히는 불꽃이 긴 장대 꼭대기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여러 대의 마차가 줄지어 황궁으로 향했다. 곧 성문을 통과한 우리 마차가 황궁 안으로 도착해서 멈췄고, 파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하차했다.
블랑 제국의 얼음 성에 비하면 별것 없네.
얼음 성이 워낙 화려하고 신비로워서 같은 성이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무 감흥 없이 무채색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솔직히 황궁보다 우리를 지나치는 주변 귀족들의 드레스에 더 눈길이 갔다. 그리고 주변 곳곳에 똑같은 제복을 입고 서 있는 기사들을 눈여겨 봤다.
“치즈.”
그랬는데 갑자기 내 뺨을 잡고 저를 보게끔 만드는 파이에 의해서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 남자만 보면 너무 가슴이 뛴다. 머리카락이 짧아진 이후로는 그의 미모가 심각하게 빛을 발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요?”
“…아니다. 들어가지.”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포기한 듯 말을 돌린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미는 사이, 옆에서 불쑥 다른 손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기다리고 있었어, 치즈.”
새하얀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눈부시게 화려한 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리브엘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그의 짙은 초콜릿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리브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에스코트를 맡아도 될까?”
“미안하지만 내 쪽이 먼저다.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응?
곧 내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은 파이가 나를 당기는 바람에 그의 품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갑자기 두 남자 사이에 끼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주변에서 화기애애 웃던 사람들이 전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리 셋을 쳐다보며 조용히 쑥덕거린다. 뒤따라 내린 레이라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으음,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한담?
“리브엘. 다시 보니 반가워. 하지만 에스코트는 파이가 해주기로 해서.”
“아, 그렇구나. 몰라뵈었네. 머리카락이 짧아져서 그냥 네 집사쯤 되는 줄 알았어.”
환한 미소를 짓는 리브엘의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비아냥거림이다. 리브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아니면 진짜 파이를 집사로 착각했던 걸까?
아리송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이, 리브엘이 내 오른쪽 손을 덥석 잡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서늘한 손도 손이지만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았던 리브엘의 돌발행동에 더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