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나 아까 과일주라는 거 먹어봤는데, 너도 그거 먹어봤어?”
“과일주는 식전주로 마셔. 와인보다는 약하고 입맛을 돋게 하는 음료니까.”
그게 음료로 분류되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정말 내가 귀족이 아닌 게 천만다행으로 느껴질 정도.
“자, 이제 말해봐. 너무 궁금해. 둘의 이견이 조금은 좁혀지기라도 했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레이라의 물음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좁혀진 것도 풀어진 것도 아니긴 한데. 이젠 나도 모르겠어. 그냥… 포기 단계라고나 할까?”
“뭘 포기해? 설마, 둘의 관계를 정리한다거나 뭐 헤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이라가 진지하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만 끄덕거렸다.
“헉! 저, 정말이야?”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어. 황실 무도회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율해보려고.”
파이와 헤어진다, 라. 이제 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까 과연 헤어질 수 있을까 싶다. 그 여행이라는 말 한마디에 이런 기분이 되었나 싶기도 하고. 만약 얼떨결에 그를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의 빈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 요즘 들어 파이가 없는 삶은 상상이 되질 않으니까.
그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너무 큰 문제다. 차라리 나와 다툰 뒤에 차갑게 굴었더라면 상처는 받았겠지만 그를 떠날 결심이라도 할 수 있었을 거다. 마음의 정리도 쉬웠을 거고.
“그건 아니고 혼인서약서를 포기하고 그냥, 연애나 즐기다가 서로 마음이 변하면 헤어지는 거고……. 인생의 순리를 따르자는 거지. 마음을 비우자는 뜻이고.”
“그 혼인, 절대 안 해주겠다고 고집부리는 거야?”
“일단 앞으로 천 년간 연애해보고 그 뒤에 다시 생각해보자고는 하는데…….”
“처, 천년?”
확실히 레이라는 인간답게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천년은 영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나도 혼란스러워. 점점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니까 곤란하기도 하고.”
말하면서 주스를 한 모금 홀짝거리는 사이, 응접실의 창문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레이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곳을 쳐다봤다. 그러자 너무 익숙하고도 낯선 사람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래서 두 눈을 끔뻑거리며 창밖의 남자를 보다가 레이라를 쳐다봤다. 레이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눈꺼풀을 빠르게 파닥거리며 안절부절못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레이라. 저 사람, 에이든 맞아?”“으응……. 화, 황제 폐하께서… 여, 여긴 이 시간에 무슨 일인지. 미안, 치즈. 잠깐 뵙고 올게.”
유리 창문에 달라붙어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남자는 에이든이 분명했다. 은발의 저런 꽃미남은 흔치 않으니까. 드레스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일어난 레이라가 짐짓 아닌 척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기고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봤다. 레이라의 손가락이 긴장한 듯 떨리는 것을. 또한, 발그레해진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감도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뜻?!
왠지 궁금해서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주스를 조금씩 입안에 흘려보냈다. 레이라가 창문을 열자 약간 후끈한 여름 공기가 밀려들어 오면서 두 사람의 조곤조곤한 대화가 얼핏 들려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폐하?”
“눈뜨자마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라서. 오늘따라 유독 보고 싶더군.”
…으으, 닭살. 에이든에게 저런 느끼한 면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저, 저녁에 찾아오실 줄 알고. 단장도 하지 않았는데…….”
“단장 하지 않아도 예뻐. 오늘 황궁 무도회가 있으니 저녁에 보지 못하잖아. 그래서 미리 보려고. 그런데…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얼굴이 보이질 않아.”
아주 진하게 섞은 꿀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다. 코와 입이 전부 다 얼얼할 정도로 달달한 분위기에 심취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참 기분이 요상하다. 부러운 것도 있고 민망한 것도 있고. 괜히 파이한테 더 미안해지다가 살짝 원망스러워지기도.
…갑자기 파이가 보고 싶어지네.
정말 미워 죽겠는데도 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거만한 콧대를 콱 꼬집어주고 싶은데, 매끈한 뺨을 만지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복잡해지니까 심기도 불편해지는 거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게 초조해진다. 그러고 보니 파이는 나 없는 시간에 대체 뭘 하고 있을까?
“흠흠, 다녀왔어.”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은 레이라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찻잔을 든 레이라의 손등까지 벌겋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에이든이 있던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창문은 닫혀있었고, 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든 그냥 간 거야?”
“응. 폐하께서 치즈 네게 인사 전해달래. 앞으로는 네 그분이 무서워서 직접 대화도 못 할 것 같다고 하셨거든.”
그때 블랑 제국에서 파이가 에이든을 좀 살벌하게 노려보기는 했다. 이젠 나랑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게 살길이라고 생각했나 보네.
“그렇구나. 그런데… 둘이 벌써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어쩜 나한테 얘기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저녁에 내가 가고 나서 만났던 것 같은데!”
“아……. 응, 사실… 말하고 싶었는데 치즈 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때를 기다렸거든.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숨기고 있었네.”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머쓱해져서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레이라의 말을 기다렸다.
“좋은 분이신 것 같더라. 황제인데도 예의를 지킬 줄 알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거만하게 구는 모습은 없어서 오히려 더 정감이 갔어.”
“마음에 들었나 보네? 다행이다.”
“적어도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서……. 이번에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역시 마음이 서로 통해야 한다는 거야.”
“마음이 통해야 한다니?”
수줍게 미소 짓는 레이라의 얼굴은 꽤 평온해 보이면서도 그 안에 설렘이 녹아있었다.
“혼자만의 짝사랑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이었는지 깨달았거든. 감히 황제 폐하의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 부담이긴 해도, 사랑받는 행복이 어떤 건지… 처음 느꼈어.”
끝없는 관심과 애정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것일 터. 나 역시 파이의 끝없는 하늘처럼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음은 세상 그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 차고 넘치는 거니까. 늘 가슴이 뛰고 늘 가슴이 시려서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느낌.
“레이라. 지금 행복하구나?”
“…응.”
내 눈을 마주 보는 레이라의 푸른 눈동자에 조금씩 물기가 차올랐다. 슬픔이 아닌 기쁨에서 비롯된 감격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저 말없이 손수건을 챙겨다가 건네주었다.
에이든이라면 파이만큼이나 집요하게 애정을 퍼붓는 성격이니, 아마 레이라하고도 잘 맞을 거다. 레이라는 오래전부터 사랑에 목마르던 귀족 아가씨고, 에이든은 제 사랑을 마음껏 안겨줄 상대를 찾고 있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 나쁜 집사 놈은 잊어버리고 제국의 황후로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으며 귀여운 아이들도 낳고……. 아, 그건 좀 아쉽네. 레이라의 아들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실제로 벌어지지 못할 상황을 상상하며 그걸로 만족했다.
“이런, 치즈, 네 이야기를 듣다가 중간에 끊겼네.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손수건 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콕콕 찍어내는 레이라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냥 마음을 비우는 게 빠를 것 같아. 강요하기도 지치고. 그저 물 흘러가는 대로 세월에 몸을 맡기다 보면 천년쯤은 금방 가지 않을까 싶어.”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별수 없잖아. 이제 싸우기도 싫고 다퉈서 감정 소비하는 것도 좀 그래.”
“정말 그분도 너무하시다. 이십 년간 치즈 너를 거뒀으면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하지 않았나?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 해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뜻만 고집하는 건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더 돼?”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신의 뜻을 설명하는 레이라를 향해 자조하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가 먼저… 고집을 부렸는걸.”
“아니지. 너는 타당한 주장을 한 거야. 연애를 시작하는 건 혼인을 전제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분은 지금 그 혼인이라는 걸 무작정 피하고 있는 거잖아. 그럼 너와 그저 즐겨보겠다는 심산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레이라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어쩐지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잔뜩 기가 죽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레이라가 다시 호흡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는 치즈 네가 행복하길 바라. 하지만 네 그분은 어떻게 해야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면 당분간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 서로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더라.”
“…유효기간?”
“연애도 사랑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 서로의 감정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때를 놓치게 되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어. 지금 너와 그분을 보고 있으면 뭔가 약간씩 어긋나는 게 눈에 보여.”
어긋난다, 라…….
“둘이 맞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충분히 잘 어울려. 다만 서로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건 서로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야.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해. 너도 그분을 꽤 오래 좋아했잖아?”
그 말에 또 가슴이 울컥했다. 그 말이 맞아. 지금도 파이를 좋아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파이를 좋아하고 있어.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끝이 보이는 사이가 된 것 같아서. 나는 파이를 떠나서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은데. 떠날 생각을 하니 점점 초조해지고 무서워져.
가슴이 시리고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렁그렁 차버린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와 버렸다. 이번엔 반대로 레이라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주었고, 코를 훌쩍거리는 나를 향해 다시 환하게 미소를 그렸다.
“나는 치즈 너라면 이번 일을 현명하게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야. 이렇게나 귀엽고 예쁜 치즈를 누가 싫다고 마다하겠어?”
“…파이는 내가 울 때마다, 못난이라고 놀렸는데.”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잖아? 괜히 그러는 거야. 네가 우는 게 너무 예뻐서 아무한테도 보여주기 싫으니까 그랬던 게 분명해.”
언제 느껴도 레이라는 말을 참 예쁘게 잘한다. 나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대신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에 같은 여자임에도 몇 번 반할 정도였다. 레이라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