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생각해 봐. 너 가고 싶은 곳 많았잖아. 특히 큰 배를 타보고 싶다고도 했고. 깎아진 절벽이 있는 바다도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폭포는 죽기 전에 꼭 볼 거라고 했잖아.”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물론이지. 내가 너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없어. 물론 내가 없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제외.”
말하면서 내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고 체취를 맡으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의 숨결이 내려앉아 또 허리를 잘게 떨며 나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그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늘 밤마다 그랬던 것처럼 바로 유혹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다.
“내일 무도회에서 즐겁게 놀려면 오늘은 푹 쉬어야 하니까. 손꼽아 기다리던 무도회 참석을 망치게 할 수는 없지.”
요즘 들어 확실히 느끼기는 한다. 그가 굉장히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저돌적으로 내 감정을 밀어붙일 때는 잘 몰랐었다. 하지만 며칠 객관적으로 그를 지켜본 바로는… 참 미워할 수 없는 예쁜 돌덩이다.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바위. 누구든 반할 매력을 가진 남자.
그러나 바위는 심장이 없는 그저 돌덩이일 뿐. 속지 말자. 그의 말을, 전부 믿지 말자.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이 날려버리고 안락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저 내일 진행되는 황궁 무도회와 그 이후에 떠날 여행을 잔뜩 기대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말이다.
다음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무도회 날이 밝았다. 아침에 파이가 곤히 자는 나를 깨워주었고, 나는 잠도 덜 깬 채 욕실로 끌려들어 갔다.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씻겨준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말려준 뒤에 간단한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단장은 레이라의 저택에서 같이 하기로 했고 점심 식사 이후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래서 며칠 만에 파이와 단둘이 오붓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나를 화장대에 앉혀놓고 젖은 머리카락을 빗질로 말려주는 파이가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춰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화장대 위에 놓인 사파이어 머리 장식을 어루만지던 나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봤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터라 아직 발갛게 물들어있는 뺨을 하고 있는 나. 확실히 어제의 나와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삶이 무기력한 사람처럼 표정 하나 없이 우울하고 처연한 눈빛을 머금은 채였다. 오늘은 제법 생기가 느껴져서 그나마 밝아진 모습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아직은 살만한가 보다.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에 아주 조금 들뜨기는 했다. 물론 아직까지 파이에게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왕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 마당에 이별여행쯤이야 나쁘진 않겠지. 그러나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카데미에 치치르자 왕국 출신이 워낙 많았거든요. 친하진 않았어도 오랜만에 익숙한 사람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좀 들뜨는 건 사실이에요.”
“정말 그것뿐인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그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 그가 여전히 거울 속 나를 지그시 내려다 봤다. 두피를 간질이는 느낌에 어깨를 살짝 모아 잘게 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렸다.
“왜 자꾸 캐물어요?”
“듣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아마도 내가 여행에 들떠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직설적으로 나오면 더 대답해주기 싫다는 걸 모르는 건가? 특히나 나는 아직 감정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건만.
“여행에 관한 기쁨은 딱 이만큼이에요. 이만큼. 덜도 말고 더도 아닌 딱 이거요.”
나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반대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손톱을 가리키면서 당돌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파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그만큼이라도 기쁨을 느낀다니 나 역시 기쁘다.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거든.”
…하여간 왜 저렇게 천연덕스러운지. 말이라도 못하면.
나는 저 요망한 입을 그냥 콱 꼬집어주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누르며 애써 그를 무시했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유지하며 내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 집중했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찰랑거린다. 마지막 빗질을 마친 뒤에 파이가 브러시를 화장대 위에 내려놓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마 아침 이후로는 음식을 먹기 힘들 거다. 보통 귀족들은 연회가 있는 날은 소식하거나 아예 식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라가 점심부터 거를 예정이라고 했었어요.”
“우리 치즈는 배고픈 느낌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했으니 먹어야지? 식사는 이미 준비해두었다.”
두 눈을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흠뻑 녹아내려 있다. 기대해도 좋을 거라는 느낌으로 나를 보는 그를 힐끔 올려다본 뒤에 그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나, 평소라면 날뛰면서 기뻐할 정도의 엄청난 요리들이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소스의 향기에 벌써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양고기로 준비해봤어. 마음에 들 거다.”
그냥 눈으로 봐도 고기가 아주 부드러워 보였다. 또 그 옆에 놓인 샐러드는 채소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쌓아놓은 것처럼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갓 구워낸 빵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상태로 정교하게 잘려 탑처럼 쌓인 상태다. 또 처음 보는 둥근 유리잔에는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색이 섞이지 않은 채 담겨있었다.
“이건 무슨 주스예요?”
처음 보는 음료가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차마 손대지는 못하겠어서 눈으로만 봤다. 그러자 파이가 내 앞에 잔을 가까이 가져다 놓아주었다.
“과일주. 도수는 최대한 낮추라고 했으니까 안심하고 마셔.”
“…웬 과일주?”
“슬슬 성인도 되었으니 이제 주스 대신 와인을 마시는 법도 배워야지. 언제나 네가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너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이게 다 무슨 일이담?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정말 파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아주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이제 내가 좀 성인같이 느껴지기는 하나 봐요?”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미간을 확 좁히며 그를 노려봤다.
“무슨 의미예요, 그 비웃음?”
“네 육체는 성인일지 몰라도 네 정신은 언제나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 아마 평생을 가도 네가 어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흥. 어련하시겠어요? 사천 년을 사신 드래곤님이니.”
그래도 그렇게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워낙 자주 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그가 그래도 나를 성인으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일단 주는 건 사양하지 않아요. 잘 먹을게요.”
나는 과일주가 담긴 잔을 조심히 들어 냄새부터 맡아보았다. 알코올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보다 달달한 사과 향이 더 강했다. 그 두 가지가 오묘하게 섞여서 낯설기는 했지만, 파이가 내게 맛없는 걸 먹일 리가 없다는 믿음이 더 강했다.
그래서 의심 없이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켁!”
입에 넣은 과일주를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식도가 타들어 갈 것 같은 화끈함에 기침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비강을 타고 올라와 뇌를 강타하는 알코올의 향에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으엑, 이게 뭐야!”
괜히 삼켰다. 그냥 뱉을걸. 나는 허둥지둥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쓴맛이 가시질 않아 울먹거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사과향이 더 강했는데? 마시니까 왜 알코올 냄새가 이렇게 센 거람?
몇 번이나 물을 마시고도 어리둥절하다가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파이를 쳐다봤다. 그는 내게서 고개까지 돌린 채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숨죽이며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괜히 심통이 잔뜩 나서 입을 삐죽거리고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파이가 나를 보고는 치아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건 어른들이 마시는 와인에 비해 턱없이 도수가 낮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술이라던데. 귀족 가에서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마시게 하는 과일주라고.”
“이, 이게… 이걸 어린 애들이 먹는다고요?”
“확실히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군. 가능할지 모르겠어.”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맛없는 걸 레이라도 먹었다는 걸까?
나는 일단 의심을 하면서 주어진 식사를 다 끝냈다. 그리고 파이가 내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먹였다는 사실에 속으로만 분노하며 레이라의 저택에 찾아갔다.
“그럼 황궁 무도회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다. 너무 예쁘게 꾸미지는 말고 적당히.”
“왜요?”
“내 여자를 다른 놈들 눈에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하여간 저 어울리지 않는 질투에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착잡하면서도 괜히 가슴이 들떠버리는 그런 느낌이라 얼굴이 조금 더워져 버렸다. 거의 여름 날씨에 가까워져서 그런 걸지도.
마차에서 나를 내려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파이가 그래도 아쉬운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더니 내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와 입을 맞춰오더니 입술을 떼어내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나 싶어서 가만히 눈동자만 굴렸다. 혹시나 여기서 눈치 없이 혀를 밀어 넣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치즈! 왔어?”
그러다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레이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덕분에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며 겨우 떨어져 나왔다. 심장이 벌렁벌렁, 혹시나 레이라가 우리를 보았을까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스럽게도 마차가 가려주고 있어서 보지 못한 듯.
아무리 친구라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라고.
“어, 어서 가요. 빨리.”
은근 서운해하는 그를 등 떠밀어서 마차에 태우고 보낸 뒤에야 나는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린 것을 어떻게든 식혀보려고 손부채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택 입구 근처에서 서 있던 레이라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어? 일부러 천천히 나왔는데. 아직 의상실 사람들 도착 안 했지?”
“응. 그런데 치즈 너 오늘따라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여. 화해한 거야?”
“…응? 화해라니?”
“지난번에 블랑 제국에서부터 네 키다리아저씨하고 다퉜었잖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일부러 더 같이 있기 싫으니까 우리 저택으로 도망 온 것 같았는데?”
…또 너무 티 났나? 지금까지 레이라가 그에 대한 걸 거론하지 않아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딱 꼬집어 정곡을 찌를 줄이야. 최대한 아닌 척 연기를 했었는데, 역시 내 연기력은 파이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가 보다.
결국,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해서 눈꺼풀만 빠르게 파닥거리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음, 뭐… 싸운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좀, 애매하긴 한데…….”
“네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린 게 다행이지. 어서 들어가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 보여.”
레이라가 활짝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하녀가 레이라에게는 차를, 내게는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었다. 그 주스를 보니 아까 먹은 과일주가 떠올라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